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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열 Aug 30. 2019

텃세 부리는 사람들의 본심

침묵의 폭력

'텃세'는 직장인들의 갖가지 고민들 중에서도 대단히 심각한 편에 속한다. 직장만이 아니라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 텃세는 있다고들 가볍게 생각하지만 절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텃세로 인해 받는 심리적 고통은 직장 내 괴롭힘이나 따돌림보다 심하면 심하지 절대 약하지 않다. 그 결과 텃세를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옮기는 경우가 많다. 취업포털 사람인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텃세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고 답한 직장인 중에 47.4%가 직장을 다시 옮겼다고 답할 정도다. 직장에서 텃세의 주된 대상은 소위 말하는 '굴러온 돌'인 경력직이다. 직장생활의 경험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의 절반이 견디지 못할 정도라면 텃세의 위력은 생각 그 이상이 분명하다.


텃세의 위력이 이토록 강한 이유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충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이 말하는 텃세의 유형은 '업무 관련 정보나 자료 공유하지 않기', '업무 방식 불인정', '자신들만 아는 주제로 대화', '의견이나 이야기를 듣지 않거나 무시', '과도한 업무 할당', '인사받지 않기' 같은 것들이다. 이 중에 '과도한 업무 할당'을 빼고 난 나머지 것들에서 공통된 속성을 찾을 수 있다. 바로 '배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혼자되거나 무리에 들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외로움과 불안 같은 심리적 고통을 겪는다. 그런 고통을 피하고 위해 인간은 집단에 소속되어 다른 존재들과 교감하고 소통하려는 욕구를 갖는다. 매슬로는 이러한 욕구를 자신의 욕구단계이론을 통해 '소속감과 애정 욕구'로 설명하기도 했다. 한 존재를 배제하거나 외면한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거세하는 셈이다. 본능에 가까운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상황은 욕망을 채우지 못한 실망감을 넘어서는 좌절과 절망감을 안겨준다. 더구나 그 욕구 불만족이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의도된 선택에 의한 결과라면 배제와 외면으로 인한 고통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직장생활이라는 것이 만만치 않음은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참고 견디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이유는 직장이 삶을 이어가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삶의 큰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힘든 직장생활을 함께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독여주지는 못할 망정 텃세를 부리면서 괴롭히는 이유를 이해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물론 텃세를 부리는 당사자들에게는 나름대로 '표면적인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표면적인 이유라는 것은 자신들의 행동이 텃세가 아님을 밝히는 수단이다.


텃세의 본심

업무 관련 정보나 자료를 공유하지 않는 이유는 곤란해보라는 의도가 아니라 이미 경력자라서 굳이 그런 것 없이도 일을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업무 방식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실력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지금 조직만의 룰과 전통에 위배되기 때문이며, 자신들만 아는 주제로 대화를 한 것은 대화에 끼워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원래 자신들의 대화 패턴일 뿐이다. 의견이나 이야기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에 집중하느라 못 들은 것뿐이고, 일부러 인사를 안 받은 것이 아니라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과도한 업무 할당이라는 생각은 예민함이 초해한 피해의식이다. 원래 그 자리는 그 정도의 업무량을 처리해야 하며, 경력자라면 당연히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정도면 지금까지 텃세에 당했다고 생각한 사람을 오히려 부끄럽게 하는 대답이다. 텃세에 시달린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미안해해야 할 정도다. 그런데 이 말들이 과연 진실일까? 학자와 연구자들은 상대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직장 내 '배제주의(Ostracism)'에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안전하지 않거나 비협조적인 개인으로부터 집단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때의 배제는 대상의 행동이나 태도를 바로 잡아 집단에 적응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둘째는 특정 대상을 배제하는 행위자 개인의 자존감, 소속감, 통제력 같은 것들의 강화이다. 이는 직장 내 괴롭힘이나 집단 따돌림의 행위자들이 우월감 획득을 위해 약자를 괴롭히는 것과 유사하다. 배제의 셋째 기능은 집단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개인을 추방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텃세의 사례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일단, 집단의 보호를 목적에 두었다고 볼만한 것은 없다. 만약 그런 목적이었다면 텃세의 주된 이유는 비협조적이고 불량한 경력자의 등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텃세는 새로 집단에 들어온 사람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있기도 전에 시작한다. 개인의 자존감이나 소속감,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텃세도 잘 없다. 인사를 안 받는다고 자존감이 높아질 리도 없고, 의견을 무시한 것이 소속감을 높이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업무를 과중하게 부여하는 것이 통제력과 관련이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통제력의 강화하는 데는 권한의 강화가 필요하지 권한의 무리한 사용으로 될 일이 아니다. 이제 남은 것은 집단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개인을 추방하는 기능이다. 


텃세에 어떤 개인을 추방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는지는 텃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살펴보면 된다. 먼저 업무 관련 정보나 자료를 공유하지 않으면 업무 성과를 내기가 어려워진다. 또, 기존의 업무 방식을 인정받지 못하면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업무를 해야 하므로 익숙한 방식으로 하던 것에 비해 업무 성과를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과중한 업무 역시 업무의 효율을 떨어뜨리고 업무 성과에 악영향을 준다. 그리고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고, 대화에 끼지 못하고, 의견이나 이야기가 무시되면 긍정적인 대인 관계 수립이 불가능하다. 


업무 성과도 변변찮고 대인 관계도 제대로 맺지 못한 사람에 대한 평판은 바닥을 칠 수밖에 없다. 신입이든 경력직이든 상관없다. 직장이라는 곳은 '일'과 '사람'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일도 별로고 사람과의 관계도 시원찮은 사람에게 좋은 평가가 내려질 리 만무하다. 결국 여기에 있을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얘기가 돌 수밖에 없다. 텃세의 최종 목적지가 거기다. 그 동기가 '굴어온 돌'에 대한 경계심이든,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윤리적 우월감이든, 실력 있는 사람에 대한 열등감이든 관계없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 몰아내자는 것이 텃세의 목적이다.


텃세는 적폐다

텃세에 표적의 된 사람은 보이지 않는 유령 취급을 당한다. 말을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고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없다. 서양에서 배제주의를 '침묵의 처벌(silent treatment)'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외로움과 소외감, 불안과 분노, 좌절 같은 심리적 고통이 더해지는 상황에서 업무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은 무리다. 애써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하려 하지만 주위의 도움을 받지 못해 혼자만의 발버둥이 되기 십상이다. 설사 성과를 냈다고 해도 주변의 반응은 싸늘할 뿐이다.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고, 이 모든 일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상황을 합리화시켜 보지만 침묵의 형벌이 주는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치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받아줄 때까지 인사를 하고,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직원들 모이는 자리에 빠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업무에 매달려 텃세를 이겨내는 경우는 그나마 해피엔딩이다. 텃세를 이기지 못한 많은 직장인들은 자존감이 무너지고 업무 역량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마지막 용기를 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떠나려는 용기는 밀려났다는 비참한 심정을 위로하지 못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속 편한 소리 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사람 많은 데가 그렇지 뭐. 잘 견뎌봐", "경력자면 그 정도는 문제는 알아서 해야지, 안 그래?", "아직 낯설어서 그렇지 악의가 있진 않아. 잘 적응해봐" 같은 말은 텃세를 당하는 사람의 처지를 1도 생각하지 않아서 나온다. 그중에서도 '통과의례'라며 참으라는 얘기가 가장 무책임하게 들린다. 텃세는 직장 내 괴롭힘의 일종이다. 괴롭힘의 목적이 상처주기에 있다면 텃세는 조직에서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몰아내기 '작업'에는 상처가 필연적으로 따른다.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는 괴롭히기나 텃세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을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일로 생각하는 것도 자유다. 하지만 '통과의례'라는 말을 쓰는 것은 가해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다는 카뮈의 말을 빌어와야 이해가 되는 일인가?


직장에서 보이지 않는 폭력은 개인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 자체만 보면 개인들이 풀어야 할 문제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놓고 보면 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텃세는 관습적인 행태라는 껍데기를 둘러쓰고 조직의 역량을 깎아내린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개인의 영역에 있으므로 조직이 관여하는 것은 권한의 남용이라고 발을 뺀다면 조직의 문제를 방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개인과 개인의 문제라고 해도 그 개인이 조직의 구성원이라면 조직 안에서 벌어지는 개인들의 문제는 조직의 문제다. 직장에서 벌어지는 괴롭힘, 따돌림, 텃세 같은 보이지 않는 폭력 행위는 마땅히 조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신뢰와 덕망 있는 상급자나 임원을 관련 담당자로 두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거니와 비현실적인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 직원에 대한 '현실적인' 예의이고 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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