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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Sep 24. 2020

배고파요

오래된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 디자인이 깔끔해서 마음에 든다. 다만 저장공간이 작고 3G 인터넷을 사용하기 때문에 조금 느리다. 불편함을 조금 감수하며 사용하면 어마어마한 지장은 없다. 하나 클릭하고 조금 기다리고 또 하나 클릭하 조금 더 기다리면 된다. 업무를 볼 때는 인내심을 발휘해서 차근차근 작업하는데, 연예인 사진을 볼 때는 분통이 터진다. 영상은 거의 못본다고 생각하면 된다.


퐁트벵은 길게 뜸을 들인다. 그는 뜸의 거장이다. 그는 오직 소심한 사람만이 뜸들이는 걸 겁내며,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면서, 성급히 엉뚱한 문구를 내뱉어 조소를 자초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다.
 _밀란 쿤데라 「느림」


나 배고파요!! 배고파요!!


여자친구가 배고프단다. 배고파요? 내가 맛있는 거 시켜줄게요~ 대답하고 핸드폰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은 내 핸드폰에 통하지 않는다. 일단 하나를 먼저 지워야 다른 하나를 설치할 수 있다. 배달의민족 어플을 설치하기 위해 삭제할 어플을 찾는다.


조금만 기다려요. 거의 다 됐어요. 뭐 먹고 싶어요? 여자친구가 먹고 싶은 걸 생각하는 동안 지울 어플을 찾았다. 아, 이거 가끔 쓰는데.. 에라 모르겠다. 삭제한다. 삭제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치킨 먹을까요? 육회 먹을까요? 여자친구는 메뉴가 거의 좁혀진 듯하다. 배달의민족을 다운받아야 하는데, 3G 인터넷이라 시간이 꽤 걸린다. 이제 메뉴를 같이 고민하며 시간을 끌어야 한다.


고기 어제도 먹지 않았어요? 냉장고에 과일은 뭐 있어요? 점심에는 뭐 먹었어요? 다운로드가 되는 동안, 여자친구는 자신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지시킨다. 아~ 여자친구는 지금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목젖이 전화기 너머로 언뜻 보이는 것 같다. 설치가 겨우겨우 마무리됐다. 전광석화와 같은 터치가 이어지지만 스마트폰은 석화처럼 덩그러니 반응이 없다. 꽤나 많은 진땀을 흘리고 난 후에야, 배달주문에 성공했다.


이제 시켰어요. 시켰어요. 금방 도착한대요. 조금만 기다려요~ 여자친구는 지금 배를 문지르며 배고픔을 참고 있다. 꼬르륵 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것 같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배달을 알리는 초인종이 울릴 때 전화를 끊었다.


배고파♪


스마트폰 배터리가 다 된 것 같다.


배고파♪


배터리가 14% 이하로 떨어지면 이런 소리가 나온다. 평소에는 할아버지 같은 폰이지만 이럴 때만 귀여운 음성을 낸다. 왜 이 스마트폰은 몇시간만 통화하면 꺼지기 직전 상태가 되는 것일까. 왜 여자친구는 점심을 먹었는데도 저녁 먹을 때가 되면 아사 직전 상태가 되는 것일까. 여자친구도 14% 이하로 떨어지면 자동으로 소리가 나오는 걸까.


나도 이제 저녁을 먹어야 겠다. 오늘 하루도 힘들게 보냈다. 그냥 냉장고에 있는 걸로 간단히 해결해야지. 냉장고를 열어 두툼한 스테이크용 부채살을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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