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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비극 4

4.


미연과 통화를 끝낸 유진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 찾아오면 본능적으로 우리의 정신은 끝없이 생각을 거듭하고 또 거듭한다. 그런 상황을 미리 알아채지 못했다는 자책감, 무력한 자신에 대한 원망들이 뒤엉켜 날카로운 칼이 된다. 그 칼로 이미 쓰러진 자신을 찌르고 또 찌르기 시작한다. 눈앞에 펼쳐진 어떤 사건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자책이라는 칼날이 우리의 삶을 빛보다 빠르게 시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구덩이 속에서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줄을 타고 올라가 코끼리와 싸울 수밖에 없는데 마음속에 새겨진 깊은 상처는 다시 어두운 땅속으로 우리를 끌어내리고 또 끌어내려 버린다.


유진 역시 그러했다. 미연과 통화를 마치자 허탈감이 몰려왔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유진의 머릿속에는 지난 10개월의 시간 들에 대한 되새김으로 가득 찼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또 돌았다. 아이가 배 안에 있었을 때, 10개월 동안의 순간들이. 생각을 돌려보려 했지만, 유진은 다시 병원에서의 생활을 떠올렸고, 떠올리고 있었다.


유진은 매일 괜찮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난 10개월은 유진에게 견디기 힘든 날들이었다. 유진은 견디고 견뎌 내고 있었을 뿐. 사실 유진이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견딘 끝에 10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무작정 견디면 괜찮은 날들이 오리라 믿었다. 아이를 출산하고 유진은 이제 됐다며 안도했다. 출산 후 나타난 새로운 고통이라는 문은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지였다.


유진은 임신 중에도 매일 출근 시간보다 30분 출근해야 했다. 그건 J 병원 간호사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 단단한 약속 같은 것이었다. 누가 정해 놓은 규칙은 아닌지만 이유 없이 함부로 넘어설 수 없는 선과 같은 것. 대가 없는 30분. 누구라도 붙잡고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고 싶었지만, 이 병원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침묵하는 것이 유진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날도 평상시와 같이 30분 일찍 출근한 유진은 오전 조 선생님들에게 인수인계를 받고 업무를 시작했다. 아직 임신 5개월 차였지만 유진의 배는 유난히 더 풍선처럼 커지는 것 같았다. 큰 배를 안고 다녀야 하는 유진의 걸음걸이는 점점 뒤뚱뒤뚱하게 변해갔다. 유진의 입덧은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심해지고 있었다. 우선은 병원에서 급히 처방받은 입덧약으로 어찌어찌 속을 진정시키며 버티고는 있었다.


인수인계를 받는 도중 오른쪽 복도 쪽 병동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괴성이 들려왔다. 또 뭔가가 터진 것 같았다. 병원에서 일어날 법한 그런 일들. 인수인계를 마치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유진 선생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어휴, 또 무슨 일이지? 유진 선생님, 특별한 건 없고요. 어서 가보세요.”


유진은 자기 몸만큼 부풀어 있는 배를 안고 뒤뚱뒤뚱 자신을 부르는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병실에서 울리는 간호사 선생님 외침 소리가 다급했기에 유진은 더 빠르게 뛰어가고 싶었다. 커져 버린 배와 퉁퉁 불어 여기저기 빨갛게 되어버린 몸은 유진의 생각과 다르게 말을 듣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는 병실을 본 유진은 김 씨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김 씨 할머니는 치매 초기로 J 의료원 일반병동에 입원한 환자다. 이미 여든을 넘긴 김 씨 할머니의 치매는 입원 후 급속도로 악화하고 있었다. 입원 당시만 해도 대소변까지는 가능했지만, 입원 후 3개월 정도 지나자 대소변이 어려워졌다. 거기에 더해 하루 네 번 가루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약을 먹은 후 자주 구토를 하곤 했다. 치매가 중증으로 악화하면서 식욕이 왕성해진 김 씨 할머니는 그럼에도 눈을 뜨면 끊임없이 음식을 먹으려 했다. 배 안으로 들어간 많은 음식들을 다시 병실 침대와 바닥에 거침없이 토하는 날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김 씨 할머니를 중환자실로 옮겨져야 했지만, J 의료원 재정 악화와 인력 감축으로 김 씨 할머니는 일반병동을 지키고 있었다.


그 무엇도 스스로 하지 못하는 중환자에 해당하는 환자가 일반병동에 누워있다 보니 간호사들의 업무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김 씨 할머니와 같은 노인 환자가 약을 소화하지 못해 병실 침대와 바닥에 토를 사방에 흩뿌려 놓는 일은 일상이었다.


움직이지 못해 환자에게 생긴 욕창 위에 있는 고름을 드레싱 하는 것도 간호사들의 몫이었다. 노인 환자들은 병실에서 대소변을 해결하였고 대소변 기저귀의 양은 엄청났다. 매일 나오는 대소변 기저귀를 커다란 상자에 모아 처리했는데, 기저귀 쓰레기를 상자에 담고 옮기는 그것조차도 간호사들의 몫이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일로 간호사의 일손은 부족했다. 아이를 뱄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일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진 역시 간호사였기에.


유진 선생님은 간호사 선생님의 다급한 외침에 5번 방으로 뛰어갔다. 5번 방 가장 끝에 놓여있는 김 할머니 침대 주변이 이미 토사물로 얼룩져 있었다. 유진과 다른 간호사들은 바닥과 침대에 얼룩져 있는 토사물들을 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한참을 닦아도 여기저기 튀어 있는 토사물들은 사라질 줄 몰랐다. 토사물이 풍기는 냄새가 유진 선생님의 코로 흘러 들어가기를 10분 정도 지났다. 구역질이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배에 통증이 밀려 들어왔다.


“선생님, 잠시만요.”


유진은 5번 방을 빠져나와 화장실로 달려가며 생각했다.


‘지금 이 고통이 나의 나약함 때문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니었다. 도무지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일터가 결국 유진을 숨 막히게 짓누르고 있었다. 배 속에서 아기가 보내는 절규는 J 의료원이 유진을 향해 쏜 새까만 총알이 새겨 놓은 상처의 신호였다. 유진은 생각했다. 총알에 맞으면 몸 앞쪽에는 아주 작은 상처를 내지만 그 총알이 돌고 돌아 결국 몸은 산산이 조각나게 된다는 사실을.


뒤뚱거리며 간신히 화장실에 도착한 유진의 몸속에서 다시 헛구역질이 쏟아져 나왔다. 유진은 급하게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변기에 얼굴을 대고 끝없이 나오는 헛구역질을 받아 내었다. 헛구역질하다가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사이 눈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메인화면: pinterest


* 안녕하세요 :)

지루하지 않게 쓰려고 하는데 처음 쓰다보니 쉽지 않네요! 특정 판례의 내용을 큰 틀로 하고 있지만 등장인물과 사실관계는 사실과 전혀 전혀 전혀 ~ 무관한 내용입니다. 상상의 산물입니다.

날이 추워졌네요. 모쪼록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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