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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는 비극 1


미연은 이번이 두 번째 임신이었고, 유진은 첫 임신이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그렇게 태평할 수 있어요?”


유진이 던진 물음에 미연이 빙긋 웃으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에이, 선생님. 둘째잖아요. 다들 그렇게 버티는데요. 그냥 생각이라도 별거 없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지 뭘.”


아무리 두 번째 임신이라도 그렇지. 저리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 막달에 이른 미연의 배가 유난히 커 보였다. 두 번째 임신은 첫 임신 때보다 훨씬 빠르게 배가 불러왔다. 그래서 첫째 때보다 훨씬 더 힘들다고들 했다. 하지만 미연이 임신 10개월 동안 병원에서 한 일들은 임신 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른 점을 찾자면 야간 조에서는 빠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임신으로 다른 동료들에게 피해 주지 않기 위해 열심히 눈치를 보게 된다는 것 정도였다.


미연은 올해 2월 배 안에 둥둥이가 찾아왔지만 오전 근무와 저녁 근무를 빠지지 않고 했다. 아니, 할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병원 사정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6월부터 다른 병원 간호사들이 담당하는 3배의 환자를 담당했다. 유진은 이러다가 미연이 병원에서 출산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유진은 미연에게 언제 출산 휴가를 들어갈 것인지 물었다.


“선생님, 서울에서 일하다가 왔다면서. 뭐 그런 걸 물어봐. 여기도 똑같아. 양수 터지면 가야지.”


미연은 당연한 것을 묻냐며 싱거운 표정을 지었다.


“아! 유진 선생님, 이번에 수간호사 선생님께 많이 혼났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어쩌려고. 2년 전에 순번 아닌데 임신했던 선생님이 있었는데…. 따돌림당하고 수간호사 선생님 성화에 결국은 병원 가서 알아서…. 했어. 내 말 어떤 의미인지 선생님도 알지? 그렇게까지 하면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싶기도 할 때도 있어….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 먹고살아야 하는데.”


미연은 오전 근무를 마친 오전 팀 간호사들이 유진을 두고 날카롭게 수군거렸던 것을 생각했다.


“그래, 선생님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근데 그렇지. 새 생명이 기계처럼 정확히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이가 수많은 확률을 뚫고 온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일인데. 쉽지 않다. 예전에 책에서 읽었는데 다람쥐가 도토리를 나무 위에서 떨어뜨렸는데 그 도토리가 나무 구멍에 쏙 들어가는 때가 있대. 그때 아기가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그만큼 기적 같은 일이지.”


유진은 미연에게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그런 세상이니까. 병원에서 일하는 우리만 딱하지. 요즘에도 임신 순번제라고 부르나? 선생님도 알지? 우리 병원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곳도 그렇다는 거. 여기다 다 여자뿐이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지. 선생님도 분위기 잘 알겠지만 올해 순번도 아닌데 갑자기 임신을 해버렸잖아. 그래서 요즘 선생님들 사이에 말이 많아.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그래도 난 축하해. 늦었지만. 앗, 벌써 4시가 넘어가네. 선생님, 우리 어르신 드릴 저녁 약 빻아야겠다.”


미연 선생님이 시계를 보더니 유진 선생님에게 말했다. 미연과 유진은 저녁에 환자들에게 돌릴 알약을 약절구에 쿵쿵 빻기 시작했다. 약제실 선반에는 자동으로 빻아주는 약 믹서기가 있었지만 소음이 너무 커서 그 누구도 사용하지 못했다.


“아,, 이번에도 또 찢어졌네. 약 빻는 일 좀 대신해 줄 수 있는 기계 없을까.... 다른 건 괜찮은데 찢어졌을 때 나는 연기가 너무 지독해.”


비닐에 싸인 약을 절구에 넣고 빻다 보면 비닐과 절구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면서 비닐이 찢어져 버리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환자들에게 동그란 알약을 그대로 드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유진이 근무하는 병동에는 유난히 노인 환자가 많은 곳이었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은 동그란 알약을 그대로 먹고 나면 복용하는 약이 많은 데다 소화도 쉽지 않았다. 결국 병동에 있는 대부분의 환자의 약을 간호사들이 하나하나 절구에 빻아야 했다.


유진이 둥근 알약들을 손바닥 크기의 둥근 절구에 넣었다. 미연도 색색의 알약을 절구에 넣고 빻기 시작했다. 크기와 색이 다른 알약들이 돌로 만들어진 방망이에서 여지없이 부서졌다. 찢어진 비닐 사이로 뽀얀 연기가 빠져나왔다. 뽀얀 연기에는 서로 다른 약들이 풍기는 냄새가 뒤섞여 토 냄새가 나기도 했고, 고약한 딸기향을 풍길 때도 있었다. 희뿌연 가루약 연기가 미연의 얼굴 주위를 잠시 감쌌다가 사라졌다.


“웩…. 웩….”


미연이 갑자기 구역질을 시작했다.


어휴…. 또 시작이네. 유진 선생님, 미안한데 이것 좀 부탁할게.”


미연 선생님은 오늘도 약 냄새를 맡자 구토가 올라오는지 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갔다. 아마도 미연은 화장실로 갔을 것이다. 유진은 미연이 탁자에 남기고 간 휴지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일하는 내내 구역질로 고생했던 미연은 언제나 주머니에 이렇게 휴지를 뭉친 덩어리를 습관처럼 들고 다녔다. 임신한 지 10개월 동안. 병원에서 미연 선생님을 지켜 주는 것이 마치 화장실에서 급하게 뜯어낸 휴지 덩어리뿐이라는 생각에 유진은 괜히 서글퍼졌다.





<출처:pinterst>


유진은 황급히 약제실에 딸려 있는 작은 창문을 열었다. 창밖으로 짙은 안개가 한라산을 감싸고 있었다. 곧이어 제주에서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바람 냄새가 약제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듯 날카로움을 숨기고 있는 제주의 바람.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에서 풍겨오는 짭짤함과 한라산 곳곳에서 수십 년 동안 살아가고 있는 이끼의 습한 냄새가 묘하게 유진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유진은 손끝에 스친 바람의 냄새가 이곳에 오래 남아 있기를 바랐다.



며칠 전, 유진이 임신 소식을 알리던 날의 장면이 머릿속에 스쳤다.


유진은 알약을 빻으며 올해 임신 순번인 선생님들을 떠올렸다. 일 년에 오직 열다섯 명. 그제 유진이 고민 끝에 임신 소식을 알리자 수간호사 선생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화를 냈다. 6월부터 악화된 병원 사정으로 우리는 우리가 하루에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를 넘어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 발만 내딛으면 떨어지는 낭떠러지에 서 있는 자에게 누군가의 일을 떠맡게 되는 것은 일하다가 죽어버리라는 말과 같았다. 양보? 이해? 포용? 그런 것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분량의 일을 하고 있을 때에 존재할 수 있는 가치였다.


“유진 선생. 임신이라고?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 선생님 입사한 첫날 말했어. 매년 병동마다 5퍼센트 가능하다고 분명히 첫날 말했어. 이렇게 예고도 없이 임신했다고 통보하면 어쩌자는 거야? 사수 선생님이 미리 언질 줬어 안 줬어? 벌써 올해 임신할 선생님들 약속이 되어 있는데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나는 모르겠어. 선생님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


유진은 수간호사 선생님의 호통에 또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아이를 갖고 엄마가 되는 일이 모든 곳에서 축복받는 것은 아니었다.

“죄…. 죄송합니다..”


유진은 눈 안에 눈물이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가득 찬 눈물이 쏟아져 않도록 고개를 위로 들었다. 유진의 두근거림이 배 아래로 번져 내려갔다. 유진은 수간호사 선생님이 사라지자 눈물이 고인 눈을 감았다. 차가운 두려움 속에서도 손끝에 닿은 둥근 감촉이 유진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섬사람들에게 J의료원이라 불리는 이곳의 하루가 어제와 같이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몰랐다. 이 평범한 병동 안에서 의문의 사건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메인화면: pinterest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에 글 남깁니다.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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