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거리를 물들이던 봄꽃들이 떨어지고, 빈자리에는 연두색 이파리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봄인가 싶었다. 봄 꽃이 피어나며, 모두들 봄꽃을 닮은 웃음을 지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봄꽃이 지고 거리에 놓인 나무들 사이에 푸릇하게 올라온 아기 잎들을 바라본다. 새싹들을 보니 이게 진짜 봄인가 한다. 모든 것이 꿈틀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다. 겨울 동안 사라져 버렸다며 멀리 날려 버린 새싹 같은 우리들 마음들까지. 두툼한 옷과 얇은 옷들이 함께 거닐던 거리에는 이제 하늘 하늘한 새하얀 옷을 입은 이들만이 상쾌하게 걸음을 걷고 있다. 사람들 옆으로 시험지와 책을 가득 실은 빨간 자전거가 봄바람을 맞으며 지나간다.
"끼익" 금옥 씨의 자전거가 골목길에 멈춰 선다. 금옥 씨는 시험지를 구독하고 있는 그린이네 집 벨을 누른다.
"띵동" 그린이네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 아니 지하방까지 합하면 4층으로 빌라에 살고 있다. 2층집 한편에 달린 갈색 철문이 덜커덩 열린다. 맨발에 삼색 선이 그어진 슬리퍼를 급히 신은듯한 그린이 엄마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계단을 뛰어 내려온다.
"응, 언니. 첫 달 구독했을 때는 잘 몰랐지. 근데 언니가 말한 대로 한 3개월 넘어가니까 그린이 혼자 앉아서 30분 정도 공부하는 습관이 들더라고. 난, 그게 우선 가장 마음에 들었어.... 또 지난번에 샀던 만화로 된 위인전 있잖아. 만화라 그런가, 재미있게 읽고 있어. 화장실 가서도 읽고 그래." 그린이 엄마는 시험지를 구독하고 책을 구입한 결과가 만족스러웠는지 신이 나서 말한다.
"그래, 잘하고 있네.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먼저야. 그리고 만화로 된 책도 재미있어서 그런가 아이들이 계속 읽어. 그렇게 읽다 보면 책 읽는 습관도 들어서 시간 지나면 그냥 책도 찾고 그래. 재미있게 하고 있다니 잘됐다." 금옥 씨는 그린이가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웃는다.
"아, 맞다. 언니. 이번에 소연이 말이야. 글짓기 대회에서 상 받았지." 그린이 엄마가 부럽다는 듯 말한다.
"응, 그러게. 나도 소연이가 글 쓰는 걸 좋아하는지 몰랐어. 일하고 거기다 소연이는 막내잖아. 신경 쓴다고 해도 종호랑 현정이 때 보다 신경을 많이 못써. 그래서 항상 막내한테 미안하지 뭐..." 금옥 씨가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그린이가 그러는데 소연이 이번에 상 중에서도 제일이라는 금상 탔다고 말하더라. 소연이가 글짓기에서 뭘 썼다더라. 그래, 언니 시험지 돌리는 이야기를 썼대. 소연이가 금상탄 글을 수업시간에 친구들한테 읽어 줬나 봐. 근데 그린이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났다고 그러더라고. 시험지 선생님이 그렇게 고생하시는지 그린이도 몰랐대. 소연이도 친구들한테 읽어 주다가 울어버렸다고...." 그린이 엄마가 그린이에게 들은 이야기를 금옥 씨에게 빠짐없이 전한다.
"어쿠... 그렇구나. 사실 나 바빠서 소연이가 쓴 글을 아직 못 읽어봤어. 그래도 현정이랑 종호가 옆에 있으니까 언니 오빠가 어련히 잘 챙기겠지 해서....... 집에 가서 소연이한테 잘했다고 칭찬 좀 해줘야겠네..." 요즘 청약 계약금 문제로 아이들에게 영 신경을 쓰지 못했던 금옥 씨라 소연이에게 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응, 언니. 그리고 소연이 글쓰기에 재능이 있을지도 몰라. 학원도 알아보고 그래. 어릴 적 재능은 잘 키워줘야 한다고 하잖아." 그린이 엄마가 한마디 더 덧붙인다.
"고마워. 아참, 나 배달이 더 남아서 말이야.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 아직 배달이 한참 남아 있음을 깨달은 금옥 씨가 자전거 위에 폴짝 뛰어오른다. 잘 가라는 그린이 엄마를 뒤로 하고 다음 배달지로 향한다. 엄마를 생각하며 글을 썼다는 막내의 동그란 얼굴을 떠올리며 금옥 씨는 좁은 골목길을 힘차게 빠져나간다.
'휴, 이제 반정도 돌렸네. 집에 가서 간단하게 점심 먹고 가야겠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정오가 훌쩍 넘었다. 새벽에 집에서 나와 편의점에서 간단히 먹었던 우유랑 크림빵이 전부인 금옥 씨 배에서 이제는 밥을 좀 달라고 아우성이다. 집에 들러 점심을 먹어볼까 싶어 자전거 방향을 집으로 돌린다. 금옥씨네 집은 오금동에 나 있는 여러 골목길 중 작은 골목길 왼편에 위치해 있다. 금옥씨네 집 문을 나서면 바로 앞에는 작은 슈퍼와 사천리 부동산이 있다. 내리막길을 지나 집으로 향하려는데 사천리 부동산 사장님 부부가 가게 앞에서 손을 흔들며 금옥 씨를 불러 세운다. 사천리 부동산은 박사장과 김사장이 함께 운영하고 있다. 박사장과 김사장은 부부다.
부동산 사장님 부부와 금옥 씨는 오금동으로 이사 오면서 인연이 닿게 되었다. 오금동에 대해 아니, 서울에 대해 전혀 몰랐던 금옥 씨는 새로운 전셋집을 구하기 위해 사천리 부동산에 들어섰다. 금옥 씨 사정을 들은 사천리 부동산 사장님 부부는 없는 살림에 3남매를 열심히 키우는 금옥 씨를 기특해하며 다른 누구보다 열심히 전셋집을 알아봐 주셨다. 그렇게 금옥씨네는 오금동 빨강 지붕이 있는 지하에 위치한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
박사장은 종호, 현정, 소연이를 유독 귀여워하며, 아이들이 길에서 놀고 있을 때면 이리 오라고 말하며 금옥 씨 몰래 용돈을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그런 사장님 부부의 마음씀을 잘 알고 있던 금옥 씨는 맛있는 음식을 할 때나, 김장을 할 때면 항상 삼 남매에게 사천리 부동산에 음식을 가져다 드리라고 심부름을 보내곤 했다. 금옥 씨가 시험지 일을 시작했을 때에도 아이들이 이제 많이 컸으니 열심히 일해 보라고 응원하던 박사장과 김사장이다. 그들은 반짝이는 서울 풍경 아래서 외롭고 쓸쓸하게 움츠리고 있는 금옥 씨가 서울에 와서 만난 친척보다 더 정겨운 이웃사촌이었다.
"종호엄마! 종호엄마! 잠깐만요." 금옥 씨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 못 들을까 싶었는지 사천리 부동산 사장님 부부는 손으로 나팔을 만들며 큰 소리로 금옥 씨를 부른다. 사천리 부동산 사장님이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금옥 씨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자전거를 세운다. 자전거를 끌고 부동산 앞으로 향하는 금옥 씨가 웃으며 인사를 한다.
"사장님들, 안녕하세요. 날이 좋네요. 식사하셨어요. 왜 나와 계시는 거예요?"
"종호엄마, 많이 바쁘지? 밥은 먹었어?" 둥글한 얼굴에 서늘한 인상을 가진 김사장님이 웃으며 묻는다.
"저는 점심이 좀 늦었어요. 이제 집에 들어가서 먹으려고요." 금옥 씨가 말한다.
"오, 마침 잘됐네요. 종호엄마, 우리도 지금 점심 먹는데 밥이랑 찬이 좀 넉넉해. 와서 같이 먹고 가요." 김사장과 박사장이 사양 말고 들어오라 말한다.
"아니에요. 집에 가서 어서 먹고 가면 되는걸요." 괜히 신세를 지는 것 같았던 금옥 씨가 괜찮다고 손사래를 친다.
"종호엄마, 진짜예요. 오늘 싸 온 점심 도시락 양이 너무 많아. 우리 둘이 먹기에 너무 많아서 그래요. 그리고 종호엄마한테 할 이야기도 있고요." 김사장님이 금옥 씨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어깨를 떠민다.
"저한테요? 네. 알겠어요. 그럼 신세 좀 질게요." 금옥 씨가 웃으며 마지못해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부동산 문 안으로 들어서자 20평 남짓한 공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게 안에는 손님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마련된 검은색 낡은 6인용 소파와 원목 테이블이 눈에 띈다. 그리고 그 너머로 김사장과 박사장의 책상과 컴퓨터가 사이좋게 놓여있다. 일을 하다가 점심을 먹으려 했는지 김사장과 박사장 책상 위에는 하얀색 두툼한 서류들이 아직 가득하다. 부동산 문을 연지 벌써 15년이 넘어 가지만 말끔한 김사장 성격 덕분에 가게 안은 항상 말끔한 느낌을 풍긴다. 김사장과 박사장은 부동산이 있는 건물의 주인으로 1층은 부동산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3층에는 김사장과 박사장이 살고 있는 집이다. 둘은 보통 집으로 올라가 점심을 먹기도 하고 일이 바쁜 이사철에는 집에서 음식을 싸와 1층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는다.
"우리는 오늘 매콤한 제육볶음을 싸왔지. 거기에 상추까지 말이야." 김사장님이 음식 소개를 하며 전기밥솥으로 가서 밥을 푼다. 밥그릇에 떨어진 하얀 밥에서 올라오는 모락 모락 한 김과 매콤해 보이는 제육볶음을 보니 금옥 씨 입에 침이 고인다.
"꿀꺽. 우와. 정말 맛있겠어요. 감사히 잘 먹을게요." 금옥 씨가 웃으며 말한다.
박사장, 김사장, 금옥 씨 세명은 까만 소파에 널찍히 둘러앉아 밥을 먹기 시작한다. 금옥 씨는 깨끗이 씻은 손 위에 상추를 올린 후 상추 위에 밥과 매콤한 제육볶음, 그리고 편마늘까지 야무지게 넣은 쌈을 입에 넣는다.
"와사삭" 싱싱한 상추와 그 안에 있는 제육볶음과 고소한 밥까지 합쳐져 맛있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유난히 배가 고파서였을까. 금옥 씨 입안으로 다디단 상추쌈이 스르륵 넘어간다. 그렇게 몇 번의 상추쌈이 와사삭 소리를 내며 금옥 씨 입안으로 꿀꺽 소리를 내며 들어간다.
"종호엄마, 다른 게 아니라 지난번에 청약 당첨 되었잖아요. 계약금은 잘 마련했어요?" 박사장님이 상추쌈을 정신없이 먹고 있는 금옥 씨에게 묻는다.
"그게...." 금옥 씨는 상추쌈을 먹다 말을 잇지 못한다.
"왜요? 아직 계약금 다 못 구한 거야?" 김사장님이 안타까운 눈빛을 하며 말한다.
"네. 그게 청약 계약금이 9,000만 원인데 아직 5,000만 원이 부족해요. 서울 사는 종호아빠네 형님댁도 찾아가봤는데 안될 것 같아요. 그냥 프리미엄 받고 팔라고만 하시네요. 이제 청약 계약금 납입까지 15일 남았는데....... 형님댁에서 하는 말처럼 팔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금옥 씨가 축 늘어진 목소리로 말하며 젓가락을 놓는다.
"흐음.. 그렇네. 근데 박사장이 알아봤는데 말이야. 종호엄마. 이번에 당첨된 곳 말이야. 놓치면 앞으로 기회가 없을 거야. 가능하면 어디라도 돈을 구해서 계약금 납입했으면 좋겠어서 말하는 거야." 김사장이 말한다.
"네... 저한테도 이런 기회가 올 줄 몰랐는데요. 해보는 데까지 해보려고 했는데 딱히 수가 없어요." 금옥 씨의 따뜻한 밥이 금옥 씨 마음처럼 점점 식어간다.
"음.. 종호엄마. 오해하지 말고 들어. 기분 나빠하지도 말고. 사실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종호네에 3,000만 원을 빌려주고 싶어서 말이야." 박사장님이 한참 금옥 씨를 바라보다가 말한다.
"네? 저희한테요? 아니에요. 사장님." 갑작스럽게 돈을 빌려준다는 사장님 부부의 이야기를 들은 금옥 씨가 손사래를 친다.
"그게, 종호엄마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근데 이 동네 사람들 모두 잘 알고 있거든. 종호엄마랑 종호아빠랑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거 말이야. 물론 누구나 열심히 살겠지만, 음... 뭐랄까. 종호네를 보면 우리도 힘이 들었다가 종호네 새벽에 나가서 일하고 또 밤늦게 들어오는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 그냥 힘을 많이 얻어. 종호엄마도 혹시 살면서 그냥 보는 것 만으로 힘이 되는 사람이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호네는 우리한테 그랬어. 또 우리가 이렇게 인연이 되어서 종호엄마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줄 수 있어 감사한 일이고..." 김사장이 금옥 씨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사장님." 금옥 씨는 그래도 그건 안 되겠다며 김사장님의 제안을 거절한다.
"종호엄마, 그러지 말고. 우리 이야기 들어봐. 그냥 준다는 것은 아니고 나중에 갚을 거니까. 잠깐 빌려간다고 편히 생각해." 박사장이 말했다.
"네.. 사장님들 감사해요. 그럼 차용증 쓰고 빌려가고, 이자도 꼭 갚을게요." 금옥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종호엄마, 왜 이래. 차용증 쓰고 빌려줄 거였으면 이렇게 빌려준다는 이야기도 안 했을 거야." 김사장이 웃으면서 말한다.
"그래도..... " 금옥 씨가 말을 잇지 못한다.
"지난번에 전셋집 구할 때 종호엄마 계좌번호 내가 가지고 있는 거 있어서 말이야. 거기로 오늘 아침에 3,000만 원 보내놨어. 나중에 은행에 가서 확인해 봐. 먼저 입금하고 지금 이렇게 말해서 미안해요. 이렇게 안 하면 종호 엄마가 안 받을 것 같아서 그랬어. 그리고 나머지 2,000만 원도 곧 구해야 할 텐데 말이야." 박사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네? 제 통장으로 이미 입금하셨다고요?" 금옥 씨는 박사장 말에 할 말이 없어진다.
"그래, 종호엄마. 어서 밥 따뜻하게 먹어. 어서. 이거 배불리 먹고 다시 일하러 가야지." 김사장님이 어서 먹으라며 손짓하며 말한다.
당황한 금옥 씨는 박사장과 김사장이 권유하는 상추쌈을다시 한입 한입 먹기 시작한다. 달콤하면서 매콤한 제육볶음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입안으로 쏟아지는 고소한 밥알과 매콤한 제육볶음에 싱싱한 상추 맛까지 합쳐져 이 세상 맛있는 것들이 입안에 가득 찼지만 금옥 씨 마음은 그게 아니다. 금옥 씨의 입안으로 어떠한 맛도 느껴지지 않고 정체를 알수 없는까슬한 것들이 지나가고 있다. 까슬한 것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찝찝한 흔적들이 남아 금옥 씨의 마음을 쿵쾅 쿵쾅 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