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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도 하는 변호사 Apr 24. 2024

다정한 기다림

이 세상 여행을 막 시작한 것 같았던 도도는 이제 지구여행 3년 차에 접어들었다. 처음 세상에 나와 이곳이 어디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던 아이는 세돌즈음이 되자 그 누구보다 힘차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이 세상을 탐험하고 있다. 오늘도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 푸른 잔디밭을 끝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 나는 항상 아이가 나에게 무언가를 배우며 자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발상은 세상을 조금 더 살아온 엄마인 내가 어린아이 보다 세상을 조금 더 잘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나는 자라나는 아이에게 지금까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들을 가르치려 노력했다.     


지켜야 하는 것들, 하면 안 되는 것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말이 점점 많아졌다. 그런데 말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결과적으로 일이 복잡하게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또 내가 옳다고 생각하며 아이에게 알려준 것들이 반드시 정답이 아니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나는 기다림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땅속에 씨앗을 심으면 땅 위에 새싹이 나고 그 새싹은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된다. 농부는 씨앗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가지가 잘 자라도록 길을 잡아줄 뿐 열매에게 모양을 바꾸라고 하거나 지금 네가 맺고 있는 꽃과 열매의 색이 마음에 안 드니 다른 색으로 바꿔 보라며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그저 따스한 햇살과 양분이 되는 사랑을 부어주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싹을 기다리고, 기특한 눈빛으로 새싹을 바라볼 뿐이다.     


이러한 농부의 마음에는 다정한 기다림이 있다. 앞으로 네가 가진 고유한 모양으로 멋지게 자라날 것이라는 견고한 믿음이 깔려있다. 너무 애쓰지 않지만 언제나 따뜻하고 편안함을 유지하는 농부의 마음을 보고 있으면 그 마음을 닮고 싶어 진다. 아이에게 가진 사랑이 너무 티 나지 않고 그저 본연의 모습대로 아이에게 편안하게 스며들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엄마의 마음을 지니고 싶어 진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조급해지고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이 온다. 이제 그만 기다림을 멈추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냥 내 손으로 해결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온몸 구석구석을 맴돌기 시작한다. 아이를 기다리는 일에서는 그 마음이 더욱 바삐 움직인다. 그런 복잡 미묘한 마음들은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방해하고 그 순간 속에 반짝이는 행복감들을 자취도 없이 감추어 버린다.     


아이를 기다려 주는 마음을 닮고자 하다가도 내가 생각했던 아이의 모습과 실제의 모습이 다름을 발견할 때면 혹시 내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을까 싶어 불안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초보 엄마시절 도도의 낯가림과 겁이 많은 성격은 나에게 꽤나 큰 걱정거리로 다가왔다. 도도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한 가지 일에 오랜 시간 집중하고 섬세한 기질을 기진 아이였다. 때문에 새롭고 낯선 것을 발견하면 충분한 시간 동안 관찰을 한 후, 그것이 안전하다는 확신이 든 후에 야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시도한다. 그런 도도에게는 기다림이 반드시 필요했다.     


도도의 그런 기질은 도도가 두 돌이 되었을 즈음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도도가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다른 아이들처럼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탐구하길 내심 바랬었던 것 같다. 또 새로운 사람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대했으면 했다. 하지만 도도는 새로운 것을 만나고 친숙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처음 해보는 육아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낯을 가리고, 새로운 곳에 가면 엄마 껌딱지가 되어 버리는 도도를 보며 내 육아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고, 나도 모르게 자책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뒤돌아보면 도도 기질상 그저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해 여름 도도와 둘이서 서울에 사시는 외할머니댁에 놀러 갔다. 외할머니댁에 어떤 행사가 있어서 먼 길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낯가림이 있고, 새로운 것에 무서움이 많은 도도의 모습을 보며 도도가 평소에 엄마랑 둘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심정 때문이었다. 그래도 친정에 가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외삼촌, 외숙모까지 조금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그것이 아이의 낯가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도도와 서울 길에 올랐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전혀 달리 외할머니댁에 도착한 도도는 겁에 질려 있었다. 외할머니댁에 도착한 도도는 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여기는 낯설고 무서우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집을 비우실 때에는 마음이 놓였는지 다소 안심하는 눈치였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시면 곧바로 엄마 껌딱지가 되어버렸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도도가 예뻐서 안아보려 했지만 도도의 시간에서 아직 친숙한 범위에 들어서지 못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도도는 "싫어요!"를 외쳤고, 엄마 등 뒤로 쪼르르 뛰어와 숨어 버렸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도도를 지켜보신 어머니, 아버지는 도도가 너무 엄마랑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린이집에 보내 보는 게 어떻겠냐며 조심스럽게 제안하셨다. 지금까지 도도를 기다려 주며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뛰어놀게 하면 그저 잘 클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도도와 시간을 보내왔었는데 이제와 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두 돌이 된 도도는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 어린이집에 가게 되었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어린이집 입구에서 우는 도도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도도는 어린이집에 갈 때마다 어린이집에 가는 것을 무섭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었다. 하지만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상당히 컸던지 도도는 바이러스 감염이라고 하기에는 수도 없이 아팠다. 결국 남편과 나는 도도가 단체생활을 할 준비가 될 때까지 그냥 집에서 마음이라도 편하게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도도의 사회성 기르기 프로젝트는 2달 만에 막을 내렸다.      


도도는 이전과 같이 나와 둘이 동네 여기저기를 산책하기도 하고 버스를 타고 놀러도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어느덧 아기 같았던 도도가 세돌을 맞이했다. 도도와 나는 외할머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 갈 일이 생겼다. 서울로 가기 전 도도에게 서울에 같이 갈 것인지 물어보자 도도는 흔쾌히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울로 향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더 이상 겁에 질려 엄마 뒤로 숨던 도도의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엄마를 찾는 것은 여전했지만 엄마 없이도 혼자서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도 놀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할머니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두 모였을 때였다. 도도의 이모가 도도에게 말했다.

"도도! 노래 한 곡 불러볼래?"

도도는 평소 집에 있거나 산책을 하면서 함께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노래를 불러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 역시 도도가 이모의 요청에 따라 노래를 부를 것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내 옆에 서 있는 도도를 자세히 바라보니 노래를 불러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 짙어 보였다. 도도가 숨을 한번 고르더니 작은 두 손을 배에 곱게 모았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서쪽하늘에서도 동쪽 하늘에서도 아름답게 비치네."

가족 모두 도도 노래가 끝나자 우레와 같이 박수를 보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 스스로가 뿌듯한지 도도가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활짝 웃는 도도를 꼭 안아 주었다.     


서울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며칠 후 도도와 시립 미술관을 방문했다. 미술관 3층에서는 어린이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움직이는 조각으로 재현하는 양정욱 작가님의 “아이는 아이를 안고”라는 제목의 전시였다. 전시 팸플릿 첫 페이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이는 부모에게서 배운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우리가 반대로 아이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이들을 통해 언제든 아이가 될 수 있다
아이들과 우리는 서로 번갈아 가며 안고, 안기기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아이를 안고, 2024 어린이 기획전시 양정욱, 팸플릿 중>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에는 엄마는 아이를 항상 안아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라는 역할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엄마는 언제까지 그렇게 아이를 안고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경주에 뛰어든 것 같은 막연함을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도도를 만나고 유대관계를 맺어 나가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아이와 부모는 서로가 서로를 번갈아 가며 안아주기도 하고, 안겨 보기를 하면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도도를 만나고 도도와의 시간들 속에서  반짝이는 순간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 순간 속에서 아이에게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깊은 사랑을 배우고 잊고 있던 중요한 마음들을 배워 나간다. 도도가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림이라는 다정한 마음을 배운다. 우리는 아이들을 통해 언제든 아이가 되어 함께 성장하게 된다.


*출처: 울산시립미술관, 아이는 아이를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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