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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Nov 11. 2024

반면교사와 정면교사

일교차가 커지면서 감기가 다시 찾아왔다. 추석 즈음, 환절기로 인해 한 달간 감기로 고생하고 겨우 회복되었는데. 회복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다시 또 컨디션이 떨어지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난번 감기 때와 같은 증상이다. 미리 독감 예방접종을 맞아둔 덕에 다행히 열은 오르지 않았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임신 중기에서 임신 후기에 접어들었다는 것? 지난번에 치료를 받았던 동네 이비인후과에 다시 방문했다.


"지난번과 같은 증상이네요."

"네, 코도 막히고 목도 잠기고 오늘 오전부터는 잔기침도 시작했어요."

"이제 임신 몇 주차시죠?"

"28주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항생제나 코와 관련한 약은 처방드릴 수 없고, 타이레놀 계통 약만 드릴 수 있는데. 이제 임신 후기이시고 하니까 약은 드릴 수 없어요. 오늘 코 세척만 해드릴 테니, 혹시나 증상이 악화되면 차라리 바로 다니시는 산부인과로 바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그럼 제가 악화되지 않기 위해 뭘 하면 좋을까요?"

"따뜻한 물 자주 드시고, 목 많이 쓰시지 마시고, 최대한 몸을 편안하게 하시고 푹 쉬시는 게 좋죠. 집 안 습도도 맞춰주시구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중기 때에는 타이레놀 관련 상비약을 처방해 주시고, 임산부에게 복용 가능한 A등급 약을 보여주며 선택권을 주셨는데. '약을 줄 수 없다'는 단호함을 마주하니 좀 당황스러웠다. 하긴, 이해가 가긴 한다. 왜냐하면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시점부터 배뭉침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자궁이 커지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규칙적으로 자주 느껴지면 병원에 가야 할 정도로 조산의 위험성을 나타내는 신호로 본다몸이 아프니까 배가 자주 뭉치기 시작했으니까. 배가 뭉치는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옛날에 가지고 다니던 똑딱이있는 핫팩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똑딱하면 서서히 액체가 고체로 딱딱하게 변하던 것처럼 배가 살살 아프면서 딱딱하게 돌처럼 변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며 긴장이 된다. 호흡을 하면서 몸을 이완시키려고 하고, 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풀어주려고 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비인후과 선생님의 단호함에 코세척만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왔다. 집으로 걸어오는 짧은 거리 동안에도 배가 뭉쳤다가, 풀렸다가 했다. 안 그래도 요즘 걸으면 쉽게 숨이 차는데, 코가 막힌 상태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호흡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힘겹게 도착한 집. 오자마자 빨래를 잔뜩 돌리고 침실에 잔뜩 축축한 옷감을 널어두었다. 따뜻한 물도 자주 마시고, 최대한 누워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증상은 여전했고 코막힘으로 인해 자는 동안 입으로 숨을 쉬어서인지 목이 꽉 잠겨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남편은 몸 상태가 좋지 않고 수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니 병가를 쓰는 게 어떠냐고 했다. 망설였다. 병가를 쓰면 시간강사를 급하게 구하거나 다른 분들이 보결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피해를 주게 되니까. 차라리 내 몸이 힘들더라도 출근하고 목을 아낄 수 있는 수업 활동을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가는 동안에도 일어날 때마다 배가 자꾸 뭉치는 걸 보며, 쉬어야겠다고 판단을 했다. 관리자에게 병가를 희망한다고 연락을 남겨두었다.


관리자는 오늘 몇 학년 수업인지 묻고, 복무를 집에서 올리라고 답장이 왔다. 몸은 좀 괜찮냐며, 그런 인사말 없이 바로 업무와 관련된 내용의 대화가 오갔다. 그렇게 병가를 쓰는 걸로 결정이 되었고, 집에서 좀 쉬었다가 병원에 가려고 있었는데 핸드폰 알림이 계속 울렸다. 관리자였다. 9시에 시작된 메시지는 오후 3시가 되도록 이어졌고,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전화해서 메시지를 확인하라고도 했다. 연락의 주 내용은 과거 나의 복무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동안 사용했던 임신검진휴가를 연가로 바꾸라고 하며 본인이 그렇게 판단한 규정을 첨부한 것이다. 하아. 아파서 병가를 쓴 사람에게 당장 과거의 복무들을 수정하라는 게 합당한가. 몸을 회복하고 출근한 후에 수정해도 되는 급하지 않은 사안을 이렇게 한 시간 간격으로 꾸준히 연락하며 계속 수정할 사항을 지적하고,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할 규정을 보낸다는 게. 그때는 허가를 해줬으나 지금은 왜 해석이 달라졌을까? 나는 일종의 괴롭힘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계속 연락을 받고 컴퓨터 앞에서 일을 처리하고, 불편한 감정을 여과 없이 감당해야 한다면 차라리 출근할 걸, 싶었다. 병가 쓴 날, 내 핸드폰에는 16통의 메시지와 부재중 2통의 기록이 남았다.


저 날, 감정을 추스르기 참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 감정이 가라앉고 난 뒤 든 생각은, "저런 선배는 되지 말아야지."였다. 누군가가 힘들고 아플 때, 급하지도 않은 업무를 요청하며 마음 불편하게 하고, 심지어 "푹 쉬고 잘 회복하라"는 인간으로서 보일 수 있는 측은지심과 따뜻함도 없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도 이어서 병가를 쓰고 싶었으나,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학교 와서 아픈 게 낫다고 판단이 되어 출근했다. 



출근길에 마주친 한 선생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추워진 날씨에 몸 건강을 잘 챙기자는 말로 서로를 위로하고 하루를 잘 시작하자고 하며 각자의 교실로 갔다. 자리에 앉아 한참 수업을 준비하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돌아와 보니 내 자리에 밀크티가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선생님께서 동학년 음료를 살 때 내 것까지 함께 챙겨주신 것이었다. 마음이 울컥했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나서,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고 돌아온 답변.



주는 기쁨이 더 크고 행복하다는 말. 짧은 문장과 내 손에 쥐어진 온기가 전해지는 따뜻한 밀크티로 인해 굉장한 위로와 힘이 되었다. 


공자의 삼인행필유아사, 세 명이 함께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 떠올랐다. 타인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는 점. 즉,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갖는다면, 일상에서 나의 배움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거다. 돌이켜보면, 나를 좌절시키기도 성장시키기도 하는 건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니까. 


두 선배교사가 보여준 모습. 반면교사로 삼고 싶은, 정말 저런 선배는 되지 말아야지 하는 인간상과 정면교사로 삼을 만한, 나도 저런 선배가 되어야지 하는 순간을 기록해 둔다. 16개의 메시지와 2통의 부재중 전화, 1개의 메시지와 밀크티. 나는 후자의 선배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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