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바쁘다. 런던의 첫날

컬리우스 역- 피카디리 광장- 차이나 타운- 빅벤- 런던 아이

by 옥상평상

11살 일기

호텔에 가자마자 옷을 벗고 장난감 놀이를 했다. 옷을 벗으면 밖에 안 나갈 줄 알았는데 작전이 실패하고 말았다.


9살 일기

이쁜 누나가 말을 걸었는데 아빠가 안 반가워했다. 이상한 아빠다. 누나랑 더 말하고 싶었는데.




윔블던 테니스 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한 컬리우스 우드(colliers wood) 역에 도착했다. 트래블카드를 직원에게 보여주고 그가 열어주는 문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직원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조금 기다리니 남자 직원이 나타나 카드를 확인한 후 문을 열어주었다. 카드를 개찰구 입구에 투입해도 인식된다는 사실을 안 것은 며칠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동안은 내리고 타는 모든 역마다 역무원을 기다렸다가 트래블카드를 보여주는 수고를 반복해야만 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라고 했던가?

숙소는 1박에 12만 원 정도 하는 3인실이었다. 런던 중심지의 숙박료는 거의 살인적인지라 이 정도 가격에 3명이서 잘 수 있는 호텔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행히 조금 외곽지였지만 적당한 가격에 좋은 숙소를 얻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1박에 10만 원을 넘지 않기로 한 규칙은 적어도 이곳 런던에서는 불가능했다. 숙박 사이트의 후기대로 직원들은 매우 친절했다. 덕분에 입국심사대 공무원과 킹스크로스 역의 흑인 여성 직원에게 느꼈던 서운함과 설움이 많이 가셔졌다. 호텔의 서비스에 신뢰가 느껴진 나는 내친김에 조식 서비스까지 신청했다.


객실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들이 옷을 벗고 누웠다. 이른 아침부터 몇 시간 동안 기차와 전철을 오르내리느라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나 역시 아이들과 같이 그냥 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놀 생각에 기대에 한 껏 부풀어 있던 아이들을 간신히 달래고 나서야 간신히 숙소를 나설 수 있었다. 도착한 첫날,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부지런히 다녀 둬야 후반기에 그나마 여유 있게 다닐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쉽지만 놀던 장난감을 침대 위에 그대로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나와서인지 아이들은 전철을 타는 내내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방에서 쉬면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모양이었다. 대학 시절 종종 영화를 보았던 종로의 피카디리 극장이 이름을 따온 피카디리 광장 역에 내렸다. 거대한 크기의 삼성과 엘지의 전광판이 광장을 굽어보고 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단지 상업적인 홍보물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마주치는 우리나라 기업의 광고들은 언제나 반가움과 자랑으로 다가왔다.

“와 사람들이 여기 왜 이렇게 많아요?”

"이 근처에 차이나타운도 있고 뮤지컬 극장도 있어서 그런 것 같아."

아이들은 피카디리 서커스 광장에 모여든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숫자에 놀란 모양이었다. 우리는 인파를 뚫고 인근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상점의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중국음식들 때문인지 오랜만에 한식이 먹고 싶어졌다. 하지만 유리창 너머로 언뜻 보이는 것은 모두 향이 강한 중국음식들 뿐이었다. 그나마 발견한 초밥집은 1인분이 4만 원이 넘는 너무 비싼 가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우연히 눈에 띈 ‘누들스탑’이라는 중국식 볶음면 가게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먹는 면요리라서 그런지 아이들과 나는 기대보다 훨씬 맛있게 먹었다.

인근의 '웨스트엔드'거리에서 '라이온 킹'같은 뮤지컬을 볼까 하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물었지만 아이들은 바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오로지 복잡한 이 거리를 떠나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인 듯했다. 아이들은 내일 가기로 한 레고랜드 생각에 다른 볼거리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하긴 아이들이 과연 두 시간 가까이되는 시간 동안, 한글 자막도 없는 영어 대사를 참고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긴 했다.


런던의 야경이라도 볼까 싶어 대관람차 ‘런던 아이’가 위치한 웨스트민스터 역에 내렸다. 역 앞에는 그 유명한 영국 국회의사당의 시계탑인 빅벤이 있었다. 엄청난 인파들 틈에서 빅벤을 배경으로 가까스로 인증 샷을 찍고 있는데 한 젊은 아가씨가 다가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런던 시내를 굽어볼 수 있는 대관람차 런던아이

“한국사람이세요?”

그렇다고 하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반가워했다. 그녀의 예쁘고 오목조목한 얼굴에서 부다페스트나 프라하에서 보았던 동유럽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예상대로 그녀는 불가리아에서 왔다고 했다. 한국문화를 좋아한다는 그녀가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여행 초기였다면 그녀와 스스럼이 없이 어울리며 대화를 계속 이어갔을 터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의 느닷없는 호의를 의심하느라 대화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아가씨가 다른 속셈 없이 순수하게 접근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브뤼셀의 식당에서 당했던 사건의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크고 무거웠다.


“아빠 왜요? 누나랑 더 있다가 가요.”

혁우가 붙잡았지만 나는 그녀에게 황급히 작별인사를 하고는 런던아이 방향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런던아이는 한창 보수 공사 중이었다. 런던아이를 놀이기구로 알고서 따라왔던 아이들 역시 실망을 크게 했다. 낙담하는 아이들의 손을 끌고서 돌아서는데 쿵쾅거리는 빠른 템포의 음악이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목마가 보였다. 런던아이가 운행을 안 해서인지 회전목마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아빠 대신 저거 태워주세요.”

실망하는 아이들의 마음도 달랠 겸 회전목마에 태우기로 했다. 나처럼 실망하는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급하게 회전목마를 태우고 있는 몇몇 부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처럼 대목을 맞이한 회전목마 주인의 얼굴은 온통 싱글벙글이었다.

꿩 대신 닭이었지만 아이들이 즐거워했던 회전목마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찾았다. 하지만 공공화장실이 쉽게 보일 리는 만무했다. 런던 역시 유럽이었다. 거대한 현대식 건축물이 눈앞에 보였다. 3개의 건축물로 이뤄졌다는 사우스뱅크 센터였다. 이곳에 있는 로열 페스티벌 홀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정기 공연장소로 이용된다고 한다. 내부로 얼른 들어갔다. 다행히 로열 페스티벌 홀 방향에서 화장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볼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로비 한가운데에서 파티가 열리고 있는지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와인 잔을 들고서는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할리우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보이는데 왠지 주눅이 들었다. 소변이 급하게 마려웠던 초라한 행색의 여행자는 도망치듯 사우스뱅크 센터를 빠져나왔다.

보행자 전용 다리인 '행거 포드 브릿지'를 건너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에는 대형마트가 있었다. 마트에서 물이며 빵 같은 간식들을 사고는 지하철을 탔다. 숙소가 있는 컬리어스 우드(colliers wood) 역 앞 가게에서 피시 앤 칩스를 사 가지고 가려했으나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었다. 그냥 포기하고 내일 다시 맛보기로 했다. 부지런한 하루였다.

행거 포드 브릿지에서 바라본 빅벤, 웨스트민스터 사원, 그리고 런던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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