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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비극 5

5.


유진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들어선 건물은 꽤 높았다. 리모델링을 통해 본래의 낡은 모습을 감추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지만, 굵은 기둥이나 출입문의 녹슨 경첩에서 세월의 흔적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건물 정면 우측 상단에는 ‘K방송국’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밤이면 네온사인이 켜질 그 글자 덕분에, 유진은 빌딩 숲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방송국으로 향하는 철문 앞, 경비실에서 방문 목적을 물어왔다. 김 기자님의 이름과 용건을 밝히고 나서야 굳게 닫힌 철문이 열렸고, 유진은 시멘트로 된 좁은 통로를 지나 건물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내부는 검은 외관과 달리 놀랍도록 밝고 쾌적했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특수 유리였지만, 안에서는 쏟아지는 햇살과 바깥 풍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다만 최근에 페인트칠을 새로 했는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진득한 페인트 냄새가 코끝을 찔러 유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유진이 언론사라는 곳에 발을 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비는 딱 봐도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메고 지지대를 든 채 뛰쳐나가는 사람, 노트북을 든 채 급하게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 그들의 옷차림은 대부분 무채색이나 검은색 계열이었다. 그 틈에서 인터뷰를 위해 차려입은 유진의 크림색 코트는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분주한 공기 속에서 유진은 덜컥 겁이 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낯선 이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움츠러들게 했다. 쉴 새 없이 실어 나르는 거대한 뉴스들 틈에서, 자신의 사연은 한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괜히 인터뷰에 응한 건 아닐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엘리베이터 숫자가 5층을 향해 바뀌는 동안, 유진은 김 기자의 목소리를 되새김질했다.

“선생님, 그냥 선생님이 겪었던 이야기를 편하게 해 주시면 됩니다.”


말은 쉽지만, 9년의 세월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이라는 거대한 벽과 싸워온 그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도착 문자를 보내자, 사회부실의 자동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급하게 걸어 나왔다. 푸른색 셔츠에 검은 뿔테 안경. 며칠은 못 잔 듯 퀭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유진을 발견하는 순간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 같은 활기였다.


“선생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건이 터져서요. 회사가 좀 소란스럽죠? 얼른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김 기자가 안내한 곳은 복도 가장 끝, 결이 선명한 오크나무 문 앞이었다. 밝은 갈색의 단단한 나무 문은 소란스러운 편집국과 인터뷰 장소를 완벽하게 분리하고 있었다. 문이 닫히자 거짓말처럼 고요가 찾아왔다. 회의실 안에는 카메라 렌즈가 거대한 눈처럼 유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나무 문이 닫혔음에도, 유진의 어깨는 딱딱하게 굳어갔다. 프로인 김 기자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물 한 잔 드시겠어요? 아니면 따뜻한 커피?”


김 기자가 직접 커피 머신을 작동시켰다. 쪼르륵, 커피 내리는 소리와 향긋한 냄새가 차가운 공기를 채웠다.

“승소,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선생님 판결 덕분에 고용노동부랑 공단이 법 개정하느라 아주 분주하다고 하더군요. 정말 큰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유진은 건네받은 커피잔을 꽉 쥐었다. 머그잔의 온기가 얼음장 같던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떨림이 잦아들 무렵, 막내 기자가 다가와 옷깃에 핀 마이크를 고정했다.


“준비되셨나요? 호칭은 ‘유진 선생님’으로 통일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 기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행자’의 얼굴로 바뀌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준 대법원 판결의 당사자를 모셨습니다. 많은 분이 기억하실 겁니다. 이른바 ‘J 의료원 사건’. 엄마의 업무 환경이 태아의 건강에 미친 영향을 산재로 인정받기까지, 무려 9년이 걸렸습니다. 1심과 2심의 엇갈린 판결을 넘어, 마침내 대법원의 인정을 받아낸 유진 선생님과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선생님,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기자는 부드럽게 유진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제가 알기로는 당시 산업재해보상법에는 태아를 보호하는 규정이 없었습니다. 사실상 소송을 제기해도 패소가 100% 예상되는 상황이었을 텐데요.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실 수 있었나요?”



*메인화면: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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