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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도 하는 변호사 Apr 12. 2024

할머니의 마음

시곗바늘이 정오를 가리키고 있을 때였다. 나는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고 도도는 거실에서 자동차 놀이에 빠져 있었다. 평범한 점심을 준비하며 요즘 마음이 불편한 이유를 생각다.

'마음 위로 가시 같은 것들이 뾰족 올라오고 있는 그러지?'

요 근래 마음이 불편한 이유에 대해 스스로에게 었다.  


'봄이라 그런가? 어제 잠이 좀 부족했나? 그것도 아닌데... 기분이 좀 그렇네.' 고기가 지글지글 구워지는 소리 가득한 프라이팬 앞에서 불편한 마음의 원인을 생각나는 대로 짚어보기 시작했다. 프라이팬 안에서는 고소하고 짭짤한 불고기가 노릇한 자태를 뽐내 고소한 냄새까지 풍기고 있었다. 도도 전용 식판에 새하얀 밥을 담고 옆 칸에는 방금 완성된 불고기, 그리고 새콤한 물김치를 담았다.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따뜻한 엄마 밥상이 준비되었다.


"도도야, 밥 먹자." 거실에서 자동차 놀이에 푹 빠져 있는 도도를 불렀다. 작은 목소리로도 충분히 들릴 법 한데 소리 높여 도도를 불렀다. 내 목소리를 들은 도도가 쪼르르 달려온다. 그러더니 투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저는 지금 배가 안 고파서 안 먹고 싶어요."

밥을 먹고 싶지 않다는 도도의 이야기를 듣자 마음에  뾰족한 가시 하나가 다시 푹 솟아올랐다.   

   

"도도야, 점심 식사 시간에는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거야. 어서 먹자." 내가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도도는 지금 밥을 먹고 싶지 않다고 재차 말하며 자동차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버렸다. 식사 시간에 밥을 먹지 않고 노는 아이의 식판은 쿨하게 치워 버리면 된다고 하지만, 밥을 먹지 않겠다는 도도의 모습에 괜한 속상함이 밀려왔다. 마음이 상한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앉아 차려놓은 밥과 불고기를 먹었다. 고기와 밥을 입 안에 가득 넣고 씹고있었지만 머릿속으로 어떻게 아이에게 식사예절을 훈육해야 할 것인가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도도가 내 얼굴을 슬금 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근데 엄마, 화났나요?" 도도의 질문을 듣고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흠칫 놀랐다.

"아니, 엄마 화 안 났는데." 이런 일에 화내는 엄마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가능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도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대답했다.

"응.. 이상한데... 근데 엄마 지금 입 모양에 요래요." 도도는 입술에 힘을 주며 일자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엄마 표정이 지금 이렇다고 재차 말했다.

도도가 내 표정을 흉내 내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뾰족해진 내 마음은 쉽게 풀어질 줄 몰랐다. 여러 생각을 거듭해도 육아 번아웃이라는 단어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도가 세돌에 접어들면서 훈육할 거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기분이 들어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남편은 훈육이 필요하지만 내가 좀 엄격한 면이 있다며 웃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내가 엄격하다고? 천만에.' 라며 남편의 말을 흘려보냈다. 남편은 자라면서 부모님께 혼났던 기억이 없는데 이렇게 잘 컸다면서 다시 웃어 보였다.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요즘 내가 도도에게 자주 했던 말을 생각해 보았다. "도도야, ~하면 안 돼.", "도도야, ~해야지."라는 말을 유행가처럼 내뱉고 있었다. 특히 그런 류의 말을 가장 많이 할 때는 식사 시간이었다. 나는 도도가 자리에 예쁘게 앉아서 식사를 하기를 몹시도 바랬나 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도도는 먹성이 많은 아이는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도도는 먹고 싶지 않은 음식 앞에 앉아 있는 식사시간을 유난히 지루해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도도를 야단치게 되었다.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시작된 말이었지만 어느덧 마음에 있는 화까지 함께 얹어 그 목적이 변질되기 일쑤였다.




육아 스트레스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뾰족해져 있는 마음을 되돌릴 방법을 알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주말을 맞아 도도와 함께 어머님, 아버님댁가게 되었다. 도도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가 사는 곳보다 더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물 좋고 공기 좋은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계다. 멀미가 심한 도도였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껏 신나 있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자동차로 한참을 달려 도도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제주도 한라산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크기가 만만하지 않은 산들이 마을전체를 푸근하게 감싸 있다.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들을 연상시키는 마을이다. 이 마을 입구에 들어서 한눈에 들어오는 병풍 같은 산 둘러싸인 마을 풍경에 감탄하게 된다. 특히나 산 모양이 너무 높거나 뾰족하지 않고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어 둥그런 산등성이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슬며시 웃음이 난다. 예전에 남편과 결혼을 약속하고 인사를 드리 이곳에 왔을  따뜻한 얼굴을 한 둥근 산들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을 보며 잔잔한 감동을 다. 그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산이 주는 따뜻함이 온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산이 주는 특유의 편안한 느낌이었을까. 봄햇살 같은 따스함은 처음 마주쳤을 그 순간으로 끝나지 않았고, 매번 이곳을 찾을 때마다 푸근한 느낌을 선사다. 그날도 작은 마을은 노랗고 따뜻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구불구불한 작고 정겨운 골목길을 지나자 가까이 어머님댁이 보이기 시작했다. 빨간 벽돌로 된 집 굴뚝에서는 귀여운 손자에게 줄 음식을 준비하고 계신지 하얀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집 마당에 주차를 하고 "저희 왔어요."라며 집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준비하고 계셨던 어머님과 아버님이     

"어이쿠, 우리 도도 왔는가."라고 말하시며 환한 웃음으로 반겨 주신다. 손자를 바라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입가에는 벙긋 웃는 표정이 떠날 줄을 모른다. 도도에 대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느껴지는지 도도 역시 신이 나서 여기저기 방방 뛰어다녔다.                


 해가 저물고 손자를 사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나와 남편까지 모두 저녁상 앞에 도란도란 둘러앉았다. 어머님이 준비하신 감칠맛 나는 나물요리와 따뜻한 밥을 보니 입안에 침이 고였다. 남편과 나는 "이야, 진수성찬이다!"를 외치며 숟가락을 들고 밥을 크게 한술 입에 넣었다. 그런데 도도는 밥에 관심이 없는지 밥상에 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도야, 밥은 앉아서 먹는 거야. 그렇게 돌아다니면 어떡하니." 내가 도도에게 다소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얼굴을 본 도도는 슬금슬금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는 밥은 먹지 않겠다고 말하며, 어머님이 담근 물김치를 꿀꺽꿀꺽 마셨다.

"도도야, 밥은 포크로 먹어야지." 내가 다시 말했다.      

"엄마, 저는 손으로 먹는 게 편해요." 도도는 정신없이 손으로 물김치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그런 도도의 모습을 보며 내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보신 어머님이 도도에게 말씀하셨다.     

"어이고, 우리 도도 물김치도 참 맛있게 먹네."      

할머니의 칭찬을 들은 도도는 신이 나서 물김치 그릇을 두 손으로 잡더니 다시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는

"엄마, 나도 밥 먹을래요."라고 말하며 갑자기 물김치 한 사발과 함께 밥 한 공기를 깨끗하게 비우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잘 먹지 않던 밥을 혼자서 한 그릇 비운 모습에 놀란 남편과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집이 다르긴 다른가 보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저녁상을 물리고 뒷정리를 마치니 시계는 벌써 저녁 8시를 향하고 있었다. 평소 8시면 잠드는 도도였기에 나는  "도도야, 이제 양치질하고 잘 준비하자."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도도는     

"엄마, 오늘은 조금 더 놀다 자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이제 잘 시간이니까 자야 한다고 말하는 계획형 엄마와 조금 더 놀고 싶다는 아이와의 작은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계시던 어머님이 한마디 던지셨다.

"아가, 그냥 놔둬라. 애들은 잘 때 되면 잔다."             

오랜만에 방문한 할머니 할아버지 집이라 그런지 도도는 그날 밤 유난히 신나 보였다. 작은 방과 할머니, 할아버지 방을 왔다 갔다 다니며 이것도 구경하고 저것도 구경하기 시작했다. 신이 나서 돌아다니는 도도를 보신 어머님이 갑자기 소일거리를 들고 거실로 나오셨다. 시골에는 소일거리가 많은데 여기서 소일거리란 밭에서 캔 상추 다듬기, 산에서 가져온 고로쇠 물을 페트병에 담는 일, 마늘 까기, 파 다듬기 등을 말한다. 뒤를 돌아보니 한참 운전하고 온 남편은 따뜻한 저녁을 먹고 노곤해졌는지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 나 역시 피곤함이 몰려와 거실 한편에 요를 깔고 누워 도도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머님은  신문을 깔고 앉아 상추 다듬기를 시작하셨고, 아버님은 고로쇠물이 담긴 통을 가지러 가신다며 마당으로 나가셨다. 할머니가 상추를 다듬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도도는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말했다.     

"할머니, 뭐 하세요? 제가 도와 드릴까요?"     

도도의 말을 들은 할머니가 말했다.     

"오구, 할머니 도와주려고? 우리 도도 기특하네. 할미 옆에서 같이 상추 다듬자. 여기 앉아."     

그렇게 도도는 한참을 할머니 옆에서 상추를 찢고 있었다. 그런 도도에게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어이쿠, 우리 도도 잘하네."     


한참 후 마당에 나가신 아버님이 산에서 받아온 고로쇠물이 가득 들어 있는 물통을 들고 오셨다. 그리고 커다란 빨간색 대야에 고로쇠 물을 콸콸콸 쏟으셨다. 물이 콸콸 쏟아지는 모습을 본 도도는 눈이 동그래졌다. 급히 할머니 옆에서 일어난 도도가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뭐 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도도는 무엇이든 할아버지를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도도야, 바가지로 고로쇠물 떠서 페트병에 담을 건데 도와줄래? 할아버지가 페트병 잡고 있을 테니까 도도가 깔때기 쪽으로 고로쇠 물을 부어주렴." 아버님은 할아버지를 돕겠다고 나선 손자에게 됐다고 이야기하지 않으시며 도도가 할아버지를 도울 수 있도록 친절하게 이끌어 주셨다.     

요를 깔고 누워 한쪽에서 아버님과 도도를 지켜보던 내 입 속에서는

'아버님, 안됩니다! 도도가 여기를 물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요!'라는 말이 맴돌고 있었다.

도도는 할아버지 말씀을 유심히 듣더니 알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바가지로 대야에 가득 찬 고로쇠 물을 담아 페트병에 끼워진 깔때기에 살살 붓기 시작했다. 물이 조금 쏟아지기는 했지만 도도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할아버지를 돕고 있었다. 그렇게 도도는 한참을 깔때기에 고로쇠 물을 부었고, 도울 수 있을 때까지 할아버지를 차분히 도와 드렸다. 그리고는 내 옆으로 와 눕더니 바로 쌔근쌔근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도도가 잠든 모습을 보신 어머님은 어린 손자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돕는 모습에 감동하셨는지 장하다는 눈빛으로 도도를 한참 바라보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아가, 고생했다. 도도랑 편히 들어가서 자렴."이라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내 팔을 베고 곤히 잠든 도도를 보고 있자니 한 동안 마음에 솟아난 뾰족한 가시의 원인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도와 어머님, 아버님의 잔잔한 일상을 보고 있다 보니 요즘 내가 육아를 너무 무겁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나 싶었다. 도도가 조금씩 자라며 병아리 엄마에 불과한 내가 혹시 놓치는 것이 있지 않을지, 육아에 어떤 부족함이 없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을 어느 순간 품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아이와의 순간을 즐기기보다는 주어진 과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도도의 행동 하나하나 훈육하며 제한을 두려 했다. 그 시간은 나를 힘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도도 역시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시간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도도에게는 혼자서 잘 해낼 수 있는 씨앗이 있었다. 내가 과도하게 도도를 가르치려 하고 통제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저 나는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아이를  믿고 지켜봐 주면 될 일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하는 도도의 모습은 마치 유유히 흘러가는 물과 같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 마음 안에 자라난 가시가 사라지고 울퉁불퉁한 내 마음이 둥그레지기 시작했다.    


* 이미지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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