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함께 산 지 어언 32년이네. 참 많은 시간 함께 했는데, 아니 단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는데. 나는 너에 대해 왜 궁금한 적이 없었던 것일까?
이제 와서 30대가 되어서야 네가 궁금해지는 것을 보니 난 참 느린 사람인가 봐.
똑똑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실패의 경험을 크게 하고 나니까 마음이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더라. 너를 모르니 또 나를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너와 이렇게 여행을 떠나. 이 여행의 끝에서 내가 너를 얼마나 알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를 알게 되리라 믿으며 처음으로 너의 소리를 듣고 이 말도 안 되는 제주 살이를 시작했어. 우리 친해질 수 있는 거지? 잘해보자.
잘 살 수 있으리라. 항상 불안하지만 믿고 있었는데 막상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허상인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참 비참했다. 사랑이 깨지고 혼자 남은 집에서 나는 모든 물건들을 정리했다.
짐을 정리하는데 신발장 속 내 신발은 모두 커플 운동화였고 그게 아닌 것들은 동생에게 얻은 것, 그리고 만원, 2만 원짜리 구두 몇 개였다. 옷장 속도 마찬가지였다. 커플 옷들을 정리하고 나니 내 옷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지하상가에서 꾸미겠다고 큰 용기를 낸 만원, 2만 원짜리 옷 외에 고가의 옷들도 없었다. 마음도 텅텅, 신발장도 텅텅, 옷장도 텅텅 비었다.
문득 내 마음속에는 항상 여행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고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마음의 소리를 따라 쉬자는 결정을 내렸다. 지금껏 돌아보니 나는 일을 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남들은 휴학도 해보고 직장을 구하는 동안 여유도 부리는데 나는 고시 공부를 하면서도 일을 쉬지도 않았고 직장을 다니고는 그 쉴 수 있는 여유에서 조차 돈을 벌고 일을 했다. 책임감 없던 남편에 대한 불안감에 만삭이 되어서도 일을 했다. 아이를 낳고 잠시 쉬는 동안의 불안 때문이었다. 그렇게 쫓기다 보니 나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이제 먹고사는데 믿는 것은 나 하나뿐인 상황에서 나는 처음으로 마음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너는 어떤 마음으로 살았던 것인지. 그리고 휴식을 하며 나의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난 어떤 사람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