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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r 16. 2020

미얀마, 바간에서 배운 것

이곳의 모든 시간은 곧 그리움이 되어 마음을 흔들겠지.


두 번째 도시, 바간


알람보다 먼저 깨어 루프탑으로 향한다.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자 파릇파릇한 정원과 눈부신 햇살이 아침을 밝힌다.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앓았던 어제. 하루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기분이다. 한국의 겨울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긴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겠지. 하지만 마음에 쌓인 고민과 상념을 잊고 현재를 살기로 한다. 지금은 이 시간을 향유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일 테니. 뜨거운 국물을 들이켜고 오믈렛과 토마토를 곁들인 아침 식사를 시작한다.





오늘의 계획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것. 바이크를 타고 바간의 거리를 달린다. “나는 미얀마가 좋아. 여기도 60년 후면 한국처럼 변하게 될까?” 그는 말한다. “이 나라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 한적한 길가에 있는 사원에 멈춘다. 야자수 나무와 신기한 선인장이 드넓은 초원을 지키고 있는 곳. 나무 그늘에 바이크를 세우고 내리자,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Hello. Where are you from?” 우리는 한국인이라 답했고, 마당을 쓸던 남자는 몇 가지 사실을 일러준다. 현재 모든 사원은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고 여행자들은 탑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


그는 그림을 파는 화가였다. 모든 작품은 강가에 있는 모래를 모아서 천 위에 풀을 발라 만들어진 거라고 한다. 우리는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며 좋은 기운을 나눈다. 훗날 이 사원과 바간을 추억하기 위한 그림 두 장도 품에 안고. 그리고 아쉽게 인사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도시의 해질 무렵과 새벽이 담긴 모래 그림과 멋진 화가 아저씨에게.

오후의 이라와디 강변. 몇 척의 배와 사람들을 지나 모래 선착장에 선다. 수박 주스와 피나콜라다 칵테일을 마시며 한낮의 여유를 누린다. 나무 의자에 앉아 드넓은 강가를 보며 사색한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찾아 돌아갈까? 그러다 아빠 생각이 나서 한국으로 전화를 건다. 연결음이 울리고 곧 아빠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는 딸을 위해 괜찮다는 말을 반복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번지는 사랑에 안도한다.

​강가 너머로 반짝이는 빛을 따라 달린다. 어떤 지도도 없이, 또 어떠한 정보도 없이 바람에 몸을 맡긴다. 얼마쯤 달렸을까, 지는 햇살을 머금은 사원의 한 부분이 보인다. 쉐지곤 파고다. 낮에는 뜨거워서 볼 수 없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우리. 공기 중으로 침묵이 흐르지만 그 속에 작게 들려오는 기도가 사원을 채운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미소는 미얀마의 기억을 더 따스하게 만든다.



열기구가 뜬 새벽은 아름답다. 나는 안다. 바간은 우리에게 잊지 못할 여름으로 남으리라는 걸. 동이 틀 무렵, 장미 정원 옆에서 멋진 아침을 보낸다. 여느 때와 같이 오믈렛을 주문하고 스티키 라이스를 접시에 담는다. 루프탑에 있던 직원과 대화를 나누며 미얀마 언어를 배운다. -지금까지 사용한 ‘째주바’(감사합니다) 보다 ‘째주 덴 바레’(감사합니다)가 조금 더 좋은 표현.- 덕분에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과 나는 입을 모아 말한다. “째주 덴 바레.” 글자에 담긴 것보다 더, 훨씬 더 많은 감사를 담아서.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바간의 모든 순간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오전 열한 시, 바이크를 타고 올드 바간을 향해 달린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탓빈뉴 사원. 불상 위에 꽃 한 송이가 놓여 있고 그 주변에는 두 손을 모은 사람들이 있다. 철창 밖의 샌드 페인터는 자신의 작품을 설명해준다. 금가루를 뿌린 그림은 빛을 비출 때 반짝거리고 부다가 있는 그림은 돌가루를 갈아 만든 거라고 한다. 이들은 전부 자연의 것을 사용한다. 나는 그런 미얀마 사람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말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Hello? You can just see. It is very expensive.” 바닥에 펼쳐둔 그림을 저렴하게 팔고 있다며 구경만 해도 좋다는 화가들의 말이 어쩐지 안타깝게 느껴졌기 때문. “아름다운 작품을 저렇게 팔아야 할까?” 그 마음은 오래전에 세워진 사원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이 많은 사원이 어떻게 지어진 걸까? 사람들의 희생? 아니면 기쁜 마음?” 그가 입을 연다. “글쎄. 기쁜 마음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반 반 일지도 모르고. 그 사람들은 아무런 임금도 받지 못했겠지?”

오후가 되자 태양은 더 찬란히 빛났고, 바닥에서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빈은 말한다. “발바닥이 뜨거워. 곧 탈 것 같은데?” 나는 대답한다. “뜨거움을 즐겨. 이 순간은 돌아오지 않아.” 안온한 순간이 잔잔히 밀려온다. 내가 여행하는 이유는 이런 소소함을 누리는 데 있다.


뉴바간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한적하고 광활하다. 한참을 달려 한적한 동네에 닿는다. “Excuse me. Where is the market near here?” 가게를 지키던 사람은 모든 시장이 문을 닫았다고 말한다. ​“그냥 가기 아쉽지? 근처 템플에서 석양 보고 오자.”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바이크에 오른다. 이곳의 모든 시간은 곧 그리움이 되어 마음을 흔들 테니까.


해가 지던 찰나의 순간을 붙잡는다. 나무 전봇대와 강아지 몇 마리, 그리고 우리의 필름 카메라가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제는 이 도시를 떠나야 할 때. 곧 모든 장면이 흐릿해지겠지만 나는 잊을 수 없겠지. 사원 앞에서 쏟아진 슬픈 감정이나 버스 안의 기도, 그리고 감사와 행복을. 많은 이에게 받은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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