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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도 하는 변호사 Mar 03. 2024

잡채 드실래요

라는 사람은 엄마가 되기 전 다소 사무적이 개인주의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으면서 내 영역을 잘 지키고 받은 만큼 주고, 가능하면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고 사는 것이 속 편하다 생각하며 살아왔다. 스쳐는 인연들이 많았지만 새로운 인연 만드는 일을 힘들어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냥 스쳐 지나갔다.


같은 맥락으로 군가 친해지기 위해 내 삶의 영역을 향해 들어오면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밀어내기 바빴다. 대가 따뜻한 배려와 친절한 태도로 한발 다가오면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갔다. 어느 정도 사무적인 선에서의 관계는 괜찮았지만 더 친해져 인연이 되고 나신경 써야 할 감정적인 소모, 내가 가진 시간들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실제로 어나지 않은 부담감 문에 마음 깊숙한 곳에서 경계심과 거부감 발동했다. 기존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연들, 원래 알던 사람들만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원래 알던 인연들도 손에 꼽을 정도로 소수였지만). 사람들에게 어떤 상처를 받았던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내 마음은 새로운 사귐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좋은 친구가 되고 싶어 다가온 사람들은 언제나 바싹 긴장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나를 지켜보다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강물이 흘러가듯 슬며시 슬며시 멀어져 갔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만의 구역에서 원래 알고 있던 지인들과 평화롭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아도 외롭지 않고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


이런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는 낯선 지역으로 자주 옮겨 다니면서 더 심화되었다. 결혼 후 남편 직장은 서울에서 진주, 그리고 청주, 세종 등 여러 지역으로 바뀌었다. 남편과 함께 새로운 지역으로 가서 짐을 풀었다싸고, 또 다른 지역으로 가서 짐 풀기를 반복했다. 낯선 지역 아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외롭다고 느낄 법도 했지만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지역에 산다는 것 외로움 주기보다는 자유롭고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런 시간들이 흘러 남편과 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나 역시 다시 직장을 옮겼고, 낯선 그곳에서도 이전 도시에서와 같이 타인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삶을 살았다. 연고 없는 지역에 살다 보면 나와 접점이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고는 직장 동료 혹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이웃들이 전부였다. 마음을 열고 다가갔다면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내 마음이 정해 놓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낯선 이 도시에서도 그 누구와도 깊게 친해지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크게 불편하지 않는 삶이었다. 계획된 시간과 예상 가능한 사람들 속에서 무미 건조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게 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낯선 지방 도시에서 도도를 낳고 엄마가 되었다. 나보다 먼저 엄마가 된 동생은 육아는 정보 싸움이라고 말하며 육아 정보가 바다처럼 넘쳐나는 맘카페 가입을 권유하였다.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다는 맘카페 회원이 되었다. 카페 글을 읽다 보니 아기를 둔 엄마들에게 육아 동지가 큰 힘이 된다고 입을 모아 말하며 산후 조리원 동기를 꼭 만들 것을 추천했다. 하지만 평소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편하고, 누군가 그 거리를 박차고 들어와 심리적으로 가까운 거리가 되었을 때 심적 불편함을 느끼는 나로서는 육아 동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조언이 지금 눈앞에 놓여 있던 육아보다 더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당시 왕초보 엄마인 나로서는 육아 동지가 어떤 존재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지만,  단순히 직장에서 직장 동료와 같은 사무적인 관계와는 다른 지점에 있는 관계가 아닐까 막연히 생각다. 카페에서는 육아 동지란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 육아를 하고, 내가 현재 겪고 있는 육아에 대한 고충을 서로 나누며 손쉽게 서로의 육아를 돕는 친구라고 말했다.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육아 동지사랑이라 말하는 이도 있지만 타인과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마음이 편한 나에게 육아 동그저 부담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사람과의 사귐이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랑비 젖듯 찾아온 인연이 하나 있었다. 그녀와의 연결고리에는 도도가 있었다. 도도가 돌이 지날 때쯤, 낯선 지방 도시에서 도도와 할 수 있는 일은 동네를 산책을 하거나 놀이터에 가서 흙놀이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침 10시도도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 앞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모래 놀이터에 도도를 앉혀 놓고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갈 때까지 흙 놀이 하는 것이 도도와 나의 일상이었다.  오전 시간에 공원과 모래 놀이터 어디에서도 아이들이나 도도 또래 아기를 찾아보기 힘들었. 따뜻한 봄바람을 따라 산책 나온 어르신들이 도도와 나에게 빙긋 웃으시며 한 마디씩 덕담을 건네고는 산책로 뒤편으로 사라지시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도도와 단 둘이 모래 놀이터에서 단조롭고 평화로운 봄날을 보내고 있었다. 벚꽃이 흩날리던 4월, 노란 커버 유모차를 밀고 오는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녀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특별한 이야기 없이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트를 가다가 혹은 카페를 지나다 노란 커버 유모차를 밀고 있는 그녀와 계속 마주쳤다.


벚꽃 잎이 땅에 모두 떨어져 하얀 융단길을 만들 때쯤, 우리는 모래 놀이터에서 다시 마주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나와 나이도 같았고, 낯선 지방 도시에 남편과 둘이 내려와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준이 엄마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나는 그녀를 유빈 씨라고 불렀다.


유빈 씨와 나의 동선이 비슷했는지 그 후에도 자주 우연한 만남이 어났다. 그녀와 우연히 마주치지 못한 날에는 혹시 노란 커버 유모차를 밀고 있는 그녀가 있는지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모래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그날도 도도와 준이를 흙 위에서 놀게 하고 그동안 아이를 낳고 어떻게 지내 왔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기들이 잠은 어떻게 자는지, 밥은 잘 먹는지, 또 그리고 무엇을 하면 노는지, 힘든 점은 없는지 등 아이들의 이야기로 우리의 대화는 채워졌다. 그렇게 하루하루 유빈 씨와 준이는 도도와 나의 일상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새로운 사귐이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렸던 나는 유빈 씨 역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친구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왔다가 인연의 힘을 다하고 시간이 지나면 나갈 것이라 생각했었다. 유빈 씨와 나는 만났을 때 서로의 이름만 물었을 뿐 6개월이 넘도록 이름과 아 특이사항 외에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나도 유빈 씨 신상에 대해 특별히 묻지 않았고, 유빈 씨 역시 나에 대해 깊 묻지 않았다. 엄마들의 사귐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런 점이 유빈 씨와 편안 거리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다. 그렇게 그녀와는 인연을 다할 듯하다 다시 구의 영역으로 다정스럽게 들어오곤 했다. 다른 인연들과 다르게 그녀와의 인연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2년 넘게 이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육아에 지쳐 마음이 허해질 때쯤이면 쓱 나타나 내 삶 속에 따스함 한 스푼을 얹어주고 휑하고 사라졌다. 그녀는 내가 가진 마음의 온도보다 더 따뜻한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날도 그러했다.


영하 5도를 밑도는 어느 추운 겨울, 주말이었지만 남편은 김장하러 시댁에 가고 나와 도도만 집에 남아 있었다. 매서운 추위가 계속되던 그때 집 안에만 있던 도도가 밖에 나가고 싶어 떼가 났다.

"엄마, 밖에 나가요. 으앙. 너무 답답해요."

도도는 이미 현관문 앞에서 신발을 신고 서서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문 밖은 영하라 너무 추워서 나갈 수가 없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도도는 이미 밖으로 꼭 나가겠다는 마음을 굳힌 후였는지 현관문 앞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가능한 옷을 껴 입히고 털모자도 씌워 도도와 밖으로 나갔다. 영하 7도의 매서운 추위에 얹어진 강렬하고도 날카로운 바람이 도도와 나의 얼굴을 강타했다.


"으... 으...도도야, 들어가자. 너무 춥다." 내가 간절히 도도에게 말했다. 하지만 도도는 하나도 춥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모래가 샇여 있는 화단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매서운 추위에 장갑도 벗어던지고 신이 나서 돌을 만지작만지작하기도 하고, 형아들이 버리고 간 하얀색 총알을 찾으며 놀기 시작했다. 추위에 누구보다 약나는 몸이 얼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만 참아 보자며 눈을 꼭 감고 있는데 핸드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띠리 리리 띠리 리리 띠리 리리"

핸드폰을 꺼내 보니 유빈 씨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전화가 반가웠던 나는 급히 장갑을 벗고 전화를 받았다.

"저 준이 엄마예요. 뭐 하세요?" 유빈 씨가 물었다.

"도도가 밖에 나온다고 해서요. 그래서 밖이에요." 내가 간신히 대답했다.

"밖이요? 춥다고 아이들 외출하지 말라는 재난문자 왔는데 밖이 시리고요?" 그녀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남편이 시댁에 김장을 갔거든요. 내일 오는데 도도가 많이 답답했나 봐요. 계속 나가자고 고해서 어쩔 수 없이 집 앞에 나와 있어요."

내가 밖으로 나오게 된 사정을 토로했다.

"아, 그렇군요. 고생이 많으세요. 정 힘드시면 저희 집에 오셔도 된답니다."

"아니에요. 준이 아빠도 계시고 해서요. 여기서 좀 놀리다가 들어갈게요." 유빈씨네 집으로 도도와 놀러 가고 싶었지만 주말이고 준이 아빠도 쉬고 계시는데 민폐라는 생각에 괜찮다고 말했다.

"네, 너무 힘들면 오세요. 끊을게요." 은빈 씨가 안타까운 듯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와 통화를 마치고 나니 겨울바람이 더 세차게 느껴졌다. 도도는 강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는 꽁꽁 얼어붙은 흙을 나뭇가지로 파내려고 낑낑 거리며 놀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리리리리. 띠리리리리리"

유빈 씨였다.

"현정 씨, 다름이 아니고요. 추운데 도도 본다고 밖에 계시다는 이야기 들으니 마음이 쓰여서 또 전화했네요. 아직도 밖이세요?" 유빈 씨가 따뜻하게 물었다.

"네, 너무나 춥네요. 이제 곧 들어갈 거예요. 걱정해 줘서 감사해요." 내가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저녁으로 잡채 할 건데요. 혼자 도도 보시면서 저녁 하기 힘드실 것 같아서요. 잡채 할 때 넉넉하게 하면 되거든요. 있다 저녁때 좀 가져다 드릴까 해서요. 어떠세요?' 유빈 씨가 살며시 나에게 물었다.

"잡채요? 잡채 너무 좋지요." 나도 모르게 신이 나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있다가 잡채하고 가져다 드릴게요. 그럼 그만 끊을게요."

그녀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니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고마운 마음에 괜히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잡채가 그렇게 따뜻한 음식이었다니....


그날 저녁 그녀는 잡채를 해온 것까지 모자라 우리 집까지 따뜻한 잡채를 손수 배달해 주었다. 덕분에 도도와 나는 추운 겨울 저녁 사랑이 듬뿍 담긴 맛있는 잡채를 저녁으로 먹을 수 있었다. 그녀가 전해준 따스함으로 도도와 나의 하루포근하게 물들다.  


그녀에게 전해 받은 온기로 차갑던 나도 조금은 따뜻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 참으로 멋진 일이다. 그렇게 나의 마음도 조금씩 둥글어져 간다.


*이미지 출처:pinterest

* 구독자님들 안녕하세요. ^^ 출장으로 발행이 좀 늦어졌네요. 집에 도착해 게으름을 부리다 이번 주가 모두 지나가기 전에 글을 발행 합니다. 편안한 밤 보내시고 즐거운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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