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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도 하는 변호사 Feb 18. 2024

금옥 씨의 새집 2편

희망의 씨앗

'그냥 포기하는 게 맞는 걸까......'

금옥 씨는 술에 취해 잠들어 버린 철이를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어 드넓은 서울에 보금자리 하나 마련할 수 있나 했지만 정작 현실은 청약 계약금능력이 없는 스스로가  한스러워 많이 울었나 보다. 자고 있는 철이 눈가와 볼마른 눈물 자국범벅이 되어 있. 하지만 금옥 씨는 울지 않다. 다만 철이가 안쓰러울 뿐.


 금옥 씨는 덤덤한 얼굴로 갈색 빛 장롱에서 두툼한 이불을 하나 꺼냈다. 자주색 비단위에 노란 꽃이 환하게 수놓아 있는 두툼한 솜이불이다. 찬란한 이불 위에 몇 병을 마셨는지도 모르는 철이를 들어 올려 눕힌다. 두툼한 이불에서 개운한 구름 냄새와 나프탈렌 냄새가 섞여 풍겨다. 철이는 술에 범이 되었지만 그 와중에 이불에서 나는 단내를 킁킁 맡는다. 거기에 이불의 보드라운 감촉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철이는 더 깊은 잠에 빠져든다.

"쿠우우우울.. 쿠우우우울"

철이의 코 고는 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단잠에 빠져든 철이를 뒤로하고 금옥 씨는 몸을 일으켰다. 철이가 여기저기 널어놓았던 술병과 깨져버린 병 조각들을 방에서 하나하나 치우기 시작했다.

'이 양반, 술을 마실 거면 그냥 마시지 병은 왜 깼을까. 애들 오면 다칠라.'

철이가 금옥 씨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금옥 씨는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혼자 중얼중얼 말해본다. 그렇게 금옥 씨는 몸을 조금 움직여 방안에 널어져 있는 술병과 바닥에 둥그렇게 널어진 토사물을 닦고 쓸고 치워 나간다.


 금옥 씨가 움직일 때마다 방이 점점 말끔해지기 시작했다. 철이가 코를 골 내뿜는 알코올 내음만 아니면 철이가 몇 시간 전 여기서 술을 먹 술병까지 깨고, 그 위에 구토까지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방이 깨끗해졌다. 방을 치우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3시다. 금옥 씨는 시계를 보자마자 급한 마음에 서둘러 겉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간다. 아직 돌려야 할 일일 시험지가 자전거에 한가득 실려 있다. 시험지를 구독하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시험지를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재빨라진다. 곤히 자고 있는 철이에게 이불 하나를 따뜻이 덮어주고 현관문을 나선다.


금옥 씨는 아파트 청약 계약금 낼 돈도 없는 처지이지만 누구보다 힘차게 자전거에 오른다. 금옥 씨가 두 발로 페달을 밟자 자전거가 달리기 시작한다. 금옥 씨가 발을 빨리 굴리면 자전거는 더 빠르게, 발을 천천히 굴리면 자전거는 속도를 줄여 서서히 달린다. 렇게 금옥 씨는 자신의 속도대로 즐겁게 달린다.  금옥 씨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자신을 스치는 공기의 향기를 맡아본다. 쌀쌀했던 3월이 지나가고 꽃이 하나 둘 피기 시작하는 4월에만 나는 특유의 냄새가 금옥 씨 끝을 스쳐 지나간다. 이맘때쯤 고향에서 분선씨와 거닐며 맡곤 했던 향기. 이 냄새가 날 때면 눈을 가늘게 뜨고 새로운 생명이 솟아오르는 냄새라고 말하던 분 선 씨가 떠오른다. 기에는 겨울 내 얼었던 흙이 녹으면서 피어오르는 희미한 이끼 향 나무에서 풍겨 나오는 둔탁한 향기, 그리고 새싹이 피어나면서 내뿜는 초록보다 환한 연둣빛 향기가 섞여있다. 금옥 씨는 오랜만에 맡아보는 옛 향기에 숨을 깊게 들어마셨다가 내쉬어 본다. 서울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는 금옥 씨에게 거친 나무와 흙, 새초롬한 새싹이 주는 생명력이  전해지고 있었다.



"띵동, 띵동" 철이는 서울에 사는 형님 집 벨을 누른다.

"누구세요." 세련된 인상을 한 형수님이 문을 열고 나온다.

"형수님, 저예요. 철이요." 철이는 형수님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철이는 2남 3녀로 정읍에서 태어났다. 철이는 2남 3녀 중 둘째이고 그 위에 형님 은철이가 있다. 세명의 여동생들은 모두 시집가서 고향에 살고 있지만 철이와 은철이만 서울에 와서 살고 있었다. 형님 은철이는 철이보다 일찍 서울에 올라와 오래전부터 건설업 쪽에서 일하고 있다. 당시 대한민국에 건설붐이 일면서 건설업을 하던 형님 은철이는 많은 돈을 벌고 있다. 형님 은철이는 서울에서도 꽤나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어느 날 형님 은철이는 고향 정읍에 고급 승용차를 타고 나타났고, 동네 어른들은 개천에서 용이 났다 철이 어머니를 부러워했었다.


철이네가 처음 서울에 상경했을 때 철이는 용산 경찰서로 발령을 받았었다. 마침 형님 은철이도 용산에 살고 있어서 철이는 금옥 씨와 삼 남매를 데리고 형님 은철이네에 가끔 놀러 가기도 했다. 같은 형제였지만 형님 은철이는 용산에 있는 정원이 있는 전원주택에 살았다. 그와 달리 철이는 일제 강점기에 지었다는 하수구 냄새가 나는 골목 한편에 지어진 목조로 된 2층 방에 살았다. 명절 때  철이네 가족이 형님 은철이 집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현정이는 철이에게 말했다.

"아빠, 큰 아빠 댁은 커다래서 큰집이고 우리 집은 조그마해서 작은집이라고 부르는 건가요?"

그렇게 말한 현정이는 뭐가 우스운지 푸하하하 하면서 웃었다. 현정이는 웃었지만 철이와 금옥 씨는 흠칫하며 서로를 바라보며 머쓱하게 웃었.       


어릴 적부터 철이에게 형님 은철이는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고 어려운 존재였다. 태어날 때부터 형님 은철이는 철이보다 언제나 뛰어났다. 학교에서나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 철이는 형님 은철이를 더 이상 따라잡을 수 없었다. 형님 은철이는 서울에서 철이에게 유일하게 가장 가까운 핏줄이었지만 서울에서 철이에게 가장 어려운 사럼이었다. 그런 철이 어떤 큰 마음을 먹었는지, 형님 은철이를 만나러 온 것이다.


"형님, 잘 지내셨어요?" 철이가 형님 은철이에게 넙죽 인사를 한다.

"그래, 무슨 일이냐?" 형님 은철이가 조금은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철이를 맞이한다.

"형님, 그게..... 이번에 말이에요. 저기 저 남쪽 풀만 있는 곳에 아파트 청약이 있었잖아요." 철이가 조심스레 말한다.

"그래, 있었지."

"종호 엄마가 거기에 청약을 넣었거든요. 어쩌다 보니 당첨이 되었네요. 그런데 형님도 알다시피 청약 계약금이 없어서요. 제가 서울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형님뿐이잖아요.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왔어요. 도와주실 수 있나 싶어서요."

철이는 마음속으로 정리한 내용을 구구 절절 형님 은철이에게 털어놓는다.

"야! 너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걸 넣냐? 분수를 알아야지." 형님 은철이가 소리치며 한심하다는 듯 철이를 바라다.

"그게.. 저도 몰랐어요. 근데 종호 엄마가 일을 저질러 놔 버렸네요." 철이는 울 듯이 이야기한다.

"그게 얼마인데?" 형님 은철이가 조금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는다.

" 청약 계약금은 구천 만 원이래요. 저희한테 천만 원은 있어서 팔천이 필요합니다. 형님." 철이가 혹시 형님 은철이가 그 돈을 빌려줄까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에 이야기한다.

"뭐? 팔천만 원이 어디 애 이름이냐. 이 자식아. 그 돈이 있다고 해도 내가 그걸 너희한테 왜 빌려주냐는 말이다. 또 너한테 빌려준다고 치자. 너희 처지에 중도금이랑 잔금은 어떻게 할 건데? 은행도 너네한테는 보증 안 서준다고. 뭘 믿고!" 형님 은철이가 철이에게 야박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형님..." 철이가 애원하며 형님 은철이의 이름을 부른다.

"그래, 그럼 그 돈 언제까지 내야 하는 거냐?" 형님 은철이가 묻는다.

"그게,, 지금이 3월 31이니까. 4월 말까지 내야 합니다. 형님. 이제 한 달 남았어요." 아파트 청약 계약금 마감일이 한 달 남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철이가 침을 꼴깍 삼키며 말한다.

"철이야, 그냥 피 받고 당첨권을 파는 건 어떠냐?" 형님 은철이가 눈을 반짝이면서 말한다.

"피를 받고 당첨권을 팔라고요?" 철이 눈이 동그래진다.

"그래, 어차피 너희들 계약금 낸다고 해도 중도금이랑 잔금 낼 돈이 어디 있냐. 너희 형편에 무슨 집이냐고. 그냥 피 받고 당첨권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 쓰란 말이다. " 형님 은철이가 다시 말한다.

"그게,,,, 형님. 종호 엄마랑 상의해 봐야 해요. 제 명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종호 엄마가 은행 가서 청약 신청한 거라 저 혼자 결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형님 은철이의 말을 듣고 좋은 생각이라 생각했지만, 종호 엄마 얼굴을 생각하니 그건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철이다.

"내가 좋은 가격에 당첨권 살 사람 알아 봐줄 수 있다니까. 그럼 종호 엄마랑 상의해 보고 어서 알려줘. 빠를수록 좋다. 알겠지?" 형님 은철이가 배시시 웃으며 말한다.

"네, 형님. 오늘 가서 종호엄마랑 상의해 볼게요." 철이는 금옥 씨 얼굴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금옥씨네 전화기가 울린다.

"여보세요?" 현정이 종호, 소연이 작은 방에서 놀다 전화벨 소리를 듣더니 거실로 후다닥 달려 와 전화를 받는다.

"누구냐?" 전화기 너머로 할머니 목소리로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다.

"현정인데요. 누구세요?" 현정이가 누구신가 하고 묻는다.

"오냐, 현정이구나. 나 고모할머니다. 많이 컸지?" 할머니가 반가운 목소리로 현정이에게 안부를 건넨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현정오래전에 보았던 고모할머니가 생각났는지 반가운 목소리 대답한다.

"그랴, 그랴. 현정아. 엄마는 어디 갔는가?" 고모할머니가 금옥 씨에게 용건이 있는지 금옥 씨를 찾는다.

"할머니, 엄마는요.. 일일 시험지 돌리시고 요즘에는 밤 12시쯤 들어오실 때도 있고 조금 일찍 들어오실 때도 있어요. 오늘은 언제 오실지 모르겠어요. 음.. 거의 저희 자고 나면 오세요. "

현정이가 할머니의 물음에 대답한다.

"그렇게나 늦게? 에구,,, 너희 엄마가 고생이 많구나. 그래도 오빠너희 좀 컸다고 이제 일 시작했나 보네." 고모할머니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하다.

"네..." 현정이 목소리가 작아진다.

"현정아, 이모한테 너희 아파트 청약 당첨 됐다고 들었다. 현정이 니도 아냐?" 고모할머니가 현정이에게 묻는다.

"네, 할머니. 엄마가 아파트 청약에 당첨 됐다고는 말했어요. 근데 그날 이후로 아빠는 술만 드시고, 엄마 얼굴도 맨날 안 좋으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당첨되었으면 좋은 것 아닌가요. 할머니, 저도 문구점에서 뽑기 해서 1등으로 커다란 붕어엿이 당첨된 적이 있거든요. 저는 그때 엄청 좋아했는데... 친구들이랑 나눠 먹고. 진짜 좋았는데요. 엄마, 아빠는 왜 당첨이 되었다는데  좀 슬퍼 보요." 현정이가 요 며칠 동안 금옥씨네 집에서 느낀 묘한 분위기 고모할머니에게 조잘조잘 이야기한다. 금옥 씨가 아이들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눈치 빠른 현정이와 아이들은 집에 흐르는 분위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 현정아. 괜찮다. 걱정하지 말고. 엄마, 아빠가 일하신다고 피곤하신가 보구나. 현정이가 엄마, 아빠 말씀 잘 듣고 하면 좋아질 거야.  엄마 오시면 고모할머니께 전화 왔다고 전해주렴. 아, 현정아, 늦은 시간에도 괜찮으니 엄마 오시면 꼭 좀 전화하라고 말해주" 고모할머니는 현정이를 다독이며 말한다.

"네.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현정이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다.


전화를 끊은 현정이가 현관문에서 부엌 겸 거실로 들어오는 방향 쪽에 툭 튀어나와 있는 벽에 걸린 뻐꾸기시계를 바라본다.

'흐음.. 벌써 8시 30분이네.'

시계를 본 현정이는 오늘도 금옥 씨가 12시가 넘어서 들어올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엄마한테 알려야 하니까....' 그리고는 커다란 A4용지 하나를 꺼더니 연필로 직 큼직 다음과 같이 적어 나간다.

"엄마!! 고모할머니께 전화가 왔어요! 저는 9시면 잠드니까요. 엄마 얼굴을 못 볼 것 같아. 그래서 편지 남겨요. 고모할머니께서 늦어도 괜찮으니 꼭! 꼭! 전화 달라셨어요. 엄마, 일찍 오세요. 보고 싶어요."

현정이는 하얗고 네모난 메모지에 조금은 삐뚤지만 사랑을 가득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채워 나간다. 금옥 씨에게 고모할머니께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던 현정이는 엄마에게 커다란 쪽지를 남긴다. 금옥 씨가 고모할머니랑 통화를 하면 다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 현정이다.

'이렇게 식탁에 놓으면 보시겠지.'

현정이는 식탁 위에 글씨가 쓰인 종이를 두고 다시 종호와 소연이가 컴퓨터 게임하며 놀고 있는 방으로 쪼르르 달려 들어간다.


"현정아, 누구 전화야?" 게임을 하던 종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현정이에게 묻는다.

"응, 오빠. 고모할머니한테 전화가 왔어. 엄마를 찾으시던데... " 현정이가 대답한다.

"그래? 다른 말씀은 안 하시고?" 고모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종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응, 뭐라고 하셨더라?"현정이가 아까 전화했던 내용을 떠올려 본다. 그때 차례를 기다리던 막내 소연이가 종호에게 큰소리로 말한다.

"오빠! 오빠! 내 차례거든. 언니랑 말할 거면 저기 가서 해. 나 게임하게. 이거 빨리 깨야 우리  거 아니야." 자그마한 막내 소연이가 오늘은 반드시 게임을 깨겠다는 굳은 의지가 가득 찬 얼굴로 귀엽게 말한다.

"그래라. 막내 돼지야. 이번 판에는 꼭 이겨야 한다." 종호가 막내 소연이에게 말하며 자리를 비켜 준다.

"그러니까 이번에 우리 집 아파트 청약 당첨 이야기를 하셨는데.... 우리 아파트 당첨 되었냐고 물으시고, 음... 또 엄마 오시면 늦은 시간이라도 꼭 전화 달라고 엄마께 전해 달라고 하셨어." 현정이가 아까 통화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해서 종호에게 말한다.

"그렇구나. 왜 전화하셨을까? 고모할머니 예전에는 자주 봤었는데, 할머니 돌아가시고는 우리 집에 한 번도 안 오셨네." 종호가 궁금한 표정으로 말한다.

"꺄아아아아아아아, 오빠, 내가 이번 판 깼다." 갑자기 옆에서 소연이가 소리를 지른다.

"야! 깜짝이야!! 소연아 무슨 일야. 오!!! 진짜? 너 진짜 대단하다." 현정이가 눈이 커지며 말한다. 현정이 눈이 커진 이유는 이러했다. 금옥씨네 삼 남매가 요즘 푹 빠진 게임이 하나 있었다.  마법사를 데리고 전 세계각 나라 성을 공략해 가는 스토리 게임이다. 일주일 전부터 삼 남매가 합심해 스테이지 1부터 하나하나 깨 가고 있었는데 어제부터 스테이지 8 아프리카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셋이 같은 스테이지를 맴돌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막내 소연이가 현정이와 종호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스테이지 8을 깬 것이다.

"야!! 야!! 소연, 어서 스테이지 8 저장해." 현실적인 종호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한다.

"응, 오빠. 히히" 소연이가 히죽 거리며 말한다.

그러더니 종호가 진지한 얼굴로 동생들에게 말한다.

"소연아, 현정아 이제 양치질하고 잘 준비하자."

"오빠, 스테이지 9부터 다시 시작 안 하고?" 소연이가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지금? 야~ 소연아. 지금 벌써 밤 9시야. 어서, 어서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잘 준비하자." 종호가 단호하게 말한다. 마치 엄마 같은 오빠다.

종호 이야기에 동생들은 화장실에 가서 양치질도 하고 세수도 한 후 방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각자 이불속으로 쏙 몸을 누인다.

"자, 이제 불 끈다." 종호가 말한다.

"오빠, 깜깜하면 무서우니까 불 켜고 자자." 어두운 것을 무서워하는 현정이가 말한다.

"그래, 알았어." 종호가 좀 생각하더니 알겠다고 말한다.

조잘조잘 쉴 새 없이 이야기하던 셋이 갑자기 한참 말이 없다. 그때 소연이가 침묵을 깨고 말한다.

"오빠, 엄마는 언제 오셔?"

"글쎄,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봐." 종호가 누워서 천장 불빛을 보며 물끄러미 말한다.

"엄마랑 아빠 보고 싶다." 현정이가 말한다.

"그렇지, 그래도 곧 오 실 테니까 우리 자자." 종호가 말하며 옆에 있는 현정이를 바라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미 현정이는 코를 골며 자고 있다. 뻐꾸기시계가 밤 열 시를 알리자 소연이도 코.... 소리를 내며 잠이 든다. 오늘도 동생들을 돌본다고 맏이 노릇을 했던 종호도 피곤했는지 이내 꿈속으로 빠져든다.


"뻐꾹, 뻐꾹, 뻐꾹, 뻐꾹, 뻐꾹, 뻐꾹,........" 자정이 되자 금옥씨네 벽에 걸린 뻐꾸기시계에서 뻐꾸기가 집을 열두 번 나왔다가 들어가며 자정이 되었음을 알린다.

"딸깍" 현관문 열쇠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금옥 씨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온다. 집에 오니 따스함이 느껴진다. 온 집안 불 환하. 하지만 아이들 모두 자는지 집안이 고요하다. 금옥 씨는 작은 방으로 살금살금 걸어가서 문을 살며시 열어본다. 삼 남매 셋이서 신나게 놀다 잠이 들었는지 현정이는 저 구석에, 소연이는 중앙에, 종호는 저쪽 위에 가지 각색으로 편한 대로 누워있다. 이불 놀이도 했는지 여러 개 이불이 방에 뒤엉켜 있다. 금옥 씨는 현정이와 소연이, 종호를 하나하나 살펴본다. 그리고 이불을 살며시 덮어주고 다시 방문을 닫고 불도 꺼준다.

'휴우, 하루가 또 갔구나.'

금옥 씨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하루종일 자전거를 타며 시험지를 돌리고 이제야 의자에 앉으니 발가락 열개에 저림이 후끈 올라온다. 목 마름을 느낀 금옥 씨는 냉장고를 열고 차가운 보리차를 꺼낸다.

"쪼르르르르" 차가운 보리차가 컵 안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진다.

차가운 보리차를 따르자마자 벌컥벌컥 마시다 금옥 씨는 식탁에 놓인 종이를 발견한다.

'뭐지?'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누가 뭐라고 적어 놓았다. 현정이 글씨다.  

'고모할머니?' 금옥 씨는 고모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는 현정이의 메모를 본다. 그리고 고모께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한다.

고모는 금옥 씨 아버지의 셋째 동생이다. 금옥 씨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날 고모는 검은 상복을 입고 울고 있는 금옥 씨 손을 잡으며 말했다.

"금옥아, 네가 태어날 때쯤 말이다. 너희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살려주신 적이 있었어. 아마 아버지가 너한테 그런 이야기는 안 했을 거야. 자세한 이야기는 때가 되었을 때 해주마. 대신 앞으로 살면서 말이다. 아버지도 안 계시고 그리고 어머니도 안 계실 그때 말이다. 혹시라도 누군가의 간절히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전화 한 통 해주겠니?"

갑자기 금옥 씨 머릿속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늦더라도  꼭! 꼭! 전화 달라고 했다는 현정이가 또박또박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금옥 씨는 '후우'하고 숨을 한번 내쉬어 본다. 그리고 천천히 고모할머니 댁에 전화를 걸기 위해 수화기를 다.


*메인 이미지: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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