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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도 하는 변호사 Mar 13. 2024

어머니의 마음

빨강 목도리

2월 마지막 날인 목요일, 재판이 있어 서울에 가게 되었다. 재판은 오후 가장 마지막 재판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다음 날인 금요일 삼일절을 지나면 토일 주말이 연이어 있는 연휴라 서울에 온 김에 서울 부모님 댁에서 하루 묵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도도, 남편과 함께 서울에 오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정말 오랜만에 오롯이 어머니아버지를 만난다는 생각 하니 마음이 떠 올랐다.


오후 마지막 재판을 마치고 법원 밖을 나서니 어둑어둑 해지는 저녁이 되었다. 연휴에 들떠있는 도시의 인파를 지나 정겨운 부모님이 사시는 동네로 향했다. 오랜만에 우리는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와는 새벽이 넘어서 까지 타지에서 엄마로 사는 것이 어떠한지, 또는 아이를 처음 낳고 키워보니 이런 고민이 있더라는 누가 들어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긴긴밤을 지새웠다. 둥그런 이야기보따리를 주고받다 어머니와 나는 잠이 들었다. 늦게까지 개운하게 잔 딸에게 오랜만에 딸 옆에서 자니 잠이 참 잘 오더라고 어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떠나는 날이 밝았지만, 하루 밤만 자고 떠나기에는 아직 풀지 않은 이야기보따리가 마음속에 한가득이. 이왕에 서울에 왔으니 조금 더 쉬다가 가이 어떻겠냐는 어머니와 아버지, 멀리서 오랜만에 언니가 왔다는 이야기에 식솔들을 이끌고 친정으로 놀러 온 동생과 오빠, 새언니까지. 내일 떠나든 오늘 가든 별반 다를 바 없으니 내일 가라고 하나같이 붙잡기에 결국 못 이기는 척, 부모님 댁에서 루 더 있게 되었다. 


저녁에는 오빠네가 같이 밥 먹자며 놀러 왔고, 동생네도 나와 같은 일정으로 부모님 으로 놀러 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가 집에 온다는 이야기에 저 머나먼 곳에서 장어를 공수해 오셨고, 우리 집이 희뿌애지도록 장어를 구우시고 먹이셨다. 아버지가 준비한 장어구이를 끝없이 먹으며, 우리는 서울에서 이렇게 배부르게 먹으려면 돈이 얼마라고 이야기하며 먹고 또 먹었다. 저녁 내내 장어구이를 양껏 먹은 삼 남매와 그 가족들의 얼굴이 유난히 뽀얀 해 보였다. 저녁 식사를 파하고, 동생까지 합세해 나, 동생, 어머니 여자 셋은 이불에 옹기종기 모여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새벽까지 피워 냈다. 오랜만에 뭉친 가족들은 기특하게 다들 잘 살고 있다며 서로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고,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도도와 남편이 있는 나의 집으로 돌아가 날 아침이 되었다. 내가 타고 갈 기차는 오전 7시 30분 기차. 봄이 온다며 3월 달력에는 푸릇푸릇 새싹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겨울은 봄에게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런 아침이었다. 그날 서울 아침 날씨는 체감 영하 15. 새벽부터 일어나 씻고 나갈 준비하던 나를 지켜보던 어머니 운 날씨에는 뭐라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너무 아침이라 아침밥을 준비하지 못 것을 아쉬워하시며 슬그머니 식탁 위에 삶은 달걀과 간단한 먹을거리를 내놓으셨다. 새파란 아침 일찍  길을 나서는 딸이 안쓰러웠는지 머니는 그릇을 내밀며 이거라도 먹고 가라식탁 의자에 앉아 부산을 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뉴스에서는 오늘 아침 기온은 영하 10도, 체감 온도는 영하 15도라는 리포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식탁에 앉아 아직 따끈한 삶은 계란 껍데기를 벗기고, 하얀 속살에 소금을 찍어 우걱우걱 먹고 있는 내게 뉴스를 듣던 어머니는 이렇게 추운 날 어떻게 역까지 갈 것인지 물으다.

"어머니, 여기 앞에서 택시 불러서 가면 되니까 걱정 마세요."

체감 온도 영하 15도에 기차역까지 가야 하는 딸이 추울까 싶어 걱정이 난 어머니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물론 어머니 안심시키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갈 것이라 말은 했지만 내 계획은 집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후다닥 뛰어갈 셈이었다. 부모님 댁과 기차역이 크게 멀지 않아 택시 타기에는 좀 아까운 생각 들었고, 추억이 많은 이 동네를 아침 일찍 걷는 것도 참 좋겠다는 감상적인 생각이었다(실제 영하 15도에 나가보니 이건 정말 감상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셨을까. 어머니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시고는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는 자동차 열쇠를 들고 나오셨다.

"춥다, 현정아. 내가 역까지 태워다 줄게. 어서 나와."

추운 날씨에 어머니까지 호출하는 것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 택시 타고 가면 된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지만 어머니 마음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새벽 같은 토요일 아침 택시가 잡힐 리도 만무했고, 산 중턱쯤에 위치한 아파트에 콜택시가 오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 뻔히 보였으니. 어머니자동차 열쇠손에 꼭 고 롱패딩을 입으셨다. 그리고는 따뜻해 보이는 빨강 목도리를 목에 휘뚜루마뚜루 두르시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추운 날씨에 어머니까지 안 나와도 된다며,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던 나는 결국 어머니 마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고 말하며 어머니 뒤를 따라나섰다. 2일 전 재판에 출석한다고 패딩코트 대신 모직으로 된 검은색 코트에 회색 목도리 하나 걸친 내가 추워 보였는지, 어머니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면서 딸, 진짜 춥겠다, 춥겠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어머니, 저는 괜찮다, 괜찮다 춥지 않다고 대답했다. 모녀는 아침부터 추워 보이네, 안 춥네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누었고, 어느새 5층 계단을 내려오니 아파트 입구에 위풍당당하게 세워져 있는 어머니 차가 보였다. 그레 웃고 있는 빨간색 프라이드.


춥지 않다고 말했던 나였지만 아파트 문을 열고 밖으로 나 활자에만 있던 체감 온도 영하 15도라는 느낌을 몸소 느끼고 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르르 떨리던 몸은 얼어 버렸는지 더 이상 떨리지도 않았다. 역시 서울의 추위 내가 살고 있는 남쪽 나라 추위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유년 시절 서울에서 수십 년 동안 겨울에 어떻게 살았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어머니 내가 차에 탈 수 있도록 작은 차 안에 그득그득 실 짐들을 주섬 주섬 트렁크로 옮기셨다. 어르신들께 드릴 선물이며, 여러 용품들이 차에  실려 있었다. 빨간색 조그마한 프라이드에 이 많은 짐들이 다 실린다니. 정말 신기한 마법 주머니가 아닌가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뜰히 마련해 준 뒷자리에 몸을 구겨 넣었다.

"어머니, 어머니 말 듣기를 잘했네요. 진짜 춥다. 고마워요. 덜덜덜." 내가 너스레를 떨면서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손을 덜덜 떨면서 안전벨트를 맸다.


운전을 시작한 어머니뒷자리에 앉아 하얀 입김을 내뿜는 나를 백미러로 흘끔 보더니 말씀하다.

"현정아, 춥겠다. 서울은 추워. 있다가 내릴 때 엄마가 지금 차고 있는 빨강 목도리 줄 테니까 이거 가지고 가. 알겠지?"

 얇은 검은 모직 코트에 멋으로 덩그러니 메고 있는 회색 목도리가 계속 눈에 걸리 셨는지 어머니는 집에 갈 때 자신의 목에 두르고 있는  빨강 목도리를 꼭 차고 갈 것을 신신당부하셨다. 마지못해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기차역까지 10분 정도 거리를 시원하게 달리며 우리는 오랜만에 이렇게 만나 참 즐거웠다는 이야기, 이런 시간 들을 앞으로도 많이 가지자는 이야기, 이제는 차를 좀 큰 것으로 바꿀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 등 두서없는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수서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서역 안으로 들어가 차를 세우고 내려주면 좋았겠지만 그 경로가 번잡하였기에 어머니역 근처 갓길에 차를 세웠다.


"어머니, 잘 쉬다가요. 다음에 우리 집에도 놀러 오세요."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며, 혹여나 뒤에 차가 올까 싶어 차에서 허둥지둥 내렸다. 갓길에서 역까지 가려면 신호등 없는 보도를 세 개를 지나야 했다. 차에서 내려 보도를 하나 건너고, 또 다른 보도를 건널 때까지 어머니가 탄 빨간색 프라이드는 그 자리에서  떠날 줄 모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딸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였다. 어머니 차 안에서 딸이 역 안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하여 나는 뒤를 돌아 어서 가라며 어머니에게 계속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도 참, 추운데 어서 가시지.'

속으로 이런 마음이 들었지만, 오랜만에 온 딸이 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도도를 낳고 기르며 뒤늦게 철이 들고 남들은 일찍부터 알고 있는 어머니의 끝없는 마음을 이제서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을까. 나를 바라보며 서 있는 빨간색 프라이드를 보니 추운 날씨와 다르게 마음은 말랑말랑 보들보들해지고 말았다. 도도를 낳은 후 코로나며, 먼 거리  때문에 친정에 자주 못 왔었는데 이제는 이런 소담한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졌다. 앞으로는 도도랑 서울에 자주 와야겠다는 마음을 안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수서역으로 들어섰다.

    

토요일 아침인데도 수서역에는 서울에 막 도착한 사람들과 서울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어디나 붐볐다. 혼자서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지나가는 사람,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가는 사람, 온 가족이 서울을 떠나려는 것일까, 아니면 서울에 온 것일까 서로 신이 나서 하하 호호 웃으며 가는 사람들. 역에서 느낄 수 있는 만남과 헤어짐이 주는 설렘, 아쉬움을 등에 안고 내가 타야 하는 기차 승강장을 찾아 나섰다.


전광판을 보니 부산으로 떠나는 오전 7시 30분 열차는 이미 1번 승강장에서 대기 중이었다. 지금 시각 오전 7시 15분. 여유가 있음을 확인하고 조금은 천천히 한가로운 걸음걸이로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한 달 전에 기차표를 예매한 보람으로 객실 가장 앞쪽 좌석인 1A를 찾아가 앉았다(장거리 여행을 할 때에는 객실 가장 앞 쪽이 좁기는 하지만 이상스레 피로감이 좀 덜하다지 않나 싶다. 개인적인 느낌이다).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은 2시간가량. 가방과 옷가지를 편하게 정리한 후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7시 45분 부산으로 출발하는 차의 승강장은 4번, 4번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차 번호를 잘 확인하시어 탑승하시길 바랍니다."

아마도 내가 탄 7시 40분 기차와 7시 45분에 출발하는 기차가 목적지가 같고 출발 시간 비슷해 혹시라도 승객들이 승강장을 헷갈릴까 싶었는지 같은 내용을 담은 방송이 몇 번 더 스피커로 울려 퍼졌다.


드디어 7시 30분. 내가 탄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운 서울이여 안녕. 아침에 일찍 일어난 탓이었을까, 이틀 동안 잘 쉬고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는지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기차에 앉은 채로 잠이 들어 버렸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자다 깨어나니 핸드폰에 부재중 통화가 와 있었다. 오전 7시 50분 부재중 통화. 어머니였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전화를 먼저 안 하시는 어머니 전화라 무슨 일인가 하는 마음에 급히 열차 대기실 통로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저는 잘 가고 있어요. 어머니는 잘 도착하셨어요? 연락드린다는 게 잠들어 버렸어요."

무슨 일인가 싶은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현정아, 너 갈 때 준다고 했던 빨강 목도리 말이야. 그거 준다고 너를 찾으러 역으로 갔는데 못 찾고 그냥 왔지 뭐니..."

어머니의 너무나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울려 나왔다.


상황은 이러했다. 어머니는 내가 내린 후, 빨간색 프라이드 안에서 우리 딸이 역으로 잘 들어 가는 지켜보고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렇게 내가 기차역으로 들어가고 다시 운전대를 잡으려다 잊고 있었던 것이 퍼뜩 생각이 난 것이다. 그것은 아까 가져가라고 말했던 빨 목도리. 어머니는 빨강 목도리를 딸에게 주지 못해 너무 아쉬운 마음에 갓길에 차를 세워 두고 기차역으로 딸을 찾으러 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는 아침 일찍 급히 나오느라 핸드폰을 들고 나오지 않았고, 심지어 내 출발 시간도 정확히 모르셨다는 것이다.  어머니로서드넓은 기차역에서 딸을 찾을 길이 막막했을 그러던 중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7시 45분 부산으로 출발하는 차의 승강장은 4번, 4번입니다. 승객 여러분 께서는 차 번호를 잘 확인하시어 탑승하시길 바랍니다."

이 방송을 들은 어머니는 내가 차에서 내린 시간과 목적지를 짐작해 보기 시작했고, 추론 끝에 딸이 타기로 되어 있는 기차가 7시 45분 기차일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방송에서 나온 대로 승강장 4번으로 가면 딸을 만나 따뜻한 빨강 목도리를 전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기차가 떠나갈까 싶어 급히 승강장 4번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딸에게 빨간 목도리를 전해 주기 위해 7시 45분 기차 앞에 섰지만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기차 앞 칸부터 뒤까지 걸어가며 나를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7시 40분 기차에 타고 있었기에 어머니는 나를 그곳에서 당연히 볼 수 없었다.  결국 어머니딸을 만나지도, 목도리를 전해 주지도 못한 채 7시 45분 기차를 떠나보내고 만 것이다. 기차는 떠났고 기차역에는 어머니딸에 대한 그리운 마음, 아쉬움만 남겨져 있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의 끝을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빨강 목도리를 전해 주려는 그 마음에, 드넓은 기차 어디에 앉아 있는지 모르는 딸을 찾기 위해 기다랗고 길다린 기차 안을 헤매었던 엄마 마음을 한 줄 한 줄 헤아리니 마음이 아려왔다.


한 때는 나 홀로 고군분투하며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여기에 있기까지에는 누군가의 눈물이, 누군가의 사랑이, 누군가의 응원이, 누군가의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 사랑 가운데에는 어머니가 있었음을.  


*이미지 출처: pinterest, 에두아르 마네 (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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