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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이사는이야기 Jan 01. 2024

Ep.32 페루 장교단의 스탠딩 파티 초대

[군함 타고 세계일주]

“행사는 또 하나의 과업이다!!”


해군사관생도들에게 행사란 또 하나의 과업이다. 특히 순항훈련기간에는 태권도 공연, 시가행진(퍼레이드), 리셉션(함상 파티), 수많은 만찬 등등. 각 기항지마다 최소 2~3번의 행사가 치러진다. 함상 파티, 만찬이라니. 듣기만 해도 즐거워 보이는 행사들은 우리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과업’으로 치부되곤 한다. 왜냐하면 얼마 안 되는 정박기간, 그것도 매일 아침에 나가 저녁에는 복귀해야 하는 우리 사관생도들에게는 이런 행사들이 짧디 짧은 여행시간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부대 안에서 화려한 행사를 하는 것보다 비록 김밥이나 라면일지라도 외출 나가서 동기들과 함께 먹는 게 더 행복한 느낌과 같달까. 그렇기 때문에 희망자로는 할당인원이 채워지지 않아 결국 차출할 수밖에 없게 된다. 차출방식은 다음과 같다.


- 가위바위보! 오예!!!

- 아!!!!!!!!!!!!!!!


페루에서의 출항을 하루 앞둔 날.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페루를 느낄 수 있는 황금시간대 저녁. 나는 영광스럽게도 페루 군인들과의 저녁만찬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페루 구시가지를 떠나 만찬장으로 떠나는 길이 얼마나 아쉽던지. 아니 즐겁던지. 너무 즐거워서 말도 헛 나오는 것 같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페루 구시가지의 풍경은 노을이 더해져 더욱더 매력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안녕,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는 곳’. 우리를 태운 소형 버스는 수도 리마를 지나 해군기지가 있는 카야오로 향했다. 카야오에 다다를 무렵 붉게 물들었던 노을은 어느덧 사라지고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있었는데, 버스는 그 어둠과 어울리는 항구의 좁아지는 골목 안으로 서서히 들어갔다. 점차 사람의 인적이 없어지고 가로등의 불빛도 줄어드는 곳을 지나가며 ‘아니 우리 페루 해군 만나는 게 아니고 어디 컨테이너에 실려서 해적한테 팔려가는 거야?’ 싶을 때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버스는 어느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생도들은 내려서 2층으로 올라가라” 동승하신 훈육관님의 지시 아래 우리는 계단을 올라 만찬장에 들어갔다. 은은한 조명 아래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분위기 좋은 곳이었지만 우리는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여행할 시간을 빼앗겼으니 그나마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겠다는 우리의 마음과는 달리 간단한 쿠키, 빵, 음료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밥도 안 먹고 왔기에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훈육관이 우리를 보고 한 마디 하신다.


- 페루 해군에서 너희들을 위해 와인과 페루 전통주를 준비했다고 하니까 오늘 음주를 허가한다. 많이 먹지는 말도록.

- 오예!

- 오예 외친 사람 거수. 너는 술 한 잔으로 제한이다. 알겠나?

- 예…?


훈육관님이 화나신 건지 놀리시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친구를 제외하고 나머지 우리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 생도들에게는 3금제도가 있어서 허가가 없으면 술을 먹을 수 없었는데, 금주령 아래 살아가던 우리에게 페루 해군의 배려(?)로 술 한 잔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당당하게 와인 한 잔을 하며 페루군 장교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날은 또 하나의 페루 해군의 배려로 젊은 페루군 장교들만이 참가하는 행사였다. 메인테이블에 제독, 서브 테이블엔 대령들이 가득했던 다른 만찬들과는 달리 우리 또래의 장교들과 편하게 이야기 나누게 되니까 더 편하게 서로의 좋은 점, 어려운 점들을 이야기 나누며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


와인을 자랑스러워 하는 우리들 / 페루장교단과의 사진 한 컷


그렇게 대화에 취하는 건지 술에 취하는 건지 조금씩 분위기가 올라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처음 보는 페루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무대가 만들어졌다. 멍하니 그 장면을 보고 있는데 그들 중 하나에 의해 갑자기 무대 중앙으로 끌려가버리고 말았다.


- 뭐야! 뭔데…?

- Dance! Dance!


갑자기 무대 중앙으로 끌려가버린 바람에 긴장해 있던 나는 춤을 추라는 그들의 말에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이 시키는 것처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밀짚모자를 발로 날려 머리에 안착시키는 묘기도 보이다 보니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왠지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게 느껴졌다. 그저 과업이라고 생각했던 시간. 나의 여행을 단축시키게 만든 행사가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만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 페루 떠나기 싫다! 술도 맛있고(?)’


얼떨결에 올라간 무대 / 그 이후 무아지경의 춤타임


군대 과업에도 행복은 있는 걸 보면 삶은 어떻게 될지 몰라 참 재미있다. 페루를 떠나는 건 너무나도 아쉽지만 어떤 미래가 우리 앞에 있을지 모르니까 얼마나 재밌는가. 페루 장교단의 스탠딩 파티를 마지막으로 우리 순항훈련전단은 페루를 떠나 칠레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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