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입구는 조용하고, 인적은 드물다. 동네 초입에 위치한 슬레이트 판 지붕 아래 어느 가게 출입문 유리엔 빛바랜 우편물 도착 안내 스티커가 여러 장 붙고, 우편물 뭉치가 문고리에 수북이 쌓였다. 철물점? 아니면 조명 가게였나. 나무 새시, 쇼윈도 너머의 레트로 풍 유리갓 조명이 눈에 띈다. 전구 상자, 전선, 소켓 같은 물건들이 어지럽게 놓인 선반은 먼지가 뽀얗다. 알루미늄 새시로 된 문이 굳게 닫힌 바로 옆 공간은 블라인드로 반쯤 가렸다. ‘세탁기 칼라TV 수리 매매.’ 여전히 견고해 보이는 옛 간판을 보니 꽤 오래전 시작한 업장인가 보다. ‘칼라TV’는 요즘 쓰지 않는 말이라고 확신한다. 이쪽 문엔 우편물이 쌓이지 않은 걸 보면 두 곳은 한 사람이 운영한 가게인지도 모르겠다. 철물도 조명도 취급하다 물건 수리도 하게 됐을까. 전부터 출입이 끊긴 건 확실하다. 홍고추로 가득 메운 돗자리 하나가 가게 문 앞을 떡하니 차지했다. 해가 직방으로 드는 정남향의 오래된 가게 앞에서 이미 반 이상 태양초가 된 고추들, 곧 수확될 것이다. 고추색 채반이 준비되어 있다. 널어놓은 고추를 살피던 이가 때맞춰 가져다 놓았다.
중계본동 쪽으로 불암산 등반을 즐기는 사람에겐 익숙한 동네일 것이다. 안으로 향할수록 경사가 급해지며 산과 가까워지는 이 구역은 내년 하반기 재개발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1) 1960-1970년대 서울 도심 개발에 내몰려 허허벌판에 옮겨져 맨손으로 생활을 꾸리고 마을을 변모시키며 살던 백사마을 원주민 상당수가 이사를 나갔다. 이곳으로 옮겨지던 처음 그때처럼. 나 너 할 것 없는 맨손들이 함께 지은 생의 이야기가 이 골목 저 모퉁이에 깃들어 마을 공간 전체에 묻어 있지만 흔적도 없이 또, 밀려 나갈 것이다. 도시의 가난한 이들의 동네가 ‘정리'되어 온 그 방식으로. 용적률 꽉 채운 콘크리트 더미에 땅을 내어 주고서. 맨손, 생, 이야기, 이곳이 모조리 철거되기 전을 목격하고 싶어서 안으로 더 걸어 들어간다.(2) 나는 지나간 생활의 장면으로 연결되는 장소와 공간을 좋아한다. 오래될수록 다른 구석이 많을수록 내가 모르는 타인의 삶들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으니까. 아무 데나 일률적으로 빽빽하게 밀고 들어가는 아파트의 못생김은 싫은데, 도시 미관을 망치는 게 과연 낡음일까. 잘 모르겠다.
내가 들어선 고추 말리기 딱인 길은 아마 동네의 메인 골목일 것이다. 왕복 2차선까진 아니어도 차가 드나들며 사람도 걸을 수 있는 폭이다. 길을 통해 안으로 더 들어가면 양쪽으로 난 골목골목을 통해 사람들이 나오고 돌아갔을 집이 있다. 저 앞으론 갈래 길도 보인다. 언뜻 빈 마을 같아도 누군가는 밖에 건조대를 펼쳐 빨래를 널었고, 길가 이런저런 화분에서 식물이 자란다. 가지랑 청양고추도 열렸다. 지금은 중천에 있는 해가 서쪽으로 넘어갈 무렵이면 누군가의 고정석일법한 ‘스폿’도 아직 있다. 자주 쓰이는 듯 파라솔 아래에 펼쳐진 먼지 없는 의자, 그 옆은 역시나 빨래 건조대다. 옷걸이들이 걸린. 식물이 잘 자라지도, 빨래가 잘 마르지도 않는 집안에서 미닫이 현관문을 열어 놓고 텔레비전을 보는 어떤 할머니와 아저씨의 모습을 곁눈으로 지나간다.
불현듯 한 간판에 꽂혔다. ‘건반이랑피아노.’ 동네 아이들은 여기서 하농과 체르니 교본을 치며 앞으로 자신이 피아노에 취미를 붙일 것인지 아닌지 알아 갔을 것이다. 어떤 아이는 선생님한테 몇 번 더 연습해야 하느냐고 자꾸만 묻고, 자기처럼 피아노를 뚱땅거리던 친구가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을 것이다. 울고불고 싸우면서도 같이 놀 친구를 만들며 관계를 체득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아마 이사 전날까지도. 오래된 공가 안내문이 붙은 이 학원이 있는 동네를 가장 먼저 떠난 아이라면 지금은 성인일지도 모르겠다. 문이 굳게 잠긴 학원 간판의 두툼한 돋음체, 녹슬지 않게 유지하면 유행도 안 탈 클래식한 디자인이 예쁘다 여기며 요즘 내가 다니는 동네 피아노 학원 간판은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는다. 나도 동네 애들이랑 인사하고 가끔 선생님의 엄마랑 딸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동네도 오래된 걸로 치면 손가락에 꼽지만 비디오 만화 가게의 흔적은 뒤꽁무니도 발견한 적 없는데, 이 동네엔 ‘본동 미디어’가 있었다. 미디어라는 단어를 쓴 점이 인상적인 업장 쇼윈도는 좀 충격적이다. 전체가 불투명하다. 노란 시트지 위에 검은 시트지로 만든 글귀를 붙여 취급품을 강조했다. 비디오, 테이프, CD, 소설, 만화. 나라면 가게 앞까지 왔다가 들어가기가 꺼려질 거 같은데, 혹시 여기 출입을 부모에게 들키기 싫은 애들을 배려한 건가? 아무튼 비디오와 만화를 가게에서 빌려 본 건 내 경우 적어도 20년 전이다. 본동 미디어는 대체 언제까지 영업했던 걸까.
발길을 돌려 아까 그냥 지나쳐 간 동네의 좁은 언덕 골목길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제지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안으로는 가지 마요.”
딱 봐도 외지인인 내 동선을 좀 전부터 신경 쓰던 아저씨들일 거다. 좁은 골목을 눈앞에 둘 때부터 살짝 눈치가 보였던 터라 바로 알아듣고 뒤돌아 웃으며 아저씨들을 보았다.
“건물이 노후해서 무너질 수 있어요. 뱀도 나오고요.”
겁 주려는 소리 같지만 그래도 뱀은 질색이니 확인한다.
“뱀이요?”
그가 다시 대답한다.
“그럼요 뱀 나와요. 좁은 골목은 가지 말고 큰 길로만 다녀요.”
주민처럼 보이는 아저씨 세 명. 한 분은 다리를 절뚝이고, 다른 한 분은 한쪽 눈이 불편한지 안대를 착용했다. 살갗을 태울 듯한 정오의 가을볕이 버거운지 안대를 착용한 분이 공가 출입문 턱에 걸터앉는다. 아저씨들 말에 수긍하며 공손히 답하고 여기 사시느냐 물었다.
“안전관리팀이에요.”
한때 주민이었을 수도 있는 안전관리팀이 멀어지자마자 가장 가까운 골목 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대화 소리가 들린다. 집 앞에 잘 자란 화초와 가정용 LPG 가스통이 놓은 가구의 대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두 사람의 말소리다. 건물 붕괴 위험도 있고 뱀도 나온다지만, 진입할 수 있는 좁은 골목이란 역시 그 안 쪽에 아직 사람이 지낸다는 의미다. 사람만큼 커 버린 잡초가 보초라도 서듯 골목 입구를 막고 있거나, 철거 잔해가 집으로 가는 좁은 골목으로 쏟아져 나올 듯 틀어막힌 길은 뱀이 안 나와도 어차피 들어갈 엄두가 안 난다. 이미 알아보기 힘든 장소가 됐을 테니까. 어떤 공가는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문간엔 큰 자개 거울과 보라색 빨래판이 있다. 묵은 곰팡이 냄새도. 집으로 가느다랗게 들어오는 빛 아래서 빨래도 하고 외출 전 차림이 맘에 차는지 마지막으로 살피던 곳인가. 처음 보는 빨래판 색에 마음을 뺏겼는데, 그 옆엔 색을 맞춘 비누 선반도 걸려 있다. 여기 살던 분은 최소 평소 색을 고려하는 분일 거다. 없는 형편끼리도 살림살이는 다 다르고, 그 와중에 가장 잘 나가던 시절 취득한 고운 물건 하나쯤은 누구나 갖고 있기 마련이다. 남의 살림살이 구경은 그 사람을 그려 보는 데 도움 되는 맛이 있다. 깨진 유리창 안으로 부엌에 누가 그릇들을 통째 놓고 떠난 집을 발견하곤 그 앞에서 시간을 꽤 보냈다. 열리지 않는 창문 구멍으로 무게가 만만찮을 돌솥 뚝배기, 영롱한 무늬가 새겨진 백자 그릇이 튀었다. 나만큼 밥 짓는 데 취미가 있으셨나, 밀크 글라스가 참 예쁘네, 이사를 너무 급히 가느라 놓고 가셨으려나. 깨진 창문을 렌즈 삼아 집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번엔 앞쪽에서 아주머니 소리가 들린다. 언덕 아래로 내려오던 분이다.
“고양이 구경해요?”
제대로 못 듣고 “네"라고 답했다. 아주머니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똑같이 쭈그리고 앉아 깨진 유리창 안을 살핀다.
“어딨어요 고양이?”
그제야 제대로 알아듣고 놓고 간 살림 구경을 하고 있었다고, 그릇들을 다 놓고 갔나 보다 알려드렸다. 아주머니가 일어나며 말한다.
“사람이 이사를 갈 땐 다 가지곤 못 가지.”
아주머니도 여기 사시느냐 물으니 온 곳을 가리킨다. 저 위에 산다면서. 언제 이곳을 떠나느냐고 물었다.
“관리처분인가 떨어지면 가지 말라고 해도 이사하는 수밖에 없어요~.”
‘아, 그렇구나.’ 첫인상에서부터 느꼈는데, 여기서 지나친 사람들 중 유독 활기찬 분이다. 사람들이 떠나가는 동네에 남아 있다가 결국에 이사 나가는 일이 달갑진 않을 텐데, 그동안 마음의 변화가 있었을까? 그런데 고양이를 좋아하시나 보네, 참 친절하시고. 이미 다 계획이 있으신가? 보상을 나쁘지 않게 받으셨나, 조합원 운영진일까? 제멋대로 드는 생각 중에 다시 갈 길을 가는 아주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그녀의 마지막 인사가 인상적이다. 간간히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말.
“예수님 믿으세요~.”
오늘 최고 기온이 33도, 몸통 앞뒤로 흐르는 땀에 리넨 티가 축축해졌다. 경사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이는 언덕을 등지고 올라온 길로 발을 되돌려 내려가기로 한다. 조금 내려가니 올라올 때 놓친 물 담긴 사발 그릇이 눈에 들어온다. 길가의 집 벽 아래 있다. 플라스틱 포장 용기에 반 이상 담긴 고양이 밥도 있다. 가까 마주친 굶진 않은 거 같았던 길고양이의 식당인가. 지금 막 뒤에서 기척을 낸 건 검은 중견, 시바견이다. 내가 돌아보자 너무 소스라치게 놀라며 좁은 골목으로 도망친다. ‘뭘 저렇게까지….’ 무서운 건 내 쪽 아닌가 생각하며 천천히 쫓아간다. 멀찍이 서서 얼굴만 마주 본다. 한 발만 더 붙어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이만 돌아서려는데 짖지도 않고 줄행랑만 치던 개가 거리는 유지한 채 또 따라온다. 뒤에서 기척을 내길래 돌아보니 벌써 또 도망쳐 나무 뒤에 숨었다. 쫓아가면 또 줄행랑. 낯선 사람들에게 뎄나, 앞선 철거 장면의 충격이 컸나. 그 개가 피신처 삼는 좁은 골목길은 철거 쓰레기 더미로 거의 없어지다시피 해서 진입하기 어렵다.
마을 초입으로 다시 향하는데 배달 중인 우체부가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오는 모습이 가까워진다. 열려 있는 집 문으로 들어가 한 차례 배달을 마치고는 그 옆집 앞에서 전화를 걸더니 사람 좋게 웃으며 집에 없는 주민의 물건을 집에 넣어주고 갈까 묻는다. 난 우리집 택배 기사님과 얼굴은커녕 목소리 한 번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전화를 마친 우체부 아저씨가 되돌아 내 걸음을 금세 앞질러 다른 골목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간다. 조선대파 화단이 3X15 행렬로 자라는 집 앞에서 다시 조우한 김에 말을 붙였다. 주민들이랑 잘 알고 지내시는 거 같다고.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나 빠져나갔느냐고.
“반은 이사 나갔죠.”
“아직 반이나 남아 계세요?”
“네, 아직 계셔요.”
남은 이가 거의 없다고 여겼는데, 내가 이 동네를 영 제대로 못 봤구나. 한 번으론 결코 알 수 없는 이 동네는 과거에도 지금도 이렇게 조용할 리 없다. 또 올 생각을 하며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퇴근하는 기사님이 카메라를 든 내게 말을 건다. 없어지기 전에 찍어 놓으려고 왔느냐고. 버스 앞에서 찍어달라 포즈를 취하던 국내에 흔치 않은 인물. 그렇다는 내 대답에 이 말 저 말 보태다가 묻는다.
“동네 보니까 슬프죠? 쓸쓸하고.”
즉답이 안 나온다. 오늘 본 몇 장면에 느낀 감정이 슬픔인가? 모르겠다. 비슷한 감정이 잠시 스쳤다 해도 짧은 시간의 여행자인 내가 그걸 슬프다 해도 될까? 또 모르겠다. 고양이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레 내 옆에 궁둥이를 붙였던 활기찬 아주머니, 고추들과 가지와 꼿꼿이 자라던 조선대파, 주민과 전화로 ‘스몰토크’를 나누던 우체부 아저씨가 떠오를 뿐이다. 그 상태로 애매한 대답을 한다.
“글쎄요. 여전히 사는 분들이 있으셔서요.”
(1) 백사마을 재개발 논의가 시작된 때는 토지 불하로 토지주가 된 이들이 ‘개발추진위원회'가 꾸린 1993년이다. 2008년 개발제한구역이 해제되고, 2009년엔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됐다. 당시는 이명박 정권 초기부터 추진하던 뉴타운 사업 열풍에 너도 나도 뉴타운 꿈을 꾸던 때였다.
(2) 백사마을 재개발은 토지의 30%는 ‘백사마을 주거지보전사업'으로 진행해 저층의 임대주택이 지어질 예정이었다. 건축가 10명이 이끄는 실험적 사업으로, 마을에 형성된 지형, 터, 골목길을 보전하고, 초기 원주민들이 서로 관여하며 집을 지은 맥락을 반영하여 집을 디자인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비용 문제로 원래 계획에서 변경된 안으로 개발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원안이든 변경안 추진이든, 고령의 저소득층이 과반수 이상이었던 백사마을 원주민이 재개발 이후 본거지로 얼마나 많이 되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긴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