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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도 하는 변호사 Jan 11. 2024

금옥씨의 모래성

"아줌마, 이리 좀 와봐. 우리 집 시험지 안 본다고 몇 번을 말해. 왜 자꾸 놓고 가는 거야?"


아침 10시 골목에 울려 퍼지는 여자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카랑카랑하다. 여자는 지난달 일일 시험지를 그만 보겠다고 담당자에게 말을 했었지만 담당자는 일을 그만두면서 금옥씨에게 그 사실 인수인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자는 분명히 일일 시험지를 안 보겠다고 통보했는데 일일 시험지가 매일 집으로 배달되자 화가 난 듯했다. 그렇다면 금옥씨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만 일일 시험지를 넣으라고 하면 될 텐데. 여자는 금옥씨가 큰일이라도 저지른 듯, 그리고 저기 아랫사람을 대하듯 금옥씨에게 반말로 화를 내고 또 내고 있다. 마치 아침에 누군가에게  난 화를 만만한 금옥씨에게 풀어내듯이. 금옥씨는 대략 10분 정도 얼굴이 못생기게 일그러지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유난히 큰 여자 말을 그냥 들으며 서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금옥씨 머리는 이미 하얗게 변해 버렸다. 결국 생각해 낸 말은 이 말 밖에 없다.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실수했나 봐요. 죄송합니다."


금옥씨는 여자에게 다른 항변은 하지도 못한 채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여자는 아침에 쌓였던 화를,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울분을 금옥씨에게 다 토해냈는지

 "아줌마, 제대로  해. 일을 왜 그렇게 하냐."

라고 소리 지르듯 말하고 문을 쾅 닫으며 들어가 버렸다. 무섭고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신기한 여자가 사라지자 금옥씨 눈에서는 눈물이 맺혔다. 그 눈물은 무작정 자신에게 화풀이하는 여자에게 죄송하다는 말 밖에 생각해 낼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의 눈물이었는지, 자괴감이었는지, 서러움이었는지 금옥씨도 잘 알지 못했다. 금옥씨는 아직 배달할 시험지를 어서 돌려야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에 집으로 갈 수 있었기에  시험지와 책 가득 실 자전거에 훌쩍 올라탔다.



"어미야, 나다."

주말 저녁 시골에 계신 어머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님은 금옥씨가 일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해 들으셨나 보다. 금옥씨는 어머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시길래 전화까지 하셨나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 애미야, 일 시작했다면서?"

"네, 어머님. 일일 시험지 선생님 일이에요.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고, 아이들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집에도 올 수 있고요. 괜찮아요."

"근데, 애미야. 꼭 해야겠니? 지금까지 집에서 밥하고 애들 잘 키웠잖니. 뭐 하러 밖에 나가서 일을 하려고 해. 괜히 나가봤자 돈도 못 벌고, 애미 고생만 하지. 그리고 애미 너만 고생하니? 애비 얼굴 보기도 창피하고, 무엇보다 애들은 어쩌려고 하니? 애들 학교 다녀와서 엄마가 있어야 든든하지. 그렇지 않니? 거기다 애미 너 나이도 있잖니. 이제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무슨 일을 시작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그냥 애비가 벌어다 주는 돈 아껴서 애들 잘 키우고 살면 그게 최고야."


금옥씨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님 이야기를 들으며 어머님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어머님, 그럼 저는 평생 엄마로만 살아야 하나요? 저는 어디 있나요? 그리고 인생에서 늦은 시작이란 없단 말이에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잘 해낼 거예요.'


금옥씨는 어머님 말이 이해가 가면서도 이렇게 집에만 있다가는 그냥 집에서만 한평생을 보낼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금옥씨는 입을 꾹 누르고 알겠다고 잘 생각해 보겠다고 어머님께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금옥씨 마음 한편에서도 어머님이 하신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는 건 아니였다. 정말 어머님 말처럼 밖에 나가 일을 시작하니 진상 고객부터 여러 가지로 쉽지 않은 일 투성이었다. 거기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집안일까지 하자니 몸 점점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내가 괜히 밖에 나와 고생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하지만 금옥씨는 경제적 사정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제나를 찾고 싶었다. 조금 더 지체하면 언제 시작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금옥씨는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결혼 후 파묻혀 버린 꿈이 많았던 금옥이가 보고 싶었다.


   


현정이는 오늘 기분이 좋다. 오늘은 현정이가 좋아하는 외할머니가 집에 오시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엄마 금옥씨가 일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골에서 이것저것 챙겨서 올라오신다고 했다. 엄마는 오빠를 낳고 현정이를 낳았을 즈음, 그러니까 서울로 올라오기 전 이야기다. 그때는 외할머니댁 근처에서 살았었기에 어릴 적부터 외할머니와 함께 놀기도 하고 산책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현정이는 외할머니가 현정과 종호, 소연에게 부어 주는 무한한 사랑의 느낌을 좋아했다. 외할머니 품 안에서는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외할머니에게서 나는 들풀향 냄새라고 해야 할까. 외할머니에게서 나는 시원하지만 포근한 느낌이 나는 향냄새가 났다. 현정이는 그 향기를 좋아했다.


"딩동"

"할머니다!"

현정이와 종호, 소연은 동시에 할머니가 왔음을 발견하고 우르르 뛰어 나갔다. 외할머니는 내 새끼들 하면서 삼 남매를 푸욱 안았다. 외할머니는 손주들 준다고 밤나무에서 딴 알밤이며, 단감이며 여러 가지 시골 간식거리와 손수 장만한 반찬이 담긴 바구니 두 개를 양손에 한 바구니 들고 오셨다.


"엄마, 오셨어요! 버스 타고 멀리서 오면서 뭐 이런 걸 다 싸왔어요. 무겁게."


마침 금옥씨도 집으로 들어섰다. 금옥씨는 엄마를 만난 반가움보다 시골에서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온 엄마에 대한 미안함이 앞선다. 작은 현관에 신발 5개가 들어차니 잔칫집 같았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집안에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삼 남매는 외할머니가 싸 오신 알밤을 까먹으며 신이 나 있었다. 금옥씨가 입을 열었다.

"엄마, 나 일 시작했어. 일일 시험지 선생님인데 이제 아이들도 컸고 그래서 일 좀 해보려고."

외할머니는 엄마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할머니는 항상 긴 머리를 돌돌 말은 후 비녀를 꽂고 다니셨는데 그날따라 할머니 이마가 비녀를 따라 반짝였다.

"야아, 금옥아. 잘했디. 너는 뭐든 잘했자녀. 뭐라도 하는 건 좋은거다. 어차피 죽으면 문드러지는 몸 니 하고 잡은 거 다 해. 잘했다. 내 새끼."

외할머니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듯 할머니 말 한마디에 금옥이 얼굴에는 웃음꽃이 잔잔히 퍼지기 시작했다. 금옥씨는 엄마 말 한마디로 자신의 몸에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옥씨는 일을 시작하면서 자신만의 모래성을 쌓는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금옥씨는 매일 같이 자신의 모래성을 쌓기 시작했지만 아이들은 금옥씨가 쌓아 놓은 모래성을 야금야금 가져갔다. 남편도 금옥씨가 쌓아 놓은 모래성을 조금씩 가져갔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 금옥씨의 모래성은 조금 높아졌지만 모두들 금옥씨의 모래성을 한 움큼씩 가져갔기에 금세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다들 금옥씨의  모래성을 공유재인 든 듬뿍 퍼갔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엄마 금옥씨는 매일 같이 정말 많은 여러 가지 일을 해내고 있었다. 현정은 그 사실이 신기했다. 우리 엄마는 언제 잠을 자는지 궁금했다. 금옥씨는 자신의 모래성을 매일 같이 웃으며 빼앗기면서도 다시 밝게 웃으며 자신의 꿈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현정은 그렇게 말하는 금옥씨가 다른 누구보다 슬픔이 많아, 슬픔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현정은 그런 금옥씨가 안쓰러우면서도 미움을 느껴졌다. 어린 현정은 금옥씨가 그저 엄마 금옥씨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금옥씨가 일일 시험지를 돌리기 시작하고 5개월쯤이 지났다. 어느 순간부터 금옥씨는 아이들이 잠들면 조용히 앉아 서점에서 사 온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현정은 아침에 일어나 금옥씨가 출근하면 금옥씨가 보던 책이 궁금해서 책을 요리조리 들춰 보았다. '세일즈 한 번에 끝내기', '웃는 얼굴이 성공한다.' 모두 세일즈와 관련한 책이었다.


 금옥씨는 그렇게 세일즈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책에는 손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신뢰를 얻는 법 등이 나와 있었다. 금옥씨는 이왕에 자신의 모래성을 쌓기 시작했으니 제대로 쌓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판매를 잘할 수 있는지 일일 시험지 독자를 늘릴 수 있는지 물어볼 곳 없었다. 결국 금옥씨는 책이라는 선생님에게 세일즈를 묻고 또 물었다. 그곳에 길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세일즈에 대한 공부를 거듭해 나갈수록 반말로 빽빽 소리를 지르는 진상 손님도 일일 시험지 아줌마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금옥씨에게 큰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 금옥씨에게는 그런 별나고 신기한 손님도 세일즈를 공부할 하나의 기회로 다가왔다.


시간이 점점 흐르며 금옥씨의 모래성은 두터워졌고 높아지기 시작했다. 현정이와 소연이, 종호가 금옥씨의 모래성에 있는 모래를 조금씩 가져가도, 남편 철이가 금옥씨의 모래성에 있는 모래를 조금씩 가져가도 금옥씨의 모래성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 금옥씨의 모래성이 굳어 가면서 남편과 아이들이 그 모래성을 긁어가기 어려워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포기를 모르는 금옥씨는 그렇게 개미처럼 자신의 모래성을 하루하루 쌓아갔다.


*메인 이미지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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