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 받을 자격이 있는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 전국책

예양은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전환되는 시기를 살아간 사람이다. 그나마 명분이라는 것이 남아있던 춘추오패의 시대에서 무한 경쟁의 시대인 전국칠웅으로의 전환은 중원의 강대국 진(晉)나라가 6경 즉 여섯명의 대신에 의해 쪼개지며 시작된다.


6경은 범씨(范氏), 중항씨(中行氏), 지씨(知氏)와 나중에 전국칠웅에 오르는 삼진(三晉) 한씨 (韓氏) 위씨(魏氏), 조씨(趙氏)이다. 초기에는 이들 중 지백이 가장 강하였다. 먼저 범씨와 중항씨를 멸하고 한강자, 위선자, 조양자에게 땅을 바치라 협박하였다. 한강자와 위선자는 지백을 두려워하여 땅을 바쳤지만 조양자는 끝내 땅을 바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지백은 한강자와 위선자의 군사까지 이끌고 조양자의 거점인 진양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조양자는 2년이나 버텼고 결국 한강자와 위선자를 설득하여 함께 지백을 공격하여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조양자는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은 지백을 지독히 증오하였고 그의 씨족을 멸한것으로도 모자라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을 하여 요강으로 썼다. 지백의 신하였던 예양은 그 소식을 듣고 복수를 결심한다.

먼저 이름을 바꾸고 조나라 궁중 죄수들 틈에 들어가 변소를 청소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어느날 조양자가 변소에 갔는데 느낌이 이상하여 신하들에게 확인을 시켰고 예양은 발각되었다. 예양은 칼을 뽑아들고 저항했으나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신하들이 예양을 죽이려 하자 조양자가 말렸다.


“의사로다. 놔주어라. 내가 살았으니 되었다. 지백은 이미 죽었고 그 후손도 없어 신하된 자로 주인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니 천하의 현인이다.”

하고는 예양을 풀어주었다.


풀려나온 예양은 몸에 옻칠을 하여 피부병이 들게 하고 눈썹과 수염을 뽑아 남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다. 어느날 길에서 자신의 부인을 만났는데 알아보지 못하였다. 부인이 이르기를 “얼굴은 남편과 다른데 목소리는 많아 닮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예양은 숯을 삼켜 목소리 마저 변하게 하였다.


그의 친구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충고하였다.

“어찌 이리 어려운 길로 가는가? 자네의 실력이면 조양자의 신임을 쉽게 받을 수 있을텐데 먼저 신뢰를 얻은 후 일을 도모하면 쉽지 않겠나?”


예양이 답하였다.

“먼저 숙인 후 복수를 하는 것인데 이는 모시던 임금을 죽이는 것이니 군신지의를 어기는 것이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군신지의를 밝히기 위함인데 몸을 굽혀 섬기면서 죽이려 하는 것은 두마음을 품고 섬기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이렇게 까지 하는 것은 두 마음을 품은 신하를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네.”


예양은 어느날 외출한 조양자를 다리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리에 이르러 말이 먼저 놀랐다. 사람들을 시켜 확인하니 예양이었다.


조양자가 크게 꾸짖었다.

“그대는 애초에 범씨와 중항씨를 섬겼다가 이들이 지백에게 멸망당하자 지백을 섬겼다. 이제 내가 지씨를 멸하였으니 마땅히 나를 섬겨야 하거늘 어찌 이리도 나를 죽이려 드는가?”

예양이 답한다.

“범씨와 중항씨는 나를 보통의 그저그런 신하로 대했소. 그래서 나도 그저그런 신하로 답했을 뿐이오. 그러나 지백은 나를 국사(國師)로 대접했소. 이제 지백의 가족도 모두 죽어 없으니 내가 국사의 자격으로 그를 위해 복수하려 하는 것이오.”


이에 조양자가 감탄하며 답한다.

“예양. 그대가 지백을 위함은 그정도면 되었소. 나도 그대를 한번 놓아주었으니 그만하면 족한줄 아시오. 이번에는 놓아줄 수 없소.”

예양이 마지막으로 부탁하였다.

“그대는 이미 나를 한번 놓아주어 천하에 어질다 여기지 않는 이가 없소. 나 또한 죽음을 받아들이겠소. 그러나 원컨대 그대의 옷이라도 찔러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소.”


이에 조양자가 옷을 내주자 예양은 옷을 세번 베고 소리쳤다.

“너 예양은 과연 지백의 원수를 갚았도다.”

그리고 칼을 안고 넘어져 자결하였다.

- 전국책 (고려원, 김동석역해, p31-34)


지백은 명군이 아니었다. 아니 폭군에 가까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모든 패자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과장이 많이 섞여 있을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기록에 따르면 지백은 탐욕스럽고 난폭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조양자는 꽤 능력있는 군주임에 틀림없다. 그가 어질었는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진양성에서 2년이나 버티는 동안 위기에 처한 그를 신하들과 백성들이 배신하지 않고 잘 단합하여 방어하고 결국 반격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회사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그동안 모신 상사가 여럿 된다. 정말 존경하는 상사도 있고 인품이 훌륭한 상사도 있었다. 능력이 발군인 분도 있었고 하루도 마주치기 싫은 상사도 있었다.

상사의 유형별로 장단점이 있다. 인품이 훌륭한 분과 함께 있으면 회사생활이 즐겁다. 그리 큰 풍파가 없다. 능력이 뛰어난 상사와 함께 일하면 정말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인데 성공의 길로 들어선다. 한마디로 묻어가기만 해도 탄탄대로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들과 천년만년 함께 하지는 않는다. 부서가 바뀌거나 상사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그냥 남이다. 회사는 가족이 아니다. 일로 만난 사람 일이 끝나면 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 크게 아쉽지도 않다.

그럼 기억에 남는 상사, 헤어짐이 아쉬운 상사는 누굴까?

그럼 지금까지 함께 했던 상사 중 어떤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고 고마울까?


차장 말년차였던 나는 새로운 과제를 해보겠다고 회사에 제안서를 냈다. 2차에 거친 심사를 통과하고 최종적으로 다른 연구센터쪽에서 진행하는 것이 적합하겠다는 의견서를 받았다. 아무리 심사를 통과했어도 그쪽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결국 끝인 상황. 이미 현재 몸담고 있는 팀에도 결과가 알려진 만큼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과제를 받아 검토하라니 그쪽 센터장님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일단 프레젠테이션을 해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난 절박한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발표를 했고 센터장님은 조용히 듣기만 하셨다.

발표가 끝난 후 센터장님이 말씀하셨다.

“난 이 과제에 대해 잘 모르겠어요. 오늘 처음 듣는데 내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니라서요. 하지만 한가지는 잘 알겠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여러 과제를 봐왔지만 과제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과제를 성공시키더라고요. 김차장은 이 과제에 대해 열정과 확신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난 이과제가 잘 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그해 겨울 책상 하나뿐인 1인 과제를 시작하게 된다. 중간에 인원이 충원되고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3년 후 정식과제가 되며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지만 2년만에 갑작스럽게 과제는 중단되게 된다.


회사에는 항상 다양한 이슈가 있고 어떨 때는 나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슈가 나를 직격하며 지나가기도 한다. 그해 겨울 난 본격적인 연구과제 리모델링의 첫번째 대상이 되어 과제가 사라지는 일을 겪게 된다. 그때는 아무도 내가 그냥 시작에 불과하고 나를 동정하던 모든 과제들이 나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과제가 중단되고 얼마 후 센터장님이 찾으셨다.

“김팀장 때문이 아니야. 내 잘못이 커. 내가 좀 더 잘 했어야 했어.”

센터장님은 못내 미안해 하셨다.

난 반대로 센터장님에게 미안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렇게 능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리더십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도 그냥 평범한 수준이라 생각한다. 나도 내 역량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센터장님은 날 믿어주셨다. 내가 잘 하고 있다고 잘 해낼 것이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래서 과제가 중단 되었을 때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내 마음 속에는 다 내 잘못이라는 말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잘 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내가 태만한 결과가 이것이라고 자책하였다.


센터장님도 이 폭풍을 빗겨 가지 못하였다. 난 센터장님이 나름 유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경영진의 판단은 달랐던 듯 하다. 과제가 사라지는 폭풍속에서 난 내 팀원들을 챙기랴 새로운 길을 모색하랴 정신이 없었고 회사를 나가는 센터장님과 제대로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다행히 다른 곳에서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했었던 기억이 있다. 나도 몇 년의 고생끝에 새로운 과제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느정도 안정이 되지 제일 먼저 생각 난 것이 예전 센터장님이었다.


내가 그분을 기억하고 고맙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분이 부족한 나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예전에는 회사에서 충성을 강요하던 때가 있었다. 로열티가 부족하다는 비난을 예사로 하던 때도 있었다. 요즘은 MZ세대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에게 이런 강요가 불가능 하다고 한다. 그들에게 공정한 대접을 해야만 그만한 일을 한다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라고 한다. 아니다 항상 그랬었다. 예전에도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 나를 알아주고 나를 인정해 주는 곳이라면 내가 그에 답하지 않겠는가? 지금 상사로서 부하직원에게 존경을 원한다면 회사가 직원의 충성을 원한다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가? 난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들이 진정 나에게 귀한 존재이고 내가 존중을 하고 있는가를. 내가 그들을 그냥 보통의 팀원으로 생각한다면, 보통의 직원으로 생각한다면 그들 또한 보통의 상사, 보통의 직장으로 대접할 것이다. 예양이 범씨와 중항씨에게 했던 것처럼 인연이 끝나면 그냥 아무일 없듯이 돌아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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