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이 런던에게, 위로를 건네다.

자연사 박물관- 코벤트 가든- 플랫 아이언- 피카디리 서커스

by 옥상평상

11살 일기

혁우는 지금도 바보지만 어릴 때는 더 바보였다. 사람이 어떻게 공룡이 된다고.


9살 일기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공룡 화석을 보러 가는 날이다. 어제는 레고랜드, 오늘은 공룡 박물관. 즐겁고 신난다!



어제 레고랜드에서의 강행군으로 피곤했던 우리는 늦은 아침을 열었다. 모처럼 맞는 게으른 아침은 여유롭고 풍요로웠다. 오늘은 일우와 혁우가 좋아하는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촬영 장소인 자연사 박물관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특히, 공룡 마니아인 혁우는 자신이 좋아하는 공룡 랩터처럼 아침부터 잔뜩 흥분한 얼굴이었다.


"크아! 나는 티라노다!"


제 형과 장난을 치는 혁우의 모습에서 녀석이 네 살 무렵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혁우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티라노!!"


이제야 기억이 났다. 어릴 적 혁우의 꿈은 바로 거대한 육식 공룡 '티라노 사우르스'였다.


화창한 일요일 아침의 런던 거리 곳곳은 공연을 하는 사람들과 물건을 파는 사람들로 활기차고 흥겨웠다. 사우스 캔싱턴 역에 내려 북쪽으로 걸어가니 자연사 박물관이 나왔다.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입장을 기다리는 줄은 무척이나 길었다. 40분 정도를 꼬박 기다린 후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박물관의 입구가 반대쪽에도 있다는 사실은 아쉽게도 오후에 박물관을 나오면서야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 반대편 여왕의 입구(Queen's gate)로 입장했다면 기다리지도 않고 좋았을 것이었다.

검색대를 통과한 우리 눈앞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마그마가 덮쳐왔다. 거대한 지구 내부 모형이었다. 그 지구의 한가운데를 관통해 지나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에스컬레이터는 우리를 레드존이라고 표시된 지구의 핵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지구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줬다.


오스트리아의 빈 자연사 박물관이 지역별, 연대순의 다소 전통적인 방식으로 볼거리를 배치했던데 반하여 , 이곳 런던 자연사박물관은 전통적인 구성을 기본으로 어린이들의 흥미를 충분히 유발할 수 있도록 볼거리를 자유롭게 배치하고 있었다.

지구의 핵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요!

특히, 일본 고베 대지진을 체험할 수 있게 만든 시뮬레이션 장치는 무척 실감이 나서 지진을 체험한 적 없는 관람객들에게도 지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일본의 고베시에 위치한 메모리얼 파크에서 대지진의 흔적을 보았던 형제들은 지진의 심각한 위험성을 더욱 실감하며 깊은 흥미를 보였다.

실제로 조작해 볼 수 있도록 만든 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전시물들

몇 개의 전시관을 스치듯 관람한 후, 마침내 혁우가 그렇게 고대하던 공룡 전시관에 도착했다. 전시관 입구에서는 마침, 역대 개봉한 영화들 중 공룡이 등장하는 장면만을 편집한 영상을 상영해주고 있었다.


전시된 실물 크기의 공룡 화석들은 마치 실제의 공룡 세계로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특히, 신공룡관에 전시된 데이노니쿠스의 실물 크기 로봇은 그동안 내가 아이들과 서대문 자연사박물관, 비엔나 자연사 박물관, 잘츠부르크 자연사 박물관 등에 다니며 보았던 공룡 로봇 모두를 통틀어 가장 컸으며 동시에 가장 정교했다.

데이노니쿠스 공룡 로봇의 모습

애초의 계획은 자연사 박물관을 나와 인접해 있는 과학박물관에도 들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너무 지치고 피곤해했다. 역시 어린아이들에게 하루 두 개 이상의 박물관 관람은 무리였다. 결국, 과학박물관을 가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코벤트가든(Covent garden)에 가보기로 했다.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은 수도원의 정원이었던 곳으로 각종 공연과 수공예품을 파는 마켓으로 유명한 관광지였다.

코벤트 가든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군살 없이 날씬한 몸매의 잘생긴 청년이 마술공연을 하고 있었다. 혼자서 스피커의 음악을 켜고 끄고 하면서 능수능란하게 마술을 펼치는 모습이 상당히 연습을 많이 한 솜씨였다. 빈 손수건에서 쥐를 나오게 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등의 다소 식상한 마술이었지만 워낙에 무대매너가 좋아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몰입을 잘하는 일우는 벌써부터 박수를 치고 난리였다. 공연 같은 것에 다소 심드렁한 혁우조차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의 마술 공연이 끝나자 아이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나는 일우와 혁우에게 동전 몇 개를 가만히 쥐어주었다. 형제들이 마술사 청년에게 다가가서는 모금함에 조심스레 동전을 놓고 돌아왔다. 청년이 아이들에게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훌륭한 공연 덕분에 과학사 박물관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코벤트 가든 내 상점들을 지나 광장으로 나왔다. 중년의 남자가 웃옷을 벗고 온몸에 쇠사슬을 칭칭 감은 상태로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일종의 탈출 마술을 시도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우와! 또 마술이다!"


일우와 혁우가 웬 횡재냐 하며 얼른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십 분이 지나도 이십 분이 지나도 남자는 쇠사슬을 몸에 두른 채 쉴 새 없이 이야기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의 여유로운 표정만 봐서는 몸에 감은 쇠사슬에서 탈출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마술 자체를 위한 공연이 아니라 제품 따위의 판매를 위한 홍보 무대 같았다. 결국, 우리를 비롯한 실망한 관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나 역시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달래면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가 막상 쇠사슬에서 탈출하는 장면을 보여줬더라도 그렇게 신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쇠사슬의 재질은 한 눈에도 가벼운 플라스틱 같이 엉성해 보였고 몸에 감긴 모습 또한 헐겹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빠, 배고파요."

"점심 언제 먹어요?"


가방에 담아온 어제 먹던 빵을 길가 벤치에 앉아 점심으로 먹었다. 대신 조금 이른 저녁으로 맛있는 것을 사주기로 약속했다. 빛과 같은 속도로 구글 지도를 검색해 저렴하게 스테이크를 판매하는 '플랫아이언'이라는 가게를 찾아냈다. 스테이크 1인분의 가격이 10파운드로 우리 돈으로 약 16,000원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평소 대기줄이 많은 곳이라 식사 시간을 피해서 가는 게 좋다는 후기를 보고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다행히 가게가 근처에 있었다. 하지만, 스테이크 1인 분의 양은 아이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기에 너무 적었다. 이미 빵을 먹고 왔음에도 아이들은 한판 씩을 추가로 더 해치우고 나서야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예상을 넘는 지출에 살짝 당황했지만, 브뤼셀에서 먹었던 불쾌한 저녁을 떠올리며 기쁜 마음으로 계산을 했다. 불운한 경험은 평범한 일상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마법이 있었다.


형제들이 각자 두 판씩을 해치워 버린 플랫 아이언 스테이크
때때로 불행은 삶에 위로를 건넸다.




keyword
이전 13화"그래,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