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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도 하는 변호사 Feb 09. 2024

금옥 씨의 새 집 1편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형사님, 지는 억울하다는 말입니다." 건설사 대표 김상수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철이에게 말했다.

"선생님, 그때 일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씀해 주셔야지 계속 모른다고만 억울하다고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미 물증도 다 확보된 상태이고 피해자 진술도 넘쳐 납니다. 계속 모른다고 말씀하신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선생님, 다시 물을게요. 있었던 사실 그대로 대답해 주세요." 사기 혐의로 구속된 피의자 김상수 조사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 긴 조사 시간과 대조적으로 김상수에게 무엇도 얻은 것이 없었던 철이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십니다. 아는 게 있으면 말하겠십니다." 오랜 조사에 대표 김상수도 지쳤는지 뭐든지 말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철이에게 말한다.


김상수는  튼튼해 건설사 대표다. 튼튼해 건설사는 1982년 기준 건설교통부 시공능력평가에서 전국 84위, 대구에서 3위에 올랐던 종합 건설사다. 김상수 대표는 1992년부터 강동에 1700세대 규모 아파트를 짓는다는 명목으로 지인들에게 보증금을 받아왔다.  아파트 건설 사업에 투자하면 분양권을 주겠다고 말하며 지인들을 끌어 모은 것이었다. 그 후 지인들로부터 받았던 보증금 7억을 돌려주지 않고 있는 혐의를 받고 있다.


"왜 선생님은 지인들에게 받은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습니까?"철이가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묻는다.

"형사님, 그게 말입니다. 형사님도 아시다시피 이웃나라 전쟁으로 물자 보급이 지연되고 있어요. 그러면서 건설 사업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사정이 회복되면 사람들에게 곧 자금을 마련해 돌려주려고 했십니다. 진짭니다. 흑흑 흑흑" 김상수는 울다시피 하는 표정으로 이야기하다가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한다.

당황한 철이가 말했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잘 되고 있거든요. 우리 잠깐 쉬었다 합시다. 선생님도 진정하시고요."

철이는 수사를 할 때 항상 염두해 두는 것이 있다. 좀도둑들과 다르게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경찰에 불려 와 수사를  받게 될 경우, 수사를 받는 것 자체로 큰 심적 부담을 받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구속이 된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런 경우 수사를 할 때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너무 다그치거나 강압적으로 수사를 하게 되면 본래 받고 있는 심리적 압박감에 모멸감, 수치심까지 더해 일시적으로 우울한 감정과 함께 자살 등 극단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배들은 철이에게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일수록,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수사할 때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서 치고 들어가야 한다고 항상 조언하고는 했다. 수사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 목숨이기에.


"선생님, 커피 한잔 하시지요." 철이가 따뜻한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김상수에게 건넨다. 종이컵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온다.

"흑흑.. 형사님, 고맙습니다." 흐느끼던 김상수는 커피 한 모금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시더니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아 보인다. 갑자기 김상수가 철이에게 한마디 한다.

"형사님, 집 있으십니까?"

"집이요? 아직 없지요. 경찰 봉급에 무슨 집입니까." 이 사기꾼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철이 눈이 동그래진다.

"그래도 형사님, 어디서 돈 빌려서라도 해보십쇼.  형사님한테 알려 드릴 테니 청약 넣어보시랑께요." 흐느끼던 모습은 어디 가고 눈을 반짝이며 김상수가 말한다.

"네?" 이 녀석이 경찰한테도 사기를 치고 있는가 싶어 철이가 흠칫 놀란다.

"제 말 들으시라니까요. 몇 년 후에 기 강 아래 허허벌판 말입니다. 곧 아파트가 쫘악 들어설 거란 말이지요. 지금은 풀떼기만 있지만요. 지가 봐도 거기가 참 좋습니다. 거기에 청약 나오면 꼭 넣으세요. 형사님 한티만 말씀드리는 거예요." 김상수가 진지한 얼굴로 철이에게 소곤대며 말한다.

"네네, 알겠습니다. 차암, 고맙습니다. 선생님, 괜찮아지셨으면 이제 조사 시작합니다." 철이는 김상수가 하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솔깃했지만 김상수의 혐의 사실이 적힌 종이를 읽으며 정신 차리라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조사를 시작한다.



깊은 밤 금옥 씨 집 앞에 익숙한 중년 남자 노랫소리가 들린다.

"가는 세~~~~~ 월, 그~~~~ 누우우가 잡을 수가 있나요오. 흘러가는 시이이이 냇 물을 자아아블 수가 있나요 오오. 딸꾹"

철이는 술을 좋아한다. 그가 사는 세상이 술을 권하는 것인지, 태생적으로 철이가 술을 좋아하는 것인지 잘 모른다. 어찌 되었던 철이는 경찰서 문 앞을 지나 집으로 갈 때면 동료들과 항상 술을 한잔씩 아니, 여러 잔씩 마셔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술 한잔하고 저녁도 먹고 나서 집에 도착하면 이미 시계는 자정을 향해 바삐 달려가고 있다.

"여보! 동네 시끄럽게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오면 어떡해요!" 이제 막 퇴근하고 돌아온 금옥 씨가 목청이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는 철이를 나무란다.

"오쿠 오쿠! 우리 예쁜 금옥 씨 아닌가! 쪼았어! 우리 금옥 씨랑 한잔! 딸꾹 욱" 철이는 금옥 씨를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또 한잔하고 자겠다고 말한다.

"애들 깨겠다. 그럼 한 잔만 더 드시고 주무세요." 마지못해 금옥 씨가 인삼 담금주를 꺼내 온다. 술을 좋아하는 철이 덕분에 금옥 씨 좁은 마당에는 담금주가 꽤 많이 진열되어 있다. 그것은 철이에게 보물단지다.

"자 여기 한잔요. 오늘 기분이 좋았던 거예요.  뭐예요." 오늘은 왜 술을 마신건지 궁금해진 금옥 씨가 묻는다.

"그게, 기분이야 항상 조오오치. 하하하. 오늘 누구 조사했는데 뜬금없이 나한테 집이 있냐는 거야. 딸꾹" 집이 없었던 것이 서러웠던지 철이가 조사할 때 김상수가 했던 이야기를 금옥 씨에게 슬그머니 꺼낸다.

"그 사람은 조사받다 말고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래요."

"모오 올라. 딸꾹. 사기꾼인데. 쩌기 있잖아. 여보. 저기 강 건너 풀밭 말이야. 거기에 아파트 단지가 엄청나게 들어선다고 내가 불쌍했는지 거기 청약 넣으라네. 딸꾹. 뭐, 그렇다고 쳐. 내가 돈이 있나. 참나... 놀리나. 딸꾹"

철이는 김상수 말이 사실이라도 청약 넣을 돈도 없는 스스로가 한스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인다.

"무슨 소리야. 우리도 돈 모으면 되는 거지. 기운 내. 여보!!"

매일 아침에 나갔다가 자정이 되면 술에 절어있는 단무지가 되어 울 들어오는 철이가 불쌍했는지, 금옥 씨가 철이를 위로한다.

"그으래, 여보. 좋은 날이 오겠지이. 딸꾹" 좋은 날로 어서 떠나고 싶었던지 철이는 동그란 식탁에 고개를 박고 잠들어 버린다.  

금옥 씨는 술에 취해 잠이 들어버린 남편을 등에 업고 끙끙 거리며 안방으로 향한다. 서울에 올라와 촌놈이라며 경찰서에서 이리 치이며 무시받아서 그런가 철이 얼굴이 그새 늙어 보인다. 자고 있는 철이가 유난히 슬퍼 보이는 밤이다.


 


"따르릉따르릉"

주말 저녁을 마무리하는 모두가 아쉬움을 느끼는 그때, 금옥씨네 자주색 전화기가 세차게 울린다.

"여보세요." 종호, 현정이, 소연이와 엉켜서 티브이를 보던 금옥 씨가 부스스 일어나 전화를 받는다.

"언니, 나야." 상아 엄마 목소리다.

상아 엄마는 김순경 부인이다. 김순경은 철이가 고창에서 서울로 상경할 때 철이네와 같이 고창에서 올라온 9명의 경찰관 중 한 명이다. 금옥 씨는 낯선 서울에 올라와 힘들 때면 고창에서 올라온 경찰관 부인들과 타지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함도 함께 나누곤 했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 서울이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언니, 내일 뭐해요?" 상아 엄마가 금옥 씨에게 안부를 묻는다.

"내일 시험지 돌리지. 아, 맞다. 나 저기 강너머에 아파트 청약을 받는다고 해서 내일 은행 갈 거야. 상아 엄마도 같이 갈래? 아니다, 우리 9명 모두 같이 가자." 금옥 씨가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언니, 나도 뉴스에서 봤지. 저기 강너머 아파트요? 거기 비싸지 않나?" 상아 엄마 목소리가 주춤하다.

"그래도 우리도 서울에 있는 아파트 청약 넣어 볼 수는 있지 뭐~ ~그래. 얼마 전 뉴스 보니까 청약금 100만 원 적고서도 당첨된 사람이 있다잖아. 우리도 그럴지 모르지! 우리 다 같이 가자!!" 금옥 씨가 상아 엄마에게 꼭 같이 가자고 추임새를 넣고 또 넣는다.

"언니, 그래요. 그럼 내가 다른 언니들에게 연락할게요. 근데 어디서 만나요?" 마지못해 상아 엄마가 대답한다.

"응, 내일 국민은행 열 때 만나자. 오전 9시에 국민은행 오금지점에서 만나. 신난다! 같이 간다니. 고마워!!"


지금은 간편하게 핸드폰 하나 있으면 아파트 청약도 하고 은행업무로 볼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1990년대만 해도 아파트 청약을 하려고 하면 은행에 가야 했다. 은행 창구에서 자신이 원하는 청약금액을 적어 낸 후에 당첨 여부를 우편으로 기다리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은행에 방문해 청약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청약 금액란에 최저 금액부터 최고 금액까지 자유롭게 기재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청약 금액란에 100만 원만 적어 넣었다가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어 몇백 배 이익을 얻었다고 뉴스에 보도되어 전 국민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다.

그래서였을까. 금옥 씨뿐만 아니라 상아 엄마, 정범이 엄마, 이준이 엄마, 그린이 엄마, 영지 엄마, 정수 엄마, 윤이 엄마, 영수 엄마까지 모두 똑같이 집을 나서며 나도 청약 금액 100만 원으로 아파트 주인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국민은행 오금동 지점으로 향했다.


"언니!!! 왔어요? 꺄아 반가워요. 우리 좋은 건 같이 하자고요." 다들 반가운지 아직 열리지 않은 은행문 앞에 서서 부산스럽게 반가움을 표시한다.

"철커덩, 철커덩" 그때 은행 철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금옥 씨와 8명의 엄마는 1등으로 은행에 들어간다. 은행원에게 청약을 하러 왔다고 이야기하고 은행원으로부터 청약기입표를 각각 나눠 받았다.

"이름, 주소, 전화번호 쓰시고요. 청약금액란에 고객님이 희망하는 금액 쓰신 후 저에게 주시면 됩니다."

옆 가르마를 단정히 한 은행원이 방긋 웃으며 금옥 씨와 8명의 엄마에게 말한다. 모두들 펜을 들고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적어 나간다. 그러다 청약 금액란 앞에서 펜을 동시에 멈춘다.

'얼마를 쓴다?....'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 알뜰한 상아 엄마는 그냥 최저 금액을 적는다. 이리저리 고민하던 정범이 엄마는 최저 금액에서 1,000만 원 높인 금액을 적는다. 결국 그 누구를 살펴보아도 최고 금액을 적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 벽은 그들에게 너무 높아 보인다.


그렇게 모두 청약기입표를 작성한 후 은행원에게 건네준다. 마지막까지 입을 꾹 다문채 고민하는 금옥 씨는 큰 결심을 한 듯 청약기입표를 마저 작성한다. 가장 나중으로 청약기입표를 작성해 은행원에게 건네준다.

"청약 당첨 여부는 당첨 날짜에 기재하신 주소로 발송될 거예요." 단정한 얼굴의 은행원이 꾸벅 인사하며 말한다. 다소 들떠 보이는 9명의 여자들이 북적이며 은행 문을 나선다.


"있잖아, 미안한데 나 이제 시험지 돌리러 가야 해." 아직 돌릴 시험지가 많이 남아 있는 금옥 씨 마음이 급하다.

"언니, 우리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가요? 우리 10분만 이야기하고, 아니 얼굴 좀 보다가 가요." 반가운 마음에 영수 엄마가 금옥 씨를 붙잡는다.

"응, 그... 우리 저기 벤치에 좀 앉아 있다가 갈까?" 금옥 씨가 말한다.

"좋아요." 유리 창문 너머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카페 보이지만 길가에 놓인 벤치가 훨씬 편할 것 같다고 모두들 생각한다.

"종호 엄마는 얼마 적었어?" 정범이 엄마가 궁금한지 금옥 씨에게 묻는다.

"응.. 그게 말이야. 내가 재복이 없는 편인 것 같아서. 이익 덜 봐야 청약에 당첨될 것 같더라고. 그래서 최고 금액 적었지?" 금옥 씨가 털털하게 허허 웃으며 말한다.

"뭐....... 어?" 다들 눈이 동그래진다.

"언니, 근데 진짜 당첨되면 돈은 있어요?"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영수 엄마가 말한다.

"아니,, 없지! 그래도 어떻게 되겠지." 특유의 긍정으로 금옥 씨가 씩 웃는다.


'그래, 지금은 나에게 아무것도 없지만 또 길이 생기겠지.' 금옥 씨는 되뇌며, 이제는 진짜 가봐야겠다고  벤치에서 툴툴 일어나며 엄마들에게 말한다. 아쉽지만 이쯤에서 헤어지기로 한다. 금옥 씨는 책과 시험지가 가득 실린 자전거에 폴짝 뛰어오른다.

"안녕. 꼭 당첨되자." 찡긋 웃으며 동생들에게 인사한 금옥 씨는 점점 작아지며 골목길로 사라진다.


 


아침 배달을 마치고 오던 중 금옥 씨가 집 앞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누구를 기다리고 있다. 며칠 전 청약 당첨일이었다. 곧 집으로 우편이 올 예정인데 집배원 아저씨를 몇 번 놓쳤었다.. 마침 저 멀리서 집배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금옥씨네 앞에서 멈춰 선다.

"끼익"

집배원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금옥 씨가 다가와 저돌적으로 말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집 오른쪽 반지하에 사는 사람인데요. 혹시 거기로 등기 온 게 있을까요?"

"잠시만요."집배원이 우편물을 뒤적이며 말한다.

"여기 있네요. 어제도 왔었는데 안 계셔서 그냥 갔거든요. 다행이네요. 여기 받았다는 확인 사인 해 주세요." 금옥 씨에게 사인을 받은 집배원은 오토바이를 타고 부웅 다른 배달 지를 향해 달려간다.

금옥 씨 손에는 집배원에게 건네받은 a4용지보다 조금 큰 서류 봉투 하나가 들려져 있다. 그 안에 금옥 씨가 청약에 당첨되었는지 당첨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서류가 들어 있을 것이다. 평소에 긴장을 잘하지 않는 금옥 씨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그때 갑자기 누가 뒤에서 금옥 씨 어깨를 탁 잡는다.

"까아아아아아. 누구세요!" 소스라치게 놀란 금옥 씨가 소리를 지른다.

"여보, 나야 나. 어제 밤새 잠복 근무한다고 이제 왔지. 당신 여기서 뭐 해? 그건 뭐길래 덜덜 떨면서 꼭 안고 길에 서있는 거야?" 머리에는 새집이 지어져 있고, 수염은 깎지 못해 거무투투한 얼굴을 한 철이가 금옥 씨에게 궁금한 듯 말한다.

"깜짝 놀랐잖아. 들어가서 이야기해." 금옥 씨는 자전거를 세워 두고 철이에게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고 이야기한다.

철이와 금옥 씨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터널 터널 내려와 반지하 방과 바깥을 구분하는 녹이 슨 현관문을 열고 들어 간다.  


철이는 금옥 씨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입을 다물고 집 안으로 금옥 씨와 들어간다. 해가 들지 않아 거실 겸 주방이 어둑하다. 불도 지 않은 철이와 금옥 씨는 거실 겸 주방을 대부분 채우고 있는 둥그런 식탁에 앉는다.

"뭔데 그렇게 심각한 거야?"철이가 참다못해 금옥 씨에게 묻는다.

"그게 말이야. 당신 지난번에 술 먹고 와서 나한테 한 이야기 기억나요?" 금옥 씨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나 맨날 술 먹고 들어 오는데 술 먹고 들어온 날이라고 하면 아냐? 이 멍청이야."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매사에 금옥 씨를 무시하는 철이가 금옥 씨를 또 구박한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요. 지난번에 강 건너에 아파트 지어진다고 누가 그랬다고 당신이 그랬잖아요." 금옥 씨가 말한다.

"아, 그 이야기. 그거 사기꾼이 한 이야기라니까. 그 이야기는 왜?"황당하다는 듯 철이가 말한다.

"그거 청약 넣었지요. 결과가 오늘 우편으로 왔네..." 금옥 씨가 덤덤한 척 말한다.

"뭐?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당신 미쳤어? 휴,, 내가 멍청한 너 때문에 살 수가 없다." 철이는 밤새 잠도 자지 못해 예민한데 뚱딴지같은 이야기를 하는 금옥 씨가 답답하 화가 난다.

철이가 뭐라고 금옥 씨를 구박하든 금옥 씨는 전혀 듣지 못하는 것 같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둘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금옥 씨가 봉투 윗부분을 칼로 쓱 도려낸다. 날카로운 칼날에 봉투 윗부분이 반듯하게 잘려 나간다. 금옥 씨는 봉투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내 한 자 한 자 읽기 시작한다.

금옥 씨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생각한다. 답답해진 철이가 묻는다.

"뭐야, 당첨된 거야? 아니지?"

"그게... 우리 당첨되었네." 금옥 씨가 애매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소리로 말하고 싶지만 목소리가 안 나온다.

"난 몰라!! 당신이 알아서 돈을 구해와서 계약금을 내든 알아서 하라고! 난 모른다고. 우리가 돈이 어디 있냐고!!!" 철이가 금옥 씨를 향해 소리를 빽 지른다.

"아참! 여보, 나 오후에 운전면허 시험 있어. 이제 가봐야 해." 금옥 씨는 오후에 약속된 운전면허 시험이 번쩍 떠올랐다. 철이가 금옥 씨에게 뭐라고 구시렁구시렁 이야기했지만 뭐라든 모르겠다 싶어 금옥 씨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계단을 올라 자전거에 휙 올라탄 금옥 씨는 자동차 시험장을 향해 달려간다. 자동차 시험장은 송파 경찰서 옆에서 진행된다. 집에서 나와 다시 한참을 달려 높은 언덕길을 향해 올라간다. 이 언덕길은 유난히 높아서 자전거로 갈 수 없는 길이다. 금옥 씨는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며 뛰기 시작한다.


"수험번호 1254번 금옥 씨 오셨나요?" 금옥 씨 순번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헉헉, 네, 도착했습니다." 금옥 씨가 자전거를 급히 세우고 달려 나온다.

"탑승하세요. 이제 시작합니다." 안전 요원이 시작을 알린다.

금옥 씨는 차 문을 열고 앉아 안전벨트를 맨다. 그리고 연수 때 배웠던 것처럼 브레이크와 액셀을 구분하며 기아를 조절한다. 운전면허 시험을 보고 있지만 금옥 씨는 청약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그래, 당첨은 됐다고 치자.  내가 계약금이고 중도금까지 낼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운전면허 시험을 보러 온 나도 웃기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그래. 그래. 하나님, 부처님, 천지신명님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금옥 씨는 스스로를 위안하며 괜히 여기저기 신들을 소환해 기도한 후 주행을 마다.

"수험번호 1254번 금옥, 합격입니다."

안내탑에서 금옥 씨가 운전면허 1급에 합격했다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금옥 씨가 합격한 것은 운전을 잘하기 때문일지  차 안에서 했던 기도 효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꺄아아악, 합격이다." 그 순간 기쁜 금옥 씨는 폴짝폴짝 뛰며 탄성을 지른다. 같이 시험을 봤던 동료들도 금옥 씨에게 다들 축하한다고 말해준다.


 금옥 씨의 기쁨도 잠시, 다시 청약 당첨이 머릿속을 메운다.

'청약에 당첨되었을 때에도 이렇게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괜히 서러워 눈물이 핑 도는 금옥 씨다.

금옥 씨는 자전거를 타고 철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계약금을 마련할 계획을 세우기 위해 집으로 향한다. 아직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인지 집안이 고요하다. 철이에게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싶은 금옥 씨가 지하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이 빨라진다.

"여보, 나 왔어." 철이를 부르며 현관문을 여는 순간 집안에는 술병이 깨져있고 여기저기 널어져 있다. 철이는 속이 상했는지 이미 술에 취해 이불 위를 굴러 다니며 눈물을 흘려가며 술을 먹고 있다. 철이 모습에 할 말을 잃은 금옥 씨가 철이에게 외친다.

"여보! 정신 차리라고! 이렇게 술 먹고 있으면 무슨 일이 해결되냐고! 무슨 일이 해결되냐고! 무슨 일이 해결되냐고! 우리  없는 게 해결되냐고! 야!! 철이! 정신 차리라고!"

금옥 씨가 철이에게 정신을 차려 보라며 술에 잔뜩 취한 철이 뺨을 탁 탁 탁 친다.

짐승의 울부짖음인지 사람의 울부짖음인지 알 수 없는 금옥 씨의 외침이 작고 어두운 지하방을 가득 메운다. 벽에 걸린 동그란 시계가 오후 1시 40분을 향해 새침하게 움직이고 있다.  


*메인 이미지: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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