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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비극 3

3.


금요일 오후 4시.


직원들이 하나둘 서울행 기차를 타기 위해 퇴근을 서두른다. 분주한 소리를 담은 4시를 넘어 5시가 되면 사무실 안에는 앉아있는 자리보다 빈자리가 더 많아진다. 유난한 고요함이 흐르고 있다. 그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따로릉르르릉”


‘아... 또.......’


전화기 화면에 뜬 앞 번호를 보자마자 얼굴 위에 있는 눈썹이 본능적으로 힐끗 올라갔다. 퇴근을 30분 앞두고 있었기에 눈썹의 기울기는 더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지역번호를 보니 K노동부 S보상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또 그 이야기 때문에 전화를 걸었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금요일 오후 퇴근하기 30분 전 전화라니.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쉽게 말하면 S보상국에서 금요일 퇴근 30분 전에 전화가 걸려 왔다는 것은 또 무슨 일이 터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30분 만에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하거나 큰일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전화는 언제나 퇴근 30분 전에 걸려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의 소속은 근로복지공단이었지만 그들의 자문과 요청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이곳은 K노동부 산하 기관이었다.

산업재해와 미세하게 관련이 있는 문제가 발생하면 변호사들이 모여있는 이곳으로 전화가 거침없이 걸려 온다. 경력 많은 선배 변호사는 말했다. 그런 전화를 받게 된다면 이렇게 대처하라고. 불필요한 책임을 떠안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그것이 살길이라고. 결국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책임의 문제임을 강조하고 강조했다.

작은 눈을 길게 하며 말했던 선배를 생각하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우렁찬 벨소리가 고요한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사무실에 남은 직원들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조용히 '에효' 한숨을 쉬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래도 가능한 친절하게.

“네, 근로복지공단 법무자문부 김포비 변호사입니다.”

“어이코, 변호사님. 많이 바쁘시지요. 저 박사무관입니다. 지난번에 우리 통화했지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대법원 판결 난 사건 읽어 보셨을 텐데.... 여기는 그것 때문에 난리가 아닙니다. 장관님께서 어서 해결하라고 노발대발하시고 급합니다. 급해요. 업무상 이유로 건강 손상 자녀 보상건 관련해서 정부안을 우선 만들어야 하네요. 뭐... 저희가 직접 입법할 것은 아니고... 우리 같이 만들어야 하는 거 아시지요? 하하하하.”


박사무관은 애써 크게 웃어 보였다. 그가 말한 ‘우리’라는 단어의 의미를 가만히 생각하는 사이 그는 빠르게 치고 들어오며 전화를 건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래서 그런데...... 변호사님이 건강 손상 자녀 법 개정 논의 할 때 서울 쪽으로 몇 번(한 번도 아니고 몇 번?) 왔다가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우리 배테랑 이 팀장님도 함께 오시면 좋겠는데요. 우리 김포비 변호사님이 팀장님께 제 말 좀 잘~~ 전해주세요.”

박사무관의 입에서는 얼마 전 이슈가 된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업무협조를 해달라는 이야기가 술술술 흘러나왔다.


2020년 4월 대법원은 임신한 여성 근로자가 업무로 인해 태아의 건강이 손상된 것을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5조에서 정한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에 포함시키는 판결을 내놓았다. 하지만 현행 법에는 모체 안에서 업무로 인해 건강이 손상되어 출산된 자녀에 대한 보상 규정이 없었고, 이번 대법원 판결로 K노동부에서는 새로운 법개정을 해야 했다. 이와 관련해 S보상국에서는 부랴부랴 건강손상 자녀에 대한 정부안을 마련하기 위해 좋게 순화해 이야기하면 이곳으로 업무 협조를 요청하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팀장님, 방금 전 S보상국에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요. 다음 주 금요일 서울에서 건강 손상 자녀에 법개정 논의가 있다고 꼭 좀 참석해 달라고 하십니다. 팀장님도 꼭 좀 참석해 달라고 사무관님이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김포비 변호사!!!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때 일정이 있어서 못 가요. 김포비 변호사 혼자 다녀오세요.”

이팀장은 다른 일정을 이유로 박사무관의 요청에 선을 그었다. 혼자 서울에 가서 업무협조를 하라는 이야기에 갑자기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다.


“팀장님, 저..... 법개정 자문은 처음인데 잘 모르는 부분은 어떻게 하나요?”

“음... 그럼 모른다고 해. 괜히 이상하게 대답했다가 꼬투리 잡히니까. 나중에 찾아보고 알려준다고 이야기하면 돼. 가기 전에 판결문들 잘 보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기억하기로는 꽤 무덥고, 비가 많이 왔었던 2020년 여름이었다. 이유야 많겠지만 결과적으로 모두가 기피하던 건강 손상 자녀 법 개정 자문에 얼떨결에 참여하게 되었다. 막내 변호사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2014년도 1심 판결문과 2021년 대법원 판결문까지 그 안에는 당시 건강 손상 자녀를 출산했던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건강손상 자녀를 출산한 엄마들이 9년간 걸어온 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이 사건은 2010년도에 한 병원에서 발생하였다. 병원의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인해 그 해 임신 중인 간호사 중 다수가 유산하고 몇 명은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사실 근로자가 업무상 재해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손해를 입은 경우 국가는 법에 따라 그 손해를 보전해 주면 된다. 그와 관련한 보상에 대해 구체적 사항을 규정해 놓은 법이 산업재해보상법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것이었다. 산업재해보상법 규정에는 근로자만 보호 대상으로 규정되어 있었고, 태아는 보호대상이 아니었다. 간호사로 일했던 세명의 엄마들은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하였고, 근로복지공단에 자녀의 병원비 등을 포함한 요양급여를 청구했지만 이런 이유로 위 청구는 거부되었다. 그녀들의 자녀들에게 요양급여를 지급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이 사건은 소송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소송 기간은 약 9년 넘게 소요되었다.


1심 법원은 원고인 엄마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2심은 근로복지공단의 손을 들어주며 판결이 뒤집히게 되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위 청구와 관련하여 법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더라고 여성 근로자가 업무상 이유로 건강이 손상된 자녀를 출산했다면 이에 대한 요양급여를 지급해야 한다고 원고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판결은 우리 사회에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법원이 그들에게 10년 만에 내주었던 물음에 대한 답이 적혀있는 판결문을 덮자, 그녀들이 일했던 병원에서 풍기는 매캐한 약 내음이 코를 감싸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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