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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도 하는 변호사 Mar 30. 2024

봄날의 기억

2024년 달력 속 숫자는 어느덧 3월 끝자락을 향해 달리고 있다. 요 며칠 추적추적 내리던 봄비가 그쳤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고개를 내밀던 날, 도도와 오랜만에 동네 산책에 나섰다. 집에만 있다가 밖에 나가게 되었다며 신난 강아지처럼 좋아하는 도도를 바라보해맑은 그 얼굴에 웃음이 저절로 나오고 말았다. 밖으로 나오니 맑은 공기가 우리의 볼을 스친다. 공기가 제법 부드럽고 따스해졌다.


꽃이 피었을까 싶어 고개를 들어 출입문 옆 화단에 심어진 벚꽃나무를 쳐다보았다. 꽃봉오리가 맺힌 것도 있고 이미 꽃망울을 힘차게 터뜨린 벚꽃 눈에 들어온다. 봄이 왔구나. 이제 머지않아 커다란 벚꽃나무 가지가지에 달려있는 꽃망울에서 옅은 분홍색 꽃을 시원하게 피워낼 것이다. 생각만으로 따뜻한 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언제부터인가 봄을 기다리기는 사람이 되었다. 봄에 수없이 많은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나뭇가지에서는 싱그러운 연두색 잎이 솟아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생명꿈틀거림 느끼게 된다. 생명의 숭고함이란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며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바쁜 사계절을 살아내느라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그러다 봄이 되 생명 또다시 푸릇푸릇 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잊고 있던 너와 내가 살아있음을 다시 기억하게 다.


이미 쑥 커버린 어른들에 비해 아이들 생명의 시작점과 조금 가까운 존재여서 그럴까.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봄이 생각난다. 봄이 자라나는 아이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봄을 관찰할 기회도 없었음은 물론이고 봄에 큰 관심이 없었다. 낮에는 회사에,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던 일상 속에 살 내게 봄은 너무도 짧은 계절이자 존재감 없던 시간이었다. 봄이 왔다는 이야기는 듣고, 봄이 왔나 보다 하다, 결국 봄을 만나지 못한 채 여름을 맞이했다.


그런 나는 3년 전 도도를 만났고, 도도와 세 번째 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도도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봄이라는 계절 속에서 생명이 살아나는 모습들을 조금은 자세하게 다정스러운 눈빛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도도와 놀이터에 앉아 매일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눈앞에 펼쳐진 봄의 전경들이 조금씩 변하는 모습을 매일 바라보고 또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천천히 한 땀 한 땀 뜨개질 하는 사람을 바라보듯 봄을 관찰하게 되었다.


봄은 항상 소리 없이 찾아왔고, 그 속에서 의기양양하게 꽃을 야금야금 피워냈다. 그러다 머지않아 그 꽃이 떨어뜨리고 꽃이 떨어진 자리에 연둣빛 이파리를 내어 놓았다. 그리고는 여름이라는 계절에 자리를 내주고 떠나갔다. 그렇게 봄이 찾아오는 시간은 순간적인 반면 그 순간들은 생각보다 느릿느릿 하염없이 흘러갔다.  그런 모습 때문일까. 나는 어느덧 봄을 좋아하고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다. 과거 어느 한순간 봄을 좋아했던 때가 있었다.  




대학교 2학년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1년 재수를 하고 대학교에 들어다. 원하는 대학교에 가고 싶어 재수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원하는 대학교에 가지 못했고, 나점수에 맞춰 대학교에 들어갔다. 칙칙하고 어두웠던 재수학원과 달리 대학교 캠퍼스는 참으로 청량해 보였고 패기에 가득 차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나의 오해였다. 대학생이 되어 그 속으로 성큼 들어가니 새파란 청춘이라는 대학생 타이틀만 달았을 뿐이었다. 이미 동기와 선배들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4년 후 들어갈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해 열심히 학과 시험을 준비하고, 또 무엇인가를 공부하고 있었다. 새내기의 기분을 느껴보기도 전에 나 역시 그들과 같이 집, 강의실, 도서관만 왔다 갔다 하면서 대학교 1학년을 보내게 되었다.


법과대학에 다녔었는데 법과대학 건물은 학교 광장 옆에 위치해 있었다. 커다란 학교 정문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옆으로 길쭉한 벽돌 건물이 있고, 그 옆에 작은 법과대학 건물이 있었다. 법과대학 건물에 들어서기 위해 걸어가야 하는 일자로 된 길 중앙에 커다란 벚꽃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벚꽃나무의 키는 천연기념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컸으며 밑동도 아주 두툼한 나무였다.


봄이 되면 커다란  법과대학 벚꽃나무에서는 화사한 벚꽃들을 수없이 피워내며 커다란 꽃그늘을 만들었다. 그 벚꽃이 풍기는 향기는 벚꽃나무 크기만큼이나 강렬해 대학교 전체를 감쌀 정도로 은은히 퍼져 나갔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봄에 반사된 수많은 벚꽃잎으로 법과대학은 봄만 되면 멀리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우리는 그 벚꽃나무를 왕벚꽃나무라고 불렀다.


하지만 법과대학에 다니는 학생 중 대부분은 벚꽃나무를 즐기지 못했다. 아니, 즐길 수가 없었다. 이유는 왕벚꽃나무에서 수없이 꽃을 피워내며 자태를 뽐낼 때면 항상 법과대학은 중간고사 기간 중으로 시험 준비에 모두들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그러했다.


동기들이며 선배들이며 벚꽃이 만개해 반짝이고 있을 때에도 모두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 역시 그 분위기에 휩쓸려 다소 우울한 마음으로 1학년을 보냈다. 그러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무엇이 그렇게나 바빴는지 나는 법과대학 건물 앞에 그렇게 커다란 벚꽃나무가 있는 줄도, 봄이면 어여쁜 꽃을 피워 내는지도 모르는 채 대학교 2학년이 되었다.


그날도 4월 초를 조금 지난 봄날이었다. 중간고 기간이 시작되면서 법과대학 학생들 모두 시험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저녁잠 많았던 나는 일찍 자고 새벽에 학교 나와 공부를 했다. 지하철 첫차에 몸을 싣고 몇 번의 환승 후 학교에 도착하 새벽 6시 30분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툼한 법책을 안고 학교 정문까지 터벅터벅 걸었다.


 4월 초였지만 새벽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무도 없는듯한 고요한 학교  걷다 보니 어느덧 법과대학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보통 때라면 터덜터덜 건물로 들어갔을 텐데 다른 날과 다르게 그날은 왜 하늘을 올려다보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고개라도 들어 답답한 마음을 벗어던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고개를 들고 보니 아직은 새벽하늘색을 띠고 있는 진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때 진한 새벽 파란 하늘 아래로 수없이 많은 해사한 벚꽃들이 내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새벽하늘과 그 새벽하늘 아래 놓여있는 하얀 벚꽃들을 보고 있으니 괜히 가슴이 먹먹해왔다. 그렇게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 있다 점심시간 후에 있을 시험 생각 서둘러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새벽부터 고개를 숙이고 강의실 옆 휴게실에 앉아 오후 1시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친한 동기 민지도 옆에서 예상 답안지를 외운다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퀭한 눈에 까치집을 한 친구의 머리에 괜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였다. 신문사 동아리 선배가 휴게실 앞을 지나가다가 나를 보더니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현정, 밖에 벚꽃 봤니?" 선배가 답안지를 외우고 있는 내게 물었다.

"네, 아침에 들어오면서 봤어요. 그런데 저 있다가 시험이라서요." 있다 시험인데 생뚱맞게 무슨 벚꽃이냐는 표정으로 내가 말했다.

"흠. 시험도 중요하지. 그런데 이제 저것도 지금 아니면 못 볼걸." 선배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에 보면 돼요.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다음? 그런데 네가 말하는 다음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아. 현정아, 10분만 나가서 보고 오자. 지금 햇살에 비친 벚꽃이 정말 예쁘거든." 선배가 그래도 지금은 꼭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시험지를 보며 건성건성 대답을 하고 있던 나는 선배를 바라보았다. 새벽하늘에 만난 벚꽃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선배 말처럼 잠깐 10분 보고 오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지야, 너도 같이 갈래?" 까치집 머리를 하고 있는 민지에게 물었다.

"아니, 선배랑 둘이 다녀와." 민지가 답안지를 외우며 성의 없어 말했다.

그렇게 나는 선배와 잠시 밖으로 나가 웅장하게 서있는 왕벚꽃나무를 보았다.  햇살과 왕벚꽃나무에 달린 수없이 많은 꽃잎이 만나 반짝이는 광경이 너무나 멋져서 10분 넘게 멍하니 왕벚꽃나무를 바라보았다. 


입학하고 왕벚꽃나무에서 사진 한번 찍어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선배언니는 나를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사진찍어 주며 말했다.

"현정아, 시험도 중요하지만 지금 볼 수 있는 좋은 것들도 함께 보면서 이 시간들을 보내. 네가 원하는 다음은 생각보다 쉽게 오지 않아."

따뜻한 햇살 아래 살랑이는 바람에 조금씩 흩날리는 벚꽃 잎. 그리고 햇살에 반짝였던 왕벚꽃나무는 그렇게 유일한 봄날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선배의 말처럼 그 이후에도 난 계속 바빴고, 한가하게 서서 왕벚꽃나무를 볼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날의 기억만을 남긴 채 대학을 졸업했다. 심지어 바빠서 졸업식도 가지 못했다. 그날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가 왕벚꽃나무를 보여준 선배를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의 멋진 순간은 지금이 아닐까. 우리가 말하는 그다음 멋진 순간은 생각처럼 쉽게 오지 않았다.



"엄마, 꽃잎이 예뻐요." 도도가 환하게 피어난 벚꽃 잎을 바라보며 말한다. 도도는 작년에도 봤던 벚꽃이지만 마치 처음 보는 벚꽃처럼 나무 위에 피어난 꽃들을 보고 또 본다.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다며 안아달라고 말한다. 도도를 푹 안아 위로 올려 벚꽃나무에 가까이 닿도록 도와주었다.

"엄마, 가까이에서 보니 더 예뻐요. 우와, 예~쁘다." 하얀 벚꽃 잎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탄성을 지르는 도도를 바라보다 선배가 했던 그 말을 떠올다.

"현정아, 다음에 볼 수 있을 것 같아도 그다음은 생각보다 잘 오지 않아."

봄을 닮은 도도를 보며 생각한다. 도도와 함께하는 반짝이는 이 시간 역시 흘러가면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조금은 더 이 순간을 마음에 담아두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시간이 흘러 선배와 보았던 왕벚꽃나무의 자태를 추억하듯이 도도와 함께 벚꽃을 보며 좋아하던 그 순간을 추억할 그날을 위해서. 그때 역시 이 날의 기억을 꺼내 들며 빙그레 미소 짓고 있을 나를 떠올린다.  

그런 기억을 가질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연재가 많이 늦어졌습니다. 죄송한 마음입니다. ^^;;  

이번 주부터 여기저기 예쁜 봄꽃들이 피어난다는 소식이 들리네요. 모두들 편안하고 행복한 봄날 보내시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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