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일입니다.
뉴스레터를 구독하게 되었습니다. 안현주 변호사님이 일주일에 한 번 보내주는 메일이었습니다. 안현주 변호사님은 미국 변호사 시험 강의와 관련한 유튜브 및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고, 여러 곳에 칼럼을 쓰시고 계시는 분입니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평소 영상과 글을 감사히 보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에 구독 신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배달되어 오는 글 속에는 세명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일상과 변호사로서 겪었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의 모래성' 이야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뉴스레터에 적혀있던 내용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렇습니다(기억과 원문 내용이 다소 다를지라도 깊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몇 년 전, 안현주 변호사님은 인생 방향과 관련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지켜보던 남편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문제이니 장모님과 한번 이야기해 보세요."
당신이 지금까지 자라며 장모님이 쌓은 모래성을 한 움큼씩 계속 가져와 이렇게 성장한 것이니, 장모님께 새로운 인생 방향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논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것이 남편분 이야기의 요지였습니다.
'엄마의 모래성'을 읽을 무렵, 저는 이제 막 돌이 지나려는 아이를 키우고 있었고,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아주 어렴풋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글을 손에서 놓고 나서도 '엄마의 모래성'이라는 단어가 잊히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쌓아놓은 모래더미를 내 것처럼 가져오며 자라난 사실을 새삼스레 뒤돌아 보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앞으로 엄마로서 아이에게 내 모래를 어떻게 내어 주어야 할 것인지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삼 남매에게 자신의 모래를 한 움큼씩 내주어야 했습니다. 그랬기에 어머니 모래성은 더 이상 높아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원래의 크기보다 더 작아졌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매일 한 움큼씩 가져간 모래를 채우기 위해 모두 잠든 밤에 다시 모래성을 쌓으려 했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아이들이 가져간 모래로 어머니의 모래성은 점점 작아졌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긴 세월 동안 어머니는 우리가 가져간 모래 한 움큼들에 대해 그 어떠한 불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쁘게 생각하셨고,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나: 어머니, 우리 키운다고 하고 싶은 일을 못한 날들이 많았을 텐데 힘들지 않았어요?
어머니: 왜~ 엄마도 처음에는 힘들었지, 그래도 어느 순간 알았지. 아이들에게 엄마가 필요할 때 그 사랑을 내어 줄 수 있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그 시간 속에서 나를 잃어 가는 줄 알았지만 결국 우리는 함께 자라나고 있었어.
아이들도 자라고, 나도 자라나 모두가 함께 반짝이는 그런 때가 오더라고.
대신 어머니는 어느 날부터 자신만의 속도와 방법으로 모래성을 쌓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머니가 발견한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만의 삶의 방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이가 클수록 저 역시 저의 속도와 방법으로 모래성을 쌓는 방법을 찾고 싶었고,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이를 돌보듯 제 안에 살고 있는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엄마의 마음이 평화롭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아이에게도 깊은 사랑을 줄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 안에서 무너진 내면을 단단히 다지고, 마음속을 말끔하게 청소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그런 시간들은 손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시간이란 육아라는 거친 파도 속에 쉽게 묻혀 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났습니다.
1. 스스로가 가진 리듬을 바라보고 시간을 분류화하다
우선 제 몸에 잘 맞는 일상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에 제 리듬을 파악해야 했습니다. 체력을 고려하지 않고 의욕만 앞서 무리를 하게 되면 단기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나, 장기적으로는 결국 탈이 발생하는 것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저에게는 충분한 수면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하루에 8시간에서 9시간 정도의 수면을 했을 때 가장 좋은 컨디션으로 주어진 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에게 맞는 수면시간을 확보한 후 나머지 시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을 세 개로 분류화한 후, 그 안에 지키고 싶은 루틴을 만들었습니다.
1. 새벽루틴, 2. 오전루틴, 3. 오후루틴, 4. 하원 후 루틴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하고 그 시간대 별로 엄마의 역할을 하는 시간과 제가 쓸 수 있는 시간을 종이 위에 시각화했습니다.
<마음이 단단해지는 살림(강효진 지음, 기타 북스)> 저자 보통엄마 jin은 '단순하고 균형 있는 삶 만들기'에서 자신의 시간을 그려 볼 것을 권합니다.
간단한 시각화를 통해 내 시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목적 없이 분주한 것만 같은 하루에 질서가 생긴 느낌을 받았다. 애쓰는 만큼 채워지는 시간도 분명히 보이고 위로가 되는 느낌. 균형이 무너지더라도 다시 돌아갈 제자리가 있는 느낌. 별것 아닌 종이 한 장으로 나의 하루는 더 정리되고 단순해졌다
<마음이 단단해지는 살림, p92, 강효진(보통 엄마 jin) 지음, 기타 북스>.
저자가 권하는 것처럼 종이 한 장을 준비하고 조각난 시간들을 분류해서 그려보면 생각보다 정신없는 하루가 조금씩 정돈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조각난 것 같은 시간 안에 질서가 보이고, 그 시간 안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기분은 제게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어떤 시간에는 나만을 위한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시간에는 아이에게 집중해야 하고, 어떤 시간에는 집안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복잡했던 하루가 손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1. 새벽 4시 30분- 6시 30분 -> 나를 위한 시간 (집중력& 컨디션 좋은 시간)
- 다이어리, 가계부 쓰기
- 글쓰기 1시간
2. 오전 10시 - 13시 -> 일에 집중하는 시간(집중력& 컨디션 좋은 시간)
- 업무처리
3. 오후 15시 - 20시 30분 -> 가족을 위한 시간
- 도도 하원
- 도도에게 집중하는 시간
- 저녁준비
2. 새벽 4시 30분 하루 문을 열다
아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 조각난 시간을 사용하려 했지만, 당시에는 제가 가지고 있는 신체 리듬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아이가 잠들고 난 저녁 9시쯤부터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약 2시간에서 3시간 정도 저만의 시간을 가지려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아이가 잠들면 조용히 일어나 식탁 의자에 앉아 글도 쓰고, 급한 일들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문제는 아침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고 놀다 보니 몸은 이미 지쳐있었습니다. 욕심에 앞서 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밤잠을 참으며 꾸역꾸역 일을 하고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고, 매사에 의욕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몸에서는 소화가 되지 않거나, 감기에 걸리는 등 이제 쉬고 싶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왔습니다.
늦은 밤이 되면 이미 뇌도 지쳐 있었기에 글을 쓰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조금 쓰다가 핸드폰 안에 있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스트레스를 풀다 결국은 늦게 잠드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아이가 잠든 후 만들고자 했던 루틴들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너무나 쉽게 무너져 갔습니다. 무엇보다 엄마로서 너무 욕심을 낸 것은 아닌가 하는 좌절감과 무력감이 스스로를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너무나도 필요로 했습니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던 중, 새벽기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이와 저녁 8시 30분에 잠들어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는 습관을 이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습관으로 만드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약 한 달 정도 지나자 모두가 잠든 조용한 새벽에 일어 나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새벽에 홀로 일어나 오늘의 기분에 대해 스스로 점검할 수 있었고, 오늘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와 대화하며 하루를 계획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은 저에게 큰 여유와 기쁨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새벽 기상이 습관이 되자, 새벽에 일어나 어떤 일을 할지 고민이 들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일을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독서를 할지, 영어공부를 할 것인지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토지 1장을 30분 읽고 블로그에 기록하는 루틴을 계획하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처음과 달리 계획은 계속 변경되었고, 점점 저에게 맞는 루틴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새벽에 일어나 30분 독서와 1시간 글쓰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3. 엄마의 시간은 무너지기 쉽다. 하지만 무너져도 괜찮아.
육아를 하며 저를 불안하게 한 것은 '예측할 수 없음'이었습니다. 저는 본래 계획된 삶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름대로 세운 계획 테두리 안에서 큰 혼란 없이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만나고 엄마가 되면서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그동안 계획한 대로 살았고, 제 행동에 따라 결과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저에게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삶은 본래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매일 같이 일깨워 주었습니다.
일요일 저녁이면 다가올 한 주를 계획하였습니다. 한 주에 처리해야 할 일들과 그 계획을 실행하려는 굳은 의지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노력과 결과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보장되어 있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갑작스러운 열이 찾아오고 돌발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밤새 아이를 간호하는 날에는 새벽기상이 어려웠습니다. 공들여 세운 계획들은 한 번에 흩어졌고, 저는 당황과 실망 사이에서 허둥대기 일쑤였습니다. 아이가 자라나면서 그런 순간들이 점점 줄어드는 듯 보였지만, 육아는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불확실성은 그렇게 제 마음을 흔들어놓고 떠났습니다.
계획했던 하루가 무너질 때마다 좌절이라는 감정이 또다시 거세게 밀려왔습니다.
'이렇게 무너질 루틴이면 아예 계획을 세우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계획과 변수 사이에서 방황하던 저는 예측할 수 없는 날들이 반복되더라도, 우선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보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무너진 마음을 다독이고 다시 일어나는 것,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쉽지 않았지만 다시 일어서서 루틴을 하나하나 회복해 보니, 무너졌던 일상이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로서의 삶은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이 잘 맞지 않아 퇴소하게 되었고, 새로운 기관을 찾는 일주일 동안 가정보육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왔던 루틴과 업무가 모두 멈췄습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행복했지만, 저를 단단하게 지탱하던 루틴이 사라지자 마음까지 함께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변화에 실망하고 육아도, 제 삶도 바람처럼 흔들렸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 마음에 조용히 말을 건넸습니다.
"실망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보통의 날들이 올 거야.
다시 시작하면 돼."
기록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매년 1월이 되면 올해의 계획을 세우지만 5월에서 6월에 접어들면서 연초 계획들이 흐지부지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1월에 세웠던 일들을 끝까지 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던 중 유튜브 무빙워터님이 제작한 대형 <연간플래너 이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식회사 이상하다에서 만든 연간플래너 이상은 대형 포스터로 벽에 붙여 놓고 루틴을 실행할 때마다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는 형식입니다. 1년 모두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까지 수행한 결과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몇 달 전 루틴에 대한 기록은 돌발상황으로 루틴이 무너졌을 때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된다'라고 말해 주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엄마이자 직업인으로서 저만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을 걷고 있는 중입니다. 힘든 순간도 있고, 행복한 순간도 부족한 순간들도 있습니다. 그 길 위에 모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순간들은 저에게 이야기합니다. 삶 속에 있는 사소해 보이는 그 어떤 것에도 의미가 있다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조각난 줄 알았던 엄마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단단한 마음을 쌓아가며,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찾아 나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메인화면: pinterst
<조각난 엄마의 시간을 잘 관리해 보고 싶다면...>
- 마음이 단단해지는 살림, 강효진(보통엄마 jin) 지음, 비타북스
- 일과 삶에서 성장하는 나를 위한 기록습관, 제갈명(단단)지음, 더퀘스트
- 남다른 방구석, 엄마의 새벽 4시, 지에스더지음, 책장속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