금옥 씨의 일기
금옥 씨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금옥 씨는 몇 년 전 대보름 밤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시간이 지났지만 눈앞에 나타란 깊은 구덩이를 간신히 피해 달아난 기분은 여전했다. 이미 지나간 날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금옥 씨를 위로한다. 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구름하나 없는 청량한 날씨였다. 저 멀리 "고물 삽니다. 고물 삽니다. 너덜너덜 고물도 삽니다."라고 외치는 확성기 소리가 점점 징글징글 울려 퍼지다가 이내 바람처럼 멀어졌다. 금옥 씨 앞에 놓인 따뜻한 녹차 잔이 어느덧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금옥 씨는 달러 할머니에게서 쥐불놀이 사건 이야기가 나오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의 이야기는 분선씨와 금옥씨네 가족만 아는 깊이 묻어둔 이야기였다. 금옥 씨는 긴장되는 마음에 괜히 두 손바닥을 부비적 비벼 보았다. 이미 거칠어진 손과 손이 만나 '샤스삭, 샤스삭' 하는 작은 소리를 내었다. 금옥 씨는 달러 할머니가 몇 년 전 쥐불놀이 사건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망설여졌다. 조마조마한 금옥씨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괜히 물었다가 이미 묻힌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게 아닐지 모르겠네.. 그래도.....'
"그런데, 어르신. 어떻게 오래전 쥐불놀이 사건을 알고 계시는 거예요?"
청명한 공기 사이로 고물 산다, 고물 산다는 확성기 속 외침이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금옥 씨는 달러 할머니에게 물었다.
"이 사람아,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는가. 허허허. 분선씨 송장이 되어 관에 들어갈 때까지 자네한테는 끝까지 그 이야기 안 했나 보군. 걱정할까 말이야. 아무튼 분선씨, 딸 위하는 마음은 세상 최고라니까."
금옥 씨는 몰랐지만 분선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딸에게 겉으로는 목석같이 냉정한 엄마. 하지만 속으로는 딸에게 퐁당 빠져 있는 그런 엄마. 분선씨는 옛날 사람이라 마음에 안고 있는 금옥 씨에 대한 사랑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숨겼다. 의도적 숨김이라기 보다는 분선씨는 태어나기를 그런 사람이었다. 그저 분선씨가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을 담은 단어라고는 고작 '야~ 밥 묵었냐?'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게 최선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분선씨는 마음속으로 언제나 막내딸 금옥 씨를 지지했다. 금옥 씨가 잘 살아가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분선씨가 살아 있었던 그때, 쥐불놀이 사건이 발생한 그때도 그랬다. 금옥 씨의 딸 현정이가 던진 쥐불이 잘못되어 큰일로 번질까 봐 까만 연기를 헤치고 들어간 분선씨였다. 솜이불을 들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분선씨는 우리 금옥이를 잘 살아가게 한다면 전혀 무섭지 않았다.
"네, 어르신. 엄마가 그때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어요. 빌라 지하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었다고. 그러니 신경 안 써도 된다고요. 현정이가 던졌던 쥐불이 그 자리에서 연기만 내고 꺼져 버렸으니 어떤 문제없었다고 말씀하셨어요. 형사들도 찾아와 그때 범인을 찾는다고 여기저기를 수소문했지만 범인은 사라진 후였고요. 그렇게 잊혀 간 일이에요. 그런 일이에요...."
금옥 씨의 이야기를 듣던 달러 할머니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래. 정말 다행이야. 분선씨가 그때 바로 활활 타오르는 쥐불로 달려 들어가 솜이불로 덮어 껐거든. 어찌나 빠른 양반인지 큰 불로 번질 뻔했는데 솜이불 하나로 훅하고 한 번에 막아 버렸지. 슈퍼맨 같았어."
달러 할머니는 그때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장난스레 작고 주름져버린 주먹을 휙 하고 날려 보였다.
"근데 말이야. 이건 비밀인데. 사실 그 빌라가 내 거거든. 허허허 허."
달러 할머니는 웃기다는 듯 큰 소리로 웃어 보였다.
"네에? 그 빌라가 어르신 건물이었다고요?"
금옥 씨는 달러 할머니가 동네에서 큰 부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현정이가 쥐불을 던졌던 그 빌라 주인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도 그때 분선씨 옆에 있었다고. 옆에 있어서 봤는데 불이 아주 조그마하게 났어. 분선씨가 용감하게 몸을 날려 불을 꺼준 덕분에 내 빌라에 어떤 문제도 없었다고."
달러 할머니는 허허 웃으며 이마를 반짝이며 사람 좋게 웃던 분선씨를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 이번에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었다고 들었네. 그 이야기 좀 해볼까?"
달러 할머니는 웃음기 사라진 얼굴을 하며, 금옥 씨를 바라보았다. 금옥 씨는 아파트 청약 계약금 이야기가 나오자 살 위로 닭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금옥씨가 꿈꿔온 서울 집 한 채를 가질 수도 있는 상황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래, 내야 하는 청약 계약금이 총얼마인가?"
금전에 안목이 높은 달러 할머니는 본능적으로 하나 하나 짚어가며 날카롭게 묻기 시작했다.
"네, 어르신 청약 계약금은 9,000만 원이에요."
금옥 씨가 괜히 고개를 숙이며 소곤소곤 대답했다.
"흠... 그래? 요즘 청약 계약금 시세치 고는 꽤 비싸네. 도대체 어디길래 그리 비싼가?"
달러 할머니 마저 청약 계약금 금액을 듣더니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보통 분양가가 5000만 원이 평균이었던 때였다. 그런데 그 가격의 두 배에 해당하는 가격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어르신. 이왕에 하는 거 좋은 곳으로 응모했는데 가격이 많이 비싸네요. 혹시 알고 계실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에 뉴스에서 났는데. 저기 송파구 밑에 있는 강남 끝자락이에요. 얼마 전 애들 데리고 애기 아빠랑 한번 가봤는데 아직은 허허벌판이더라고요."
금옥 씨는 달러 할머니가 청약 당첨된 곳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져 자세히 대답했다.
"흐음..."
달러 할머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좋네. 좋아. 아~ 주 좋아. 자네 최선을 다해 반드시 청약 계약금을 모두 내게나. 분선씨가 하늘에서 자네를 도우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나 보네."
달러 할머니는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은 듯했지만, 말을 아끼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잘 몰라요. 서울에 있다니까 용감하게 도전했네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도 하잖아요. 어르신 말씀처럼 괜찮은 곳이라니 기분이 참 좋네요. 요즘은 서울에 제 집을 갖게 된다는 생각에 자다가도 웃음이 나와요."
금옥 씨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자네가 워낙 부지런하고 동네에서도 잘하니까 복덩어리가 굴러왔나 보네. 돈이라고 하는 것은 좇아 다닌다고 나에게 오는 게 아니거든. 결국 그것도 제 주인을 찾아가는 게지. 허허허."
달러 할머니는 금옥 씨가 기특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그럼 이제 9,000만 원을 다 모은 건가?"
달러 할머니가 물었다.
"아니요. 어르신. 아직 천만 원이 남았습니다. 청약계약금 납입일까지 기한이 남아 있어서 수소문해보려 합니다."
금옥 씨가 말했다.
"그래, 그래. 그 돈까지 내가 빌려줄 수도 있지만 지금 보니 그건 자네 몫이네. 천만 원이 자네에게 오게 되는지 우리 한번 지켜보세."
달러 할머니는 진중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르신, 이렇게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어르신 시간을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었네요. 빌려주신 돈은 곧 갚도록 하겠습니다."
금옥 씨가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뭐 자네야... 이 동네 보증수표 아닌가. 천천히 갚게나. 분선 씨와의 정도 있고, 너무 빨리 받으려 하면 하늘에 있는 분선씨가 서운해할 걸세."
달러 할머니는 일어서려는 금옥 씨를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그리고는 일어서 뒤돌아가는 금옥씨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잘 되었네. 잘 되었어.'
달러 할머니는 이제는 세상에 없는 분선씨가 마치 옆에 있는 듯, 잘되었다는 말을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중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