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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Aug 05. 2022

사랑이 있었음, 투쟁의 공간에

세월이 가면 / 가슴이 터질듯한 /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 최호섭, 〈세월이 가면〉


어느 토요일 오전에 늘 그렇듯 눈을 뜨고도 한참을 누워있는데 이 노랫말이 떠올랐다.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결국 유튜브로 원곡을 반복해서 듣는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듣고 있다.) 가사까지 따라 부르면서 자꾸 목이 메는 내게 동거인이 물었다. 옛 애인이라도 생각난 거냐고.


그보단 어제 마주쳤던 풍경과 어떤 이들을 떠올렸다. 어제는 금요일이었고, 경의선책거리에 있는 오래된 소금구이집에서 반주로 소주를 곁들인 저녁 약속이 있었다. 마침 가까운 거리에 있던 동거인과 만나서 함께 귀가한 날이었다. 을지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 두 정거장을 더 가야 했지만, 그날은 왠지 걷고 싶어서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을지로3가역에서부터 집 방향으로 걷는 중에 이 동네에서 아르바이트하던 3년 전이 생각났다. 그리고 골목 안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8월이었다. 옷이 다 젖고 땀이 배와 등을 타고 흘러 옷을 다 적실 정도로 무더웠던 때 세운지구 일대에서 세입자 상황을 조사하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서기로 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정비사업의 종합 대책을 세우기 위해 기존 세입자들 상황을 설문으로 받아오는 일이었다. 이미 몇 번의 강제집행을 체험한 세입자 공장주와 상점주들은 이 용역 사업의 주인인 정부에 기대가 없었고, 촉박하게 이루어지는 듯한 이 조사가 달갑지도 믿음직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상인회에서는 상인들이 우리 조사에 응하도록 협력했다. 조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업장을 이전해야 할 세입자들의 재산 규모나 공장 특징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때 상인회 사람들과 함께 을지로의 오래된 점포에서 밥 먹은 적이 있고, 같이 땀 흘리던 아르바이트 조원들과도 허름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오랜 도심의 골목골목을 샅샅이 찾아다니며 40-70대 사장님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으면 자연히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서울이 반백 년 사이에 어떻게 변했는지, 그렇게 오래전에 여기 형성된 공장들을 쭉 존재할 수 있게 한 필요는 뭔지, 그런데 왜 제때 공장 환경이 개선되지 않고 방치되다시피 했는지, 도심에 다양한 소규모 공장 생태계가 있다는 것은 그 사회에 어떻게 문화적 경제적 자산이 되는지에 관한 것들…. 을지로3가, 을지로4가를 지날 때면 그때 장면과 기억이 생생하게 소환된다.


좁고 여러 군데로 난 오래된 길, 공장 소음과 철과 기름 냄새, 어떤 곳을 지날 때마다 맡는 하수구나 암모니아 냄새, 좁은 골목에 물건을 나르던 트럭들, 쟁반 식사 배달을 하는 사람, 땀을 뻘뻘 흘리며 물동이를 나르던 남자, 일하다 말고 내가 내민 설문지 문항을 써넣던 마디가 하나씩 없거나 그을린 손, 글을 쓸 여유가 없어 내가 던진 질문에 기억을 더듬으며 답하던 분들의 표정, 젊은 사람들이 수고한다며 주섬주섬 레쓰비나 비타500 같은 음료를 꺼내던 뒷모습 같은 것들. 그런 기억 때문에 언제부턴가 일부러 을지로 거리를 지나다니지 않게 된 것도 있었다. 그때 집중적으로 돌았던 길과 수십 개 공장 자리가 철거 쓰레기 더미로 뒤덮인 사진을 보았을 때 이미 예고된 일이었음에도 충격이 컸다. 세운상가와 가까운 공구 상가를 지나가면서 사람들이 만들던 활력이 사라진 광경은 우울 그 자체였다. 뜨거운 여름에 만났던 사장님들이, 그들을 통해 만들어진 오랜 일의 역사가, 이야기가 그 장소에 마치 없었던 것처럼 될 공간의 미래가 무섭게 느껴진 이후로 잘 가지 않게 된 것 같다.


어쩌다 귀갓길에 도로변 인도에서 발길을 틀어 들어선 골목은 그 공장들이 있던 곳의 맞은편 동네였다. 아직은 그때 이용한 식당과 슈퍼가 부서지지 않고, 있었다. 그곳은 맞은편 동네와는 극과 극의 분위기였다. 이면도로를 가득 채운 테이블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닥다닥 붙은 야외 술상에 앉아 왁자지껄 떠들며 한껏 ‘불금’을 태우는 중인 사람들의 말소리, 맥주 유리잔으로 건배하거나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들이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좀 다른 골목으로 이동해서 걸어볼까, 고개를 이쪽으로 저쪽으로 돌려봐도 별 소득이 없었다. 이쪽저쪽 다 같은 느낌인데, 한 면이 전부 만선호프였다. 이 골목이 바로 그 유명한 노가리골목, 아니 만선호프 골목이었다.


내게는 너무 별로인 풍경. 정취나 재미같은 건 모르겠고 대화소리가 어떻게 들릴까 싶게 귀가 얼얼한 거대한 술길, 여기도 만선호프 저기도 만선호프인 그 골목은 마냥 지저분해보였다. 3년 전에도 많이 회자했지만, 이 정도로 골목을 장악한 가게는 아니었는데.


만선호프의 사세 확장은 대단했다. 장악했다고 해야 하나. 노가리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사실상 그 골목 시조인 최초의 프랜차이즈 생맥주 가게 42년 차 ‘을지OB베어’를 만선호프가 지난 4월에 강제집행으로 접수해 버렸다는 소식을 SNS를 통해 미리 알고 있었다. 기사로도 읽었다. 그 자리에 11호 오픈을 준비 중인 만선호프는 올해 초부터 을지OB베어 건물의 62% 지분을 소유한 건물주가 된 이후 합법적으로 공간을 강제 흡수하는 작업을 진행했고, 유사한 방식으로 이미 열 곳의 다른 가게들을 접수했던 그 골목의 ‘불도저’였다.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재산권 행사 이슈일 뿐이라며 나름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거대 호프 업체가 만선호프고, 마찬가지 논리로 을지로 노가리골목을 2015년부터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한 서울시도, 야간 영업을 허가한 중구청도, 주류 점포 최초로 을지OB베어를 ‘백년가게’로 선정한 중소벤처기업부도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는 중이었다.


실은 나도 그 논리에 혼자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있었다. 부당하지만, 법적으로 큰 하자 없이 어떤 장소와 문화와 기억들을 부시고 없애는 데 능한 상대와 싸우는 사람들 소식을 계속 접하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건 이 사회가 허용하는 선이기 때문이다. 의문도 들었다.


‘이미 진 싸움을 왜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하는 걸까. 노래하고 춤추고 먹으면서, 외치고 울면서 ‘이길 수가 있나?’ 


2019년 8월에 세운지구에서 만난 사장님들 중에 어떤 분들은 문래동으로 이주했다. 아예 서울 밖으로 사업장을 옮기거나 접은 분들도 있겠지만, 조사원 아르바이트 종료 후 얼마 뒤 추가 인터뷰를 도우러 문래동으로 이주한 사장님 몇 분을 만나러 갔었다. 그중엔 새벽에 일하던 중에 옆 건물이 기습 철거당하는 소리에 놀라서 자기 작업장에서 대피하듯 나왔던 분도 있었다. 우주인 김소연 씨의 ‘등고선 측정기’를 제작한 그 사장님은 중구청이 2016년부터 운영한 골목길 투어 ‘을지유람’ 코스를 다룬 언론에서도 여러 번 소개됐었다. 철거 때의 공포를 떠올려 들려주던 그의 얼굴은 힘이 있었고, 서울 문래동에 새 둥지를 튼 이웃 사장님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일상의 웃음이, 소박한 역동이 느껴졌다. 그분들이 다시 자리 잡은 공장을 구경할 때도 그랬다. 이 기억을 소환하고서야 잊었던 것을 새삼 알았다. 진 쪽은 철거당하고 이주한 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일궈온 장소에 켜켜이 쌓인 문화와 이야기들을 잃어버린 사회, 그 빈곤한 시간에 대항해 싸우지도 않으며 살아갈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을지OB베어가 있던 공간은 지지 않기 위해 진 싸움을 하는 장소라는 진실을.


노래하고 춤추고 먹으면서 외치는 그 싸움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42년 전 지하철 기관사들이 근무 교대를 하고 오전 퇴근길에 들러 100원짜리 노가리와 380원짜리 맥주 한잔을 마시던 그 을지OB베어 앞에서. 이 가게가 원래 자리에서 다시 영업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지지 않기 위해 나도 곧 그 장소에 가야겠다. 세월이 가면 그 장소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겠지만, 한없이 소중했던 이들의 이야기와 노가리를 안주 삼던 소박한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함께 기억하고 싶다.

https://www.flickr.com/photos/tfurban/14396045482


<복음과상황> 공간 & 공감에 연재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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