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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도 하는 변호사 Mar 09. 2024

금옥 씨의 새집 4

큰집과 현정이의 피아노

"철컥"

이른 아침, 투명하고 무거운 은행 문을 열고 금옥 씨가 은행으로 들어선다. 은행 직원이 금옥 씨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어떤 업무 때문에 은행에 온 것인지 금옥씨에게 묻는다.

"통장에 입금된 돈 좀 확인하려고요." 금옥 씨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금옥 씨가 볼 은행 업무를 확인한 직원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금옥 씨에게 번호표를 들고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다. 직원이 적어준 1번 번호표를 손에 들고, 완전히 푹신하다고 하기 어렵지만 약간 푹신한 대기용 의자에 금옥 씨가 살며시 걸터 앉는다.


어젯밤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은행 업무를 마저 처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 오늘 아침에 발생한 은행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것인지 방금 문을 열었지만 은행 유난히 분주해 보인다.

"1번 손님, 1번 창구로 와주십시오." 바쁜 업무 처리가 한창인 은행 창구에서 금옥 씨 손에 든 번호를 호명한다.

금옥 씨는 아주 크지 않은 소리로 네라고 말하고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리고는 1번 창구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는다.

"안녕하세요. 제 통장에 입금된 돈을 확인하려 왔어요." 금옥 씨가 1번 창구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은행에 온 용무를 밝힌다. 길 어디서 만나도 은행원을 직업으로 하고 있을 것 같은 인상을 가진 남자가 1번 창구에 앉아 있다. 그는 금옥 씨가 말한 은행 용무를 고개를 끄덕이며 듣더니 금옥 씨에게 알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친절한 얼굴로 금옥 씨가 건넨 네모난 통장과 금옥 씨가 맞는지 알기 어려운 바랜 사진이 붙어 있는 신분증을 유심히 확인한다.


"띠리리 띠띠, 띠띠"

금옥 씨가 건넨 통장이 기계 앞으로 들어갔다가 요란한 소리를 마치고 다시 기계를 빠져나온다. 그는 기계에서 빠져나온 금옥 씨 통장을 확인한 후 빙긋 웃으며 말한다.

"고객님, 4월 3일 고객님 통장으로 삼천만 원이 입금되어 있네요. 확인해 보세요."

은행원은 금옥 씨에게 삼천만 원이라는 돈을 실제로 보여주지 못해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금옥 씨에게 통장을 건넨다. 통장을 건네받은 금옥 씨가 통장에 적혀 있는 활자를 하나 하나 확인한다.

"4월 3일/ 박순옥/ 30,000,000"

금옥 씨는 삼천만 원이라는 숫자가 익숙하지 않아 3이라 적힌 숫자 뒤에 영이 몇 개 붙어 있는지 하나하나 세어본다.


이제 금옥 씨 통장에는 원래 가지고 있던 천만 원에 고모 순옥이 보내준 삼천 만원까지 더해 총 사천만 원이 들어 있다. 이렇게 큰돈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금옥 씨가 고개를 살짝 떨군다. 얼굴이 달아 오르며 식은땀까지 나는 것 같다.  금옥씨는 큰 돈이 주는 괜히 무서운 기분 들고온 망태 주머니 안으로 통장을 깊숙이 밀어 넣는다.


용무를 마친 금옥 씨는 1번 창구 직원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통장에 사천만 원을 가진 금옥 씨가 일어서자 1번 창구 직원도 일어서서 처음보다 더 친절한 얼굴로 인사를 한다. 옆 창구에 앉아 있던 여자 은행원이 일어서서 인사하는 1번 창구 은행원을 한번 힐끗 보더니 금옥 씨를 한번 더 바라본다. 조금은 더 어깨를 펴도 될 법하지만 금옥 씨는 괜스레 위축되어 반듯한 은행을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이다. 1번 창구 직원에게 어물쩡 인사를 마친 금옥 씨가 네모난 건물에 네모난 창구들이 들어차 있는 은행을 급히 빠져나온다.


금옥 씨는 은행 문을 나서며 긴장했던 마음을 풀어 보려고 아침에는 미처 올려다보지 못했던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금옥 씨에게 쏟아질 것 같이 맑다. 그 파란색 사이로 은행 앞에 우뚝 서있는 나무에 아기자기 매달린 벚꽃 봉오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은 꽃피우지 않은, 하지만 이제 며칠 있으면 화사하게 자태를 자랑할 벚꽃봉우리. 분홍색이라고 부르기에는 하얗고, 또 하얗다고 하기에는 연둣빛이 섞인 벚꽃봉우리를 바라본다. 오묘한 색의 조합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꽃봉오리의 새침함에 더해 더욱 신비해 보인다. 4월, 금옥 씨의 생일 즈음 일 년에 딱 한 시절 자연이 움트는 곳에서 볼 수 있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그곳에서 발견한다.


 벚꽃봉우리의 싱싱한 모습에 금옥 씨도 씩 웃어 보이며 자전거에 폴짝 올라탄다. 금옥 씨를 태운 자전거가 출발한다. 4월 나무에 피운 꽃봉오리 같은 자전거 탄 금옥 씨가 파란 하늘 밑을 달린다. 금옥 씨도 둥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초봄의 꽃봉오리처럼 꽃을 틔울 수 있기를 바라며.



"현정아, 이번 주 토요일에 피아노 콩쿠르 있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니?" 피아노 선생님이 현정에게 묻는다.

"선생님, 아니요. 말씀드린다는 게 깜박했어요." 금옥 씨가 매일 밤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말씀을 못 드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현정이가 에둘러 말한다.

"근데, 현정아. 콩쿠르 때 입을 드레스 말이야. 드레스 준비해야 하는 것도 잊지 말고." 피아노 선생님은 혹시나 현정이가 잊을까 싶어 콩쿠르 때 입을 드레스를 잊지 말라고 다시 한번 더 말한다.

현정은 피아노 콩쿠르 때 단정한 옷을 입고 가서 피아노 치면 될 것을, 공주 같은 드레스는 웬 말일까 생각한다. 만화에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생각하니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그런데 이번에 같이 콩쿠르에 나가는 수진이를 떠올리는 현정의 모습을 보니 공주 드레스가 싫은 이유가 따로 있는 듯싶다.


어제 수진은 이번 주 토요일에 있을 콩쿠르에서 입을 드레스를 피아노 학원에 입고 왔다. 새하얀 레이스에 촤르르 떨어지는 비단 같아 보이는 옷감을 본 현정이는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평소에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수진이가 새하얀 드레스에 왕관까지 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 공주가 따로 없었다. 나도 저런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콩쿠르에 나간다면 금상 아니 최우수상은 거뜬히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러움에 이끌린 현정은 쿨한 척하려던 마음을 못 이기고 결국 수진에게 그 드레스 어디서 샀느냐 묻고 말았다.

"이거? 너 알지? 이거 저기 롯데 백화점에서 샀지. 지난주에 엄마랑 손잡고 가서 샀지. 좀 비싼 것 같았는데 엄마가 사주셨어. 현정아, 너도 이거 사려고? 근데 이거 좀 비싼데...... 너네 집도 백화점에서 옷 사니?"

수진의 잘난 척에 지지 않고 싶었던 현정은 나도 엄마랑 백화점 가서 그거 보다 더 예쁜 드레스 사기로 약속했다고 말하고 말았다. 이번 콩쿠르에서 현정이가 입은 고급 드레스를 볼 수 있겠다는 너스레를 떠는 수진의 말에 현정이는 아차 한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금옥 씨는 백화점에서 수십만 원 하는 고급 드레스를 사줄 수 없는 작은 집에 살고 있음을 아는 현정이었다. 현정은 고급 드레스를 살 수 없을 바에는 그냥 평범한 옷을 입고 가는 게 낫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잘난 척 쟁이 수진에게는 고급 드레스를 사기는 샀는데 동생이 드레스에 물감을 엎어 못 입었다는 믿기 어려운 거짓말을 하면 되겠다는 서툰 묘수를 내며.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요즘 금옥 씨가 돌리는 일일 시험지를 구독하면 성적이 오른다는 입소문이 오금동에 자자해지면서 구독자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오금동을 넘어 옆동네 마천동까지 금옥 씨에게 일일 시험지를 배달해 달라고 부탁하는 구독자가 하나 둘 아니 벌써 삼십 명을 넘어섰다. 본사에서도 원래는 오금동 소속은 오금동에서만 일일 시험지를 돌릴 수 있지만 전국 일등 사원인 금옥 씨에게만은 예외를 두고 있다. 본사에서는 그렇게 금옥 씨에게만 오금동 아니 금옥 씨가 여력이 되는 어느 지역에서나 일일 시험지를 돌릴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이유는 금옥 씨에게 일일 시험지를 구독한 구독자는 일일 시험지뿐 아니라 위인전 전집, 백과사전 전집까지 모든 책들을 싹쓸이해서 구입하기 때문에 본사에서 얻는 수입이 어마 어마 하다. 그러니 본사에서도 금옥 씨에게 예외를 두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도 금옥 씨는 자전거를 타고 오금동을 넘어 마천동까지 배달을 가고 있다.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며 오금동과 마천동을 잇는 다리를 걷다. 저기 멀리로 새빨간 해가 금옥 씨에게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며 포효하는 듯 하다. 한참을 걷던 금옥 씨 어느새 마천 시장에 들어섰다.


금옥씨는 시장에서 찬거리를 좀 살까 싶어 살펴보다 순간 아동복 가게 앞에 멈춰 선다. '멋져 아동복'이라고 큼직하게 쓰인 간판이 걸린 가게다. 간판을 보니 조금 오래된 가게로 쇼윈도에 노란 먼지 때가 내려앉아 있다. 쇼윈도 안에도 조금 바랜 여자 아이 마네킹이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서있다. 금옥 씨는 그 모습을 보며 이번 주 토요일 피아노 콩쿠르에 나갈 현정의 드레스를 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어머님, 이번 주 토요일 현정이 피아노 콩쿠르 있는 거 아시지요? 남자아이는 턱시도, 여자 아이들은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드레스 코드가 있어요. 그러니 현정이 콩쿠르용 드레스 준비해 주세요. 뭐 특별한 옷은 아니고 드레스면 된답니다."


금옥 씨가 현정이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에 학원비를 내려 들렸던 그날, 원장 선생님이 금옥 씨에게 했던 그 말을 기억해 낸 것이다. 작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커서 피아노 콩쿠르를 나간다고 하니 금옥 씨는 현정이가 그저 기특하고 자랑스럽기만 하다.


"안녕하세요. 아이 피아노 콩쿠르에 입을 드레스 좀 사려고요." 금옥 씨가 옷가게 주인에게 우리 딸 대단하다고 자랑하듯 또랑 또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옷 가게에 들어선다.

"어서 오세요. 아이가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요?이야! 어머니, 정말 좋으시겠어요." 옷가게 주인이 방글 웃으면서 말한다.

"여자 아이인데 어떤 옷이 좋을까요? 드레스를 사야 한다고 해서 지나가다가 들리기는 했는데요. 어떤 것이 좋을지 잘 모르겠네요." 금옥 씨가 드레스가 종류별로 잔뜩 걸린 옷걸이를 보며 난감한 기색을 보인다.

"음... 어머니도 참.. 여자 아이라면 핑크 아니겠어요. 어디 보자.. 이 핑크색 드레스가 이 가게에서 제일 좋아요." 옷가게 주인이 유난히 핑크색이 돋보이는 레이스 달린 드레스를 들어 올린다.

양팔 부분에 핑크색 레이스가 어깨를 감싸고, 몸통 부분은 핑크색 비단 재질의 천으로 되어 있는 드레스이다. 치마 부분은 어깨를 감싼 레이스 재질의 천이 겹겹으로 감싸 풍성한 느낌을 풍기고 있다.

"오, 이것도 예쁘네요. 사장님, 이걸로 주세요." 금옥 씨가 마음에 들었는지 핑크색 드레스로 마음을 굳힌다.

"네, 어머니. 이거 2만 5000원인데 2만 3000원 주세요." 옷가게 주인이 인심 쓰듯이 말한다.

"아니에요. 사장님, 그냥 2만 5000원에 사갈게요." 금옥 씨가 웃으며 말한다.

사장님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금옥 씨는 본래부터 아이들과 관련한 물건을 살 때면 절대 돈을 깎지 않는다. 그 이유를 대자면 아이들 옷이나 책이나 무엇이든 간에 돈을 깎으면 아이들 인생도 깎일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금옥 씨는 삼 남매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삼 남매에게 필요한 물건을 살 때면 언제나 그것이 저렴한 물건이라도 반드시 정가를 주고 사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도 드레스값을 2000원 깎으면 현정이가 콩쿠르에서 그만큼 점수가 깎일까 싶은 마음이 든 금옥씨다. 그래서 이천원 깎아 준다는 옷가게 주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정가를 주고 드레스를 샀다.


금옥 씨는 이번주 토요일 고운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콩쿠르에서 피아노를 칠 현정이를 생각한다. 한껏 배부른 마음으로 옷가게를 나선다.



"띵동"

주춤주춤 망설이던 철이와 금옥 씨가 망설이다 눈을 꼭 감고 푸른 철문 옆에 붙어있는 형님 은철이네 초인종을 누른다.

"여보, 뭐라고 하려고 그래?" 금옥 씨 손에 이끌려 끌려 오다시피 한 철이가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철이는 금옥 씨 긴급 호출에 경찰서에서 점심도 먹지 못하고 점심시간 형님 은철이를 급히 방문한 것이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지요. 해봐야지. 뭐라도 해봐야지요." 금옥 씨가 철이를 바라보며 뭐라도 해봐야 한다고 몇번을 말한다. 당차게 말하는 금옥 씨지만 자신도 무슨 배짱으로 가진 돈과 비례해 구두쇠 심성이 누구보단 유명한 은철이네 벨을 누르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무엇이라도 해야 무엇이든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금옥 씨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누구세요?"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진 형수가 대문 쪽으로 다가온다.

"형님, 저희 종호네예요. 아주버님 좀 만나러 왔어요." 금옥 씨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화답한다.

"동서가 이 시간에 여기는 무슨 일이야? 들어와." 마땅하지 않은 표정으로 형수가 문을 열며 말한다.

형수는 금옥 씨를 위 아래로 훑어 보고, 밤새 수사 하느라 머리에 까치집을 한 철이도 한번 훑어 본 후 여간 못마땅 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금옥 씨와 철이를 집 안으로 안내한다.

"누구야?" 집 안에서 형님 은철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글쎄요. 당신네 동생 왔네요." 여전히 뻣뻣한 목소리로 형수가 대답한다.

"동서, 우리 지금 점심 먹는 중이야. 저기 소파에 앉아서 좀 기다려. 설마 점심까지 얻어먹으러 온건 아니지?" 형수가 피식 웃으며 비웃듯 말한다. 아마 형수는 이미 은철에게 금옥 씨 사정을 알고 있던 터라 금옥 씨와 철이의 방문 목적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럼요. 식사하세요. 형님. 저희는 점심 먹고 왔어요. 여기 앉아 있을게요." 아침도 못 먹은 금옥 씨가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들릴까 싶어 큰 소리로 말하고 자리에 는다.


거실 탁자 앞에 앉아 있으니 형수와 은철이의 대화 소리가 거실 탁자까지 울려 퍼진다. 일부러 들으라고 크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이 커다란 집 거실에 확성기가 몰래 설치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뭐야, 저 새끼 왜 왔어. 밥 맛 떨어지게." 은철이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여보, 당신이 무슨 재벌도 아닌데, 서울 바닥에 지 형님 돈 좀 있다고 거지 벌레처럼 달려들러 왔지 뭐. 징그럽다. 징그러." 형수가 정말 징그런 벌레를 보듯 징그런 입모양을 지어 보인다.

"에이, 밥  먹겠네. 저 새끼는 어릴 적부터 저래. 내 팔자야. 지가 돈 벌어서 잘 살 생각은 안 하고 다 커서 저게 뭐야. 에그... 짐스럽다. 짐스러. 내가 무일푼에 서울 올라온다고 할 때부터 알았지." 은철이가 더욱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한다.

"그러게요. 그냥 분양권 피 받고 팔면 될 것을. 분수를 모른다. 분수를 몰라. 저 부모에 저 자식들이라고 명절에 오면 어찌나 처먹는지."

형수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3개월 전에 다녀간 조카들을 들춰내며 흉을 보고 나섰다.

아이들 흉보는 이야기가 나오자 금옥 씨가 헛기침을 흠흠 크게 낸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그래도 하려 했던 이야기는 해보자는 마음이다.


밥 맛이 없다는 은철이와 형수는 금옥 씨와 철이가 오고서도 한참 밥을 꾸역 꾸역 먹고 거실로 슬금슬금 나온다.

"야! 지난번에 내가 돈 없다고 했잖아. 너 무슨 일로 왔어?" 은철이가 거실에서 나오자마자 철이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친다.

"그게요. 형님. 종호 엄마가 그래도 한번 형님한테 말씀드리자고 해서요." 여전히 형님 은철이가 무서운 철이는 깨갱하며 금옥 씨 핑계를 댄다.

"아주버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금옥 씨가 은철이가 소파에 앉기 무섭게 당찬 목소리로 말한다.

"제수씨, 뭘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까. 나참." 은철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주버님, 저희 청약 계약금으로 이제 사천 만원이 모였습니다. 조금만 더 모으면 청약 계약금 낼 수 있습니다. 제발 조금만 도와주세요. 천만 원도 좋고, 이천만 원도 좋고 여력이 되시는 대로 좀 빌려 주세요. 청약 계약금 내고 이자까지 더해서 갚겠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도 잘되고 있어서 갚을 수 있습니다." 금옥 씨는 은철이가 조금만 금옥씨네를 도와주면 청약 계약금을 낼 수 있다는 생각에 간절한 표정으로 말한다.


"동서, 말은 바로해. 동서네는 결혼을 할 때나 지금이나 돈이 한 푼도 없다고. 그냥 수완이 없는 게 아니라 원래 거지같이 살아온 사람이 뭐? 천만 원도 좋고, 이천만 원도 좋다고? 그거 사실 도둑놈 심보 아니야? 아니고서야 어쩜 그리 뻔뻔해. 사실 우리가 친척이기는 하지만 난 사실 동서네가 많이 창피해. 어디 가서 우리 안다고 하지 말라고." 금옥 씨 말을 들은 형수가 끼어들어 금옥 씨와 철이에게 모진 말을 쏟아낸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말을 그리 하시나요. 사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아주버님이 아버님 땅 몽땅 다 가져가고, 그 땅에 원자력 들어오면서 받은 보상금 밑천으로 부자 되신 거잖아요. 그리고 저희가 그때 우리 몰래 가져가신 땅 모르실 줄 아셨던 거예요? 아니에요. 저희도 형님네가 아버님이 남기신 땅 가져가신 거 알고 있었지만 형제간에 재산싸움은 하지 말자고 해서 종호 아빠랑  형님네에 아무 이야기도 안 했던 거예요. 그때 생각해서 조금만 도움을 주시면 좋겠어요." 금옥 씨는 예전에 은철이가 시아버님 재산을 철이 몰래 모두 가로챈 이야기를 꺼내며 도움을 청했다.

"동서, 그건 동서네가 멍청해서 뺏긴 거지. 누가 뺏기래. 그렇게 바보같이 사니까 이제껏 그렇게 가난한 거야. 사람이 좀 약게 좀 살아. 바보같이 살아 놓고 누구한테 뭐라는 거야!" 형수가 소리를 빽 지른다.

"철이, 이 새끼. 꺼져. 그런 재수 없는 이야기 할 거면 꺼지라고.밥 먹은거 다 체하겠네." 은철이도 뜨끔했는지 철이와 금옥 씨에게 소리를 지른다.

"형님, 잘못했습니다. 종호엄마가 말실수했어요." 철이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은철이에게 두 손을 싹싹 빌려 고개를 숙였다.

" 여보! 됐어. 그냥 일어나. 형님, 아주버님. 됐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왔는데. 역시나 제가 착각했네요. 여기에 무엇을 바라나요. 됐습니다. 됐어요." 무릎을 꿇는 철이 모습을 본 금옥 씨는 철이 손을 당겨 일으켜 세운 후 밖으로 끌고 나간다.

"그래, 다음부터는 오지 말라고. 툇툇. 재수가 없으려니까. 소금이나 뿌려야겠다." 형수가 일어서더니 손을 잡고 가는 금옥 씨와 철이를 밀어낸 후 부엌에서 가져온 소금을 금옥 씨와 철이 등에 뿌려댄다.

현관문 밖으로 뿌려지는 하얀색 굵은소금과 같은 눈물이 금옥 씨 눈에 또르르 흘러내린다.



 "현정아, 이리 와봐. 콩쿠르 가야지." 토요일 아침 금옥 씨는 현정이를 부른다.

"엄마, 나 드레스 안 입고 그냥 옷 입고 가려고." 현정이가 평소에 입는 청바지와 하얀 티셔츠를 입고 금옥 씨를 바라본다.

"뭐? 이렇게 입고 간다고? 아, 엄마가 너 입고갈 드레스 사 왔지. 짜자잔!" 어제도 현정이가 잠든 후에 들어온 금옥 씨가 가방에서 검은색 봉지를 주섬 주섬 꺼낸다. 검은색 봉지 안에는 진달래 색깔을 닮은 드레스가 들어있다. 현정은 검은색 봉지와 검은색 봉지에서 튀어나온 진달래 같은 드레스를 연달아 바라본다.

"엄마, 나 이거 마음에 안 드는데..." 현정이가 얼굴을 찡그린다.

"현정아, 입어봐. 이거 입고 콩쿠르 가서 피아노 연주하면 엄청 멋질 거야. 목요일에 현정이 너 생각하면서 엄마가 마천 시장에서 사 왔지. 근데 이제 보여주네." 금옥 씨가 싱싱하게 웃으며 말한다.

현정은 마천 시장에서 사 왔다는 마을 들으니 진달래 같은 색을 내고 있는 드레스가 더 더욱 촌스럽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세게 흔든다.

"엄마, 싫어. 나 이거 입기 싫어."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현정이가 말한다.

"에이, 현정아, 그래도 이거 입어봐. 엄마가 생각해서 사 온 건데." 현정이의 반응에 다소 섭섭한 금옥 씨가 현정이를 달래 본다. 하지만 금옥 씨가 현정이를 달랠수록 현정이는 짜증이 치솟을 뿐이다.

'이게 뭐야. 시장에서 사 온걸 나보고 입으라고.... 옷 색깔은 왜 이렇게 촌스럽고. 그냥 색깔만 봐도 시장에서 산 거 같잖아. 싫어. 싫어. 수진이는 백화점 드레스 입고, 나는 시장 드레스 입고. 이게 뭐야.'

차마 금옥 씨에게 시장에서 사 온 것이라 입기 싫다는 이야기를 못한 현정은 그저 안 입는다고 말하며 떼가 났다. 콩쿠르 시간이 다가오자 마음이 급해진 금옥 씨는 억지로 현정이에게 드레스를 입혀 버렸다.

"으앙,,, 으앙,., 안 입는다고!!!!!!!! " 참다못한 현정이가 금옥 씨에게 화를 버럭 내며 울기 시작했다.

"현정, 엄마한테 이게 무슨 말버릇이야!" 현정이를 좋게 달래던 금옥 씨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까슬 까슬해. 옷이 까슬 까슬하다고. 그리고 싸구려 같아. 이거 입고 가기 싫어. 엉엉 엉엉" 현정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옷이 입기 싫은 이유를 금옥 씨에게 말해 버린다.


"현정, 엄마는 오늘 네 콩쿠르에 안 갈 거야. 아빠랑 가! 그리고 이렇게 버릇도 없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네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 싸구려 드레스 같다는 현정이의 말에 금옥 씨 가슴이 아려온다. 결국 금옥 씨는 현정이에게 콩쿠르에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엉엉엉,,, 으아아 앙. 엄마, 잘못했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진달래 색 드레스를 입은 현정이가 눈물을 흘리며 금옥 씨 발에 매달린다.

"됐어. 저리 가. 너랑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구나. 콩쿠르에 가든 안 가든 맘대로 해!" 금옥은 현정이가 잡은 손을 뿌리치며 밖으로 나가 버린다.

"엄..... 마... 으앙 엉엉 엉엉...." 금옥 씨가 집 밖으로 나가 버리고 현정이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모른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철이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 보니 현정이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얼굴이 벌게져라 울고 있다. 그리고 금옥 씨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현정아, 무슨 일이야. 엄마는 어디 갔어?" 철이가 묻는다.

"아... 빠. 내가 엄마한테 말실수를 했나 봐요. 엄마는 오늘 콩쿠르에 안 가신대요. 엉엉엉." 현정이가 울면서 이야기한다.

"현정아, 괜찮아. 눈물 닦고 아빠랑 오빠랑 소연이랑 콩쿠르 가자. 그래도 콩쿠르 나간다고 지금까지 열심히 연습했잖아. 마무리는 지어야지." 철이가 조용히 말한다.




"초등 2학년 부 참가번호 3번 현정학생이 연주할 곡은 클레멘티 소나티네 OP. 36. 3 제3악장입니다." 콩쿠르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진달래색 드레스를 입은 현정이 피아노 앞으로 등장한다. 관객들에게 꾸벅 인사를 한 현정은 피아노 앞에 앉는다. 후우 숨을 쉬면서 연주를 시작한다. 현정은 작은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퉁퉁 두드리며 연주에 빠져든다. 학원에서 연습할 때에는 악보를 어떻게 외우나 싶었는데 막상 콩쿠르가 시작되니 작은 손가락이 이미 악보를 모두 알고 있는 듯 자유롭게 피아노 건반을 오간다. 청량한 건반에서 울리는 밝은 멜로디가 관객석에 와서 와닿는다. 모두들 현정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음미하며 음악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때 관객석 뒤편 문으로 금옥 씨가 빼꼼 서있다.

'성질은 저래도 우리 현정이 잘하네.' 진달래 옷을 입고 침착하게 피아노를 치는 현정이를 보면서 금옥 씨 마음도 진달래 색으로 물들어 버린다.

현정이의 연주가 끝나고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진다. 현정이가 피아노에서 일어나 관객석을 보려는 순간 금옥 씨는 현정이가 자신을 발견할까 싶어 서둘러 연주회장을 빠져나간다.


초등 2학년에서 금상을 수상한 현정은 꽃다발과 트로피를 들고 철이와 종호, 소연과 집으로 향한다. 상을 타서 기쁘기는 하지만 엄마 금옥 씨가 보고 싶은 저녁이다. 철이와 아이들이 작은 현관문을 통과해 집으로 들어서자 금옥 씨는 애써 모른 척하며 무관심한 얼굴로 어서 오라고 이야기를 건넨다.

"엄마, 미안해요. 그래도 피아노 잘 쳐서 상 탔어요."

엄마를 본 현정이가 갑자기 터져 나온 눈물을 보이며 금옥 씨에게 와락 안긴다.


금옥 씨의 품 안에 그 무엇보다 귀한 보석이 가득 차 있는 저녁이 흘러간다. 흘러가는 시간이 금옥 씨 마음속에 박힌 찡한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 이미지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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