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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도 하는 변호사 Apr 04. 2024

마음 산책

해가 뜨기 시작하고 머리와 눈으로 세상 복잡한 정보가 쉴 새 없이 흘러들어온다. 저녁이 되면 온몸에 흡수된 조한 뉴스들 뒤섞여 잡념이  곧 터질듯한 풍선처럼 부풀어 있다. 마음만 바쁘고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때면 운동화를 신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산책할 때가 온 것이다.


사전에서는 '산책'에 대해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이라 말다. 산책을 마치고 나면 긴 휴식을 취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고 머릿속이 맑아진 기분이 느껴진다. 산책을 시작하는데 별다른 준비물은 필요 없다. 그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몸을 일으켜 집을 나설 용기와 편안한 운동화 한 켤레가 전부일 것이다. 그렇게 집을 나서 이곳저곳으로 자유롭게 걷다 보면 복잡하고 침울한 듯한 기분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다 보면 몸 안에 엉겨 붙어 있던 걱정거리, 여러 가지 생각 부스러기가 바람에 날아간다. 산책만으로 마음에 엉겨있는 묵직한 짐들을 모두 떨쳐낼 수는 없지만 조금이나마 잡념들을 떨쳐내고 나면 쿰쿰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거기에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이라면 고민하지 말고 산책에 나서야 할 때이다. 해가 쨍쨍하지 않고 시원한 바람이 살며시 불어오는 그런 아침 혹은 달이 떠있는 느지막한 저녁. 그런 날에는 몇 시간이고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발걸음이 더해갈수록 느린 걸음이 더해져 기분 좋 숨이 턱 위까지 차오르고 땀도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할 때면 이것저것들로 칠해진 마음이 어느 순간 말끔해져 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맑게 비워 주는 산책을 좋아한다. 혼자라도 좋고 둘이라면 더 좋은 그런 마음 산책.




예전에는 혼자 유유히 산책하는 날이 많았다. 낯선 지역으로 자주 이사 다니다 보니 같이 산책할 이웃도 마땅히 없었다. 남편과 함께 산책을 하자니 아쉽게도 서로 걷는 리듬이 조금 달랐다. 걷기를 잘하고 오랜 시간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다소 느린 걸음으로 짧은 거리 산책을 좋아했다. 그렇다 보니 그냥 혼자 훌쩍 산책 나갈 때가 많았다. 이야기 상대가 없어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혼자 한가로이 걷는 산책도 좋았다. 빠른 걸음으로 동네를 거닐며 이번에 이사 온 동네는 이렇게 생겼구나, 벌써 꽃이 폈네. 어느덧 꽃이 졌네, 저 집에 빵집이 새로 생겼네 감탄하는 생각들과 함께 하는 이런저런 구경들도 산책에 재미를 더해 주었다. 지나가는 사물과 사람들을 생경한 마음으로 바라보다 보면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그렇게 혼자 산책을 즐기던 어느 날 나에게도 산책 친구가 생겼다. 그 친구는 걸음이 아주 느리며 귀여웠다. 지나가면서 보이는 것들을 대충 둘러보던 나와 다르게 사소한 것까지 아주 찬찬히 공들여 가며 바라보았다. 거기다 산책을 나설 때 목적지를 정했더라도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 도달해 있는 경우가 많은 날을 차지했다. 그 친구는 산책 중에 내가 평소 생각하지 않는 아주 사소한 사실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답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르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우리의 산책은 그의 엉뚱함과 발랄함에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산책 친구를 만나기 전에는 산책을 할 때 조금 땀이 날듯이 빠르게 걷는 것을 좋아했고, 목적지를 정하고 오랜 시간 걷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어느 순간 나를 느린 산책가로 바꾸어 놓았다. 그 친구는 우리 집에 사는 작은 아이 도도다. 도도는 집에서 놀다 심심해지면 "엄마, 산책가요."라는 말을 던지고, 그렇게 그날의 산책이 시작된다. 날이 좋은 날에는 하루에도 여러 번 동네 산책을 떠난다. 그런 날이면 함께 여유로운 산책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넉넉해져 온다. 화창하게 맑은 하늘 아래로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끼며 우리 앞에 주어진 길을 함께 천천히 거닌다. 그 어떤 시간보다 달콤하며 청량한 시간이 된다.


도도와 산책을 나설 때면 마음속에 기다림과 느긋함을 품고 길을 나선다. 작은 친구에게 이 세상은 보통 신기한 것들 투성이다. 푸른 하늘 위로 떠다니는 하얀 구름, 봄 꽃 사이를 팔랑 거리며 날아다니는 노랑나비, 그리고 딛고 있는 땅 위의 작은 흙더미까지 모두 새로운 것일 테니. 도도와 산책을 나가면 혼자서 10분이면 다녀올 거리도 한 시간이 넘어갈 때가 많다. 도도는 몇 걸음 걷다가 옆에 피어 있는 빨간 꽃을 보고, 저 꽃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내 대답만으로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 것인지 가까이 다가가 꽃에 얼굴을 대보기도 하고 이파리를 한참을 만지작만지작 거린다. 그리고 다시 몇 걸음을 뗀다. 또다시 정원수로 심어 놓은 나무에 달린  빨간 열매를 발견하고는 빨간 열매 몇 개를 슬며시 따본다. 그리고는 "엄마 선물."이라며 내 손에 빨간 열매를 꼭 쥐어주고 다시 길을 떠난다. 또 몇 걸음 걷다가 땅에 떨어진 하얀 비비탄 총알을 발견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자그마한 손으로 비비탄 총알을 낑낑거리며 집은 후 또다시 나를 보고 빙긋 웃는다.


"자, 엄마 선물."


도도와 산책할 때 앞서 걸어가는 도도를 뒤에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작은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누구보다 열린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것 같다. 아이였던 어른들이 자라 당연하게 여겨온 사소한 것들에 다시 눈빛을 주고 그들에게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작은 것들에게도 이름이 있고, 왜 그렇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너무 커다란 것에, 그리고 반짝이고 유명한 것에, 오로지 나 자신에게 유난스럽게 조명을 비춰가며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든다. 세상을 조금 느리게 보는 작은 친구와의 산책은 정신없는 세상을 따라가려 조바심 내는 내 마음을 다독여 준다.




우리의 산책에는 목적지가 없다. 사실 도도와 집을 나설 때 우리 오늘은 어디까지 산책을 다녀오자고 이야기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곳을 거닐다 집으로 돌아온다. 내가 마음에 품고 있던 목적지는 나 혼자 정한 목적지일 뿐 도도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세상을 즐기고 탐구한다. 그런 아이 마음에는 지침이 없다.


몇 년 전 대전에 있는 작은 산으로 등산을 간 적이 있었다. 작은 산이었지만 산길이 조금 험했고, 같이 간 동료들은 지쳐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가야 정상에 도착하느냐는 이야기만 서로 주고받으며 찡그린 얼굴로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그때 위에서 내려오던 등산객의 대화가 들려왔다.


"언니, 우리 정상까지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우리 충분히 즐겁게 등산했으니까. 그랬으면 된 거야."


지금껏 충분히 즐거운 등산이었다면 된 거라고 말하며 빙그레 웃는 등산객의 말이 내 귓가를 때렸다. 등산을 할 때 이왕 산에 왔으니 정상까지 꼭 가야 하는 것이라 당연히 생각했었는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공기를 마시며 푸르른 숲 속을 얼마나 즐기면서 등산을 했는가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산에서 마주친 등산객이 준 깨달음처럼 산책하는 도도를 보고 있노라면 아이는 산책 그 자체를 즐기고 있다. 그래서일까. 도도와 함께하는 산책은 편안하고 명랑하다.


오늘도 나는 도도와 산책을 나선다. 작고 보드라운 손이 주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함께 길을 걷는다. 예전에는 빠른 걸음으로 이 세상을 걸어 내느라 지나쳤던 자그마한 풀, 오밀조밀 걸어가는 새카만 개미 무리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와 꽃가지 무심했던 내가 그간 놓쳤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주위에 이렇게 많은 자연 친구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한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며 엘리베이터에서 사춘기 소녀와 소녀의 엄마를 만났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듯 뾰로통해져 있는 딸을 보며 소녀의 엄마가 도도를 보며 말한다.

"지금이 제일 좋을 때예요."

도도 역시 사춘기 소녀처럼 훌쩍 클 때가 올 것이다. 아직은 그때가 까마득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때는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도도를 뒤로한 채 예전처럼 홀로 산책길을 거닐고 있을 것이다. 지금 마음속에 쌓아 놓은 도도와의 좋은 추억을 회상하며 느리게 산책하는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오늘도 우리 산책길 돌틈에는 노란 민들레가 해사하게 고개를 내밀고, 하늘 위에는 봄구름이 산들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 연재일 보다 늦게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 틈틈이 글을 쓰고 수정하다 보니 조금씩 늦어지네요. 그래도 가능한 한 주에 2개씩 글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금옥 씨의 일기도 곧 발행 예정입니다(주말쯤.. ^^). 편안하고 즐거운 봄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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