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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Apr 19. 2020

10cm 키높이 구두

키 큰 여자 키 작은 남자

여자친구가 키가 크다. 거의 머리 하나는 차이가 난다. 나는 특별히 작고, 여자친구는 특별히 크다 보니, 차이가 두드러져 보인다. 그래서 얼마 전에 키높이 구두를 하나 샀다. 무려 10cm 키높이 구두다. 옥션에서 저렴하게 샀는데, 나쁘지 않아 보인다. 어차피 유사시에만 꺼낼 수 있으면 된다. 키높이를 신어도 여전히 여자친구가 크지만, 비슷해진 느낌이다.


여자친구를 처음 만난 날, 비가 왔다. 여러 명이 함께 있는 자리였는데, 장소를 옮길 때마다, 공교롭게 여자친구와 함께 였다. 둘이 각각 우산을 쓰면 이야기하기 어려우니, 내 우산을 같이 썼다. 여자친구 키가 크니, 팔을 있는 힘껏 펴서 우산을 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다른 들은 비교 당할까 봐 바로 옆에 서는 건 피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있는 팔 없는 팔 다 모아 우산을 받쳐들면서, 아무렇지 않게 옆에서 이야기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훗날 여자친구는 말했다. 마치 코끼리가 물을 뿌리는 것처럼,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키에 대한 열등감이 없는 거야?


여자친구는 물었다. 열등감이 없지 않았는데... 분명 과거에는 키가 작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학교 때는 외모나 키가 마치 내 전부인 것 같지 않나? 나도 그랬다.


인간의 외면은 손바닥만큼 작은 것인데, 왜 모든 인간은 코끼리를 마주한 듯 그 부분을 더듬고 또 더듬는 걸까? 코끼리를 마주한 듯 그 앞에서 압도되고, 코끼리에 짓밟힌 듯

평생을 사는 걸까?

 _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내 정체성은 나 스스로 규정할 수 없다. 타인의 눈을 통해서 나를 볼 수 있다. 마치 수많은 장님들이 더듬더듬 만져서 나라는 코끼리 한 마리를 만드는 것 같다. 다행히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고, 그들의 눈을 통해 나를 보면서, 열등감이 서서히 사라진 것 같다.


생각보다 내 정체성은 여러가지를 담고 있다. 중학생 때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외모 외에도 취향, 지식과 이론, 습관, 말투와 목소리, 갈등에 대한 태도 등등. 내 안에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었고, 각각의 이야기들은 예상외로 흥미로웠다. 나를 하나의 온전한 코끼리로 받아들이게 되니, 외모는 아주 작은 부분이었다.


내 키가 여자친구에게 장점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거다. 다만 빨간 츄리닝(첫 데이트 때 입고 나갔다), 쫄티(몸에 붙는 걸 좋아한다), 반삭에 가까운 머리스타일(머리가 다 빠져서 짧게 자른다) 등 시선을 끄는 다른 면모들이 앞다투어 달려들기 때문에, 키에 대한 진지한 고려를 할 여유가 없었다.


10cm 키높이 구두를 하루 신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데이트를 했더니, 발이 너무 아프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가 앉으니, 자연스럽게 에고고... 어르신스러운 감탄사가 나왔다. 하이힐을 신을 때느끼는 피로함이겠지? 꾸밈노동의 번거로움을 잠시나마 느껴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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