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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담 Aug 12. 2021

울고 싶은 날, 불닭볶음면

자극적인 음식에 의존하다보면 생기는 일

불닭볶음면 소스가 나온 뒤로 이를 활용한 여러 음식들을 만들어먹기 시작했다. 요리하기 귀찮은 날은 그냥 계란 프라이를 얹은 뜨거운 밥에 소스만 부어서 비벼먹는다. 전날 먹고 남은 닭고기나 돼지고기가 있으면 냉장고에 있는 야채를 후다닥 썰어서 같이 볶아 그럴듯한 볶음 요리를 만든다. 차갑게 비빔면을 해 먹어도 맛있고, 우유와 치즈를 넣은 크리미한 불닭 까르보나라도 그런대로 별미다. 인터넷에 불닭 소스를 활용한 다양한 레시피가 많지만 오늘처럼 스트레스받아서 화가 나고 울고 싶은 날에는 볶음면 봉지 뒷면에 적혀있는 대로 불닭볶음면을 끓인다.


그래도 불닭볶음면을 먹는 그 순간만큼은 못난 내 모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너무 매워서 땀을 뻘뻘 흘리며 빨개진 입술로 물과 맥주를 번갈아 벌컥벌컥 들이키기 바빠 정신이 없으니까. 그렇게 허겁지겁 접시를 비우고 얼얼해진 혀와 함께 부은 마음도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입안의 매운 기는 금방 가시는데 마음의 생채기는 그대로 빨갛게 남아있다. 십 대, 이십 대에 제대로 관리를 못하고 방치한 탓에 딱지가 앉고 그 위에 켜켜이 먼지까지 쌓인 오래된 상처들도 있다.


빨간 소스 자국이 눌어붙은 냄비와 접시를 뜨거운 물로 씻어내면서, 내 마음도 고스란히 꺼내서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닦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나는 그게 아직도 어렵다. 불편하고 어려운 감정들은 최대한 빨리 구겨서 숨겨두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른 일에 몰입하다 보면 조금은 괜찮아질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석구석 숨겨둔 감정들은 곰팡이처럼 천천히 자라 언젠가는 꼭 그 어둡고 쿰쿰한 모습을 드러낸다.


며칠 전부터 TextCoach라는 앱을 통해 문자 상담을 받고 있다.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Mental Wellness 프로그램 중 하나인데, 전문 심리 상담사와 6주 동안 매일 문자 메시지를 한 통씩 주고받을 수 있다. 화상 미팅을 통해 상담을 받는 옵션도 있었지만 이런 상담이 처음인 나는 이 앱을 설치할지 말지 고민하는데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재택근무와 함께 찾아온 우울감, 번아웃으로 고민하는 나에게 배정된 담당 상담사 F는 우리가 외면하고 피하고 싶은 감정들이 마치 파도와 같다고 설명했다.


Picture a wave in the ocean. Let on its own, the wave will build, crest, and ride itself out onto the shore.

파도가 치는 바다를 머릿속에 그려보세요. 파도는 끊임없이 생겨나 물마루를 타고 (crest) 부서지기를 반복합니다.

But now picture a giant brick wall going up in front of the wave. Instead of hitting its crest, the wave gets deflected and recedes. But the ocean doesn't stop and the wave blocked by the wall doesn't just go away, right?

이번에는 파도를 막는 커다란 벽 하나를 상상해볼까요? 파도는 벽에 부딪쳐서 그 크기와 속도를 잠시 잃고 흩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다는 셀 수 없이 크고 작은 파도를 쉬지 않고 만들어내고, 벽에 부딪치는 파도들도 마법처럼 사라지지는 않거든요.

When it (wave) recedes, it becomes part of the next wave rolling in. Each deflected wave makes the wave after it, bigger and stronger. As long as the wall stands, the waves coming at it will continue to compound on themselves.

 벽에 부딪혀 흩어져버린 파도는 그다음 파도에 스며들어 더 크고 강한 파도의 일부가 됩니다. 이 벽이 있는 한 파도는 계속 몰아쳐 부딪히게 될 것이고, 작은 파도들이 모여 더 큰 파도를 만드는 것이죠.

— 상담사 F의 문자 메시지 중에서

© Pexels, 출처 Pixabay


우리가 살면서 겪는 스트레스, 우울감, 외로움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의 파도들은 아무리 단단한 마음의 벽을 쌓아도 피할 수 없다. 당장 견디기 어려운 감정들을 외면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벽을 쌓곤 했던 나는 뜨끔했다. 하지만 상담사 F는 이렇게 쌓인 감정의 파도를 계속 피하고 막기에만 급급해하다보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1) 결국은 바닷물이 벽을 넘어가거나 (감정의 폭발), 2) 끊임없는 감정의 파도에 벽이 조금씩 부서지고 망가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번아웃, 우울증)


화와 울분을 삭이기 위해 자극적인 음식에 의존하다보면 내 마음과 감정의 미묘한 변화에는 무뎌지기 마련이다. 복잡하고 어둡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들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인데. 그냥 자면 속 쓰리니까 자기 전에 우유 한 잔 마시면서 천천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어루만져주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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