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일기
영국박물관에서 귀여운 미라를 봤다. 미라는 무섭기만 한 줄 알았는데 신기했다.
9살 일기
모아이 석상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나도 슬퍼졌다.
영국 박물관을 돌아다니다 사람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낯익은 석상을 발견했다. 모아이 석상이었다. 섬을 발견한 날이 부활절이라서 '이스터'라고 이름이 붙은 이스터 섬에는 이런 모아이 석상이 천 개 이상 있었다고 한다. 모두 바다를 등진 채 섬 중앙에 있었을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듯 한 이 모아이 석상들은 얼굴과 몸이 비슷한 크기로 2 등신의 비율이다. 소재와 형태가 유사해서일까? 어쩐지 우리네 돌하르방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아이 상은 무슨 이유로 만들어진 걸까? 모아이 상은 기원후 1000년 대부터 1600년 대까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경 이 섬에 도착했던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은 이 많은 수의 석상에 각기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이름에는 모두 '왕'을 뜻하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이 모아이 석상은 죽은 부족장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영국 박물관의 모아이 석상은 거대한 코와 깊은 눈, 앞으로 툭 튀어나온 입술을 지니고 있었다. 유럽 각지로 강제로 옮겨 심어진 이집트의 대형 구조물인 오벨리스크와 같이 이 모아이 석상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옮겨져 이곳 영국박물관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아빠, 모아이 석상 얼굴이 많이 슬퍼 보여요."
일우 말대로 정말 모아이 석상은 움푹 들어간 그 눈의 깊이만큼이나 슬퍼 보였다.
"아빠. 내 얼굴 어때요?"
혁우가 입술을 빼죽 내밀며 모아이 석상의 표정을 흉내 냈다.
모아이 석상의 표정을 흉내 내고 있는 혁우
영국 박물관의 한국관은 우리에게 자랑으로 다가왔다. 영국 박물관 안에서 한 국가의 관이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제외하면 일본 중국 정도라고 한다. 모두 동북아 3국이라는 점이 공교로웠다. 비록 우리나라 기업인 대한항공의 후원을 받아 설치된 것이기는 했지만 그 사실만으로 한국관이 평가절하될 수는 없었다. 그 수집의 방식에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은 부분이 존재해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인류 최고의 보물들이 전시된 이 영국 박물관에 우리나라의 유물이 독립된 공간을 차지하고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뿌듯한 마음에도 한국관을 채운 유물들의 가짓수와 구성에는 약간의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특히, 오랜 역사와 넓은 영토를 자랑하는 중국관은 차치하더라도 이웃 나라인 일본관에 비해서도 전시된 유물의 양과 질적인 면면은 소박함을 넘어 초라하게 여겨지게까지 하는 지점이 있었다. 전시된 유물이 빈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약탈당한 유물이 적다는 것의 반증일 수도 있겠지만, 이왕에 애써 마련된 전시공간이라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홍보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유물이 전시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던 까닭이었다. 한국관 관람을 마치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시관이 조금 더 규모 있고 알찬 유물로 채워질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한국관에 설치된 한국과 영국의 화합을 기원하는 한옥 '한영실'의 모습
한국관에 설치된 사대부의 방
'우 샤브티' 혹은 '샤브티'는 죽은 사람과 함께 묻히는 미라 모양의 작은 인형이다. 내세를 믿었던 이집트 사람들은 '우 샤브티'를 만들어 죽은 이의 노동력을 대신하게 만들었다. 한 무덤에서 자그마치 360개나 발견된 적도 있다고 한다. 이집트의 1년은 360일이었는데, 무덤의 주인을 대신해 하루에 한 개씩 일을 하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대량으로 발견된 '샤브티'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네바문 무덤 벽화의 축제 장면을 묘사한 그림
네바문 무덤 벽화, '늪지의 새 사냥'
고대 이집트의 그림은 현대의 우리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전혀 사실적이지 않게 보인다. 얼굴과 다리의 옆모습만을 그린 것을 보면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보일 정도다. 원근감이 배제된 까닭에 그림에서 입체감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집트의 회화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었는데 눈동자와 몸통은 정면, 얼굴과 다리는 옆면을 그려야 했다. 이른바, 정면성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 원칙은 신분이 높은 인물에만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축제 장면을 묘사한 위의 그림에 등장하는 피리를 부는 여인은 얼굴과 몸통이 모두 정면을 향하고 있다. 바로 신분이 낮은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집트 회화에서는 같은 신분인 경우에도 그 지위의 고하에 따라 크기를 달리해서 그렸다. 위 그림 "늪지의 새 사냥"에서도 주인공인 네바문은 가장 크게 그려져 있으며 그의 부인은 그다음, 그의 딸은 가장 작게 그려져 있다. 높은 신분의 가족이므로 모두 정면성의 원칙으로 그려졌으나 그 집안 내부의 지위에 따라 서로 다른 크기를 정한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부인은 남편의 무릎 크기 이상을 넘을 수는 없었다. 물론 이것에도 예외는 있었다. 바로, 아부심벨 대신전이 그 예이다.
람세스 2세가 지은 이집트의 아부심벨 대신전은 이집트 정부가 아스완 하이댐을 건설하면서 수장될 위기에 처해 있던 것을 국제기구와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이동 복원에 성공한 유적이다. 람세스 2세를 위한 대신전의 옆에는 그의 부인인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이 있다. 그리고 그 소신전에는 약 10미터의 크기의 거대한 람세스 2세와 왕비 네페르타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왕과 왕비의 조각의 크기가 거의 비슷하다. 부인인 네페르타리를 몹시 사랑했던 람세스 2세는 부인은 남편의 무릎 크기 이하여야 한다는 이집트 미술의 법칙을 무시하고 동등한 크기로 만들었던 것이었다. 북쪽으로는 히타이트, 남쪽으로는 누비완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집트의 정복왕 람세스 2세였지만 자신의 부인에게만큼은 지고지순한 사랑꾼일 뿐이었던 모양이다.
아부심벨 대신전 중 소신전 입구에는 람세스 2세와 네페르타리 석상이 비슷한 크기로 조각되어 있다.
미라 관의 손 모양을 따라 하는 혁우보통 미라의 관에 그려진 얼굴이 무섭고 으스스한 느낌이 있는 데 반해 위 미라의 관들에 그려진 얼굴은 묘하게 귀엽고 친근했다. 아마도 둥글고 큰 눈이 만화 같은 느낌을 주어서 그러는 것 같았다. 특히, 가장 큰 관의 얼굴은 입꼬리가 올라가 해맑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미라를 무서워하던 혁우조차 이 미라의 관들 앞에서는 미라의 손 모양을 흉내 내면서 촬영을 자처했다.
혁우를 공포에 떨게했던 마야, 아즈텍 문명의 유물들
잘 지내, 영국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