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카드를 역무원에게 일일이 보여주며 확인받는 일은 은근히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작업이었다. 게다가 직원들이 자리를 비우는 경우에는 개찰구 옆에 서서 직원이 돌아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부스에는 직원이 없었다. 꽤나 기다렸지만 직원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만 죽이고 있을 수 없던 까닭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비닐 케이스에 담긴 트래블 카드를 꺼내 티켓 투입구에 넣어보았다. 그러자 티켓이 투입구로 빨려 들어가서는 곧이어 배출구로 튀어나왔다. 구입한 지 4일 만의 발견이었다. 트래블 카드를 꺼내 직원들에게 보여줄 때마다 그들이 보여줬던 묘하고도 난감한 표정들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냥 기계에 넣으면 되는데 얘는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야? '
아마 그들의 속마음은 이러했으리라... 그동안 본의 아니게 직원들을 괴롭힌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트래블카드를 판매했던 불친절한 직원이 다시 한번 야속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를 관람하기로 한 날이었다. 런던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라 다른 곳을 가볼 까도 고려했지만 그냥 이번 런던 방문은 박물관 관람으로 마무리 짓기로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영화 해리포터를 촬영했던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가기를 원했고, 나 역시 스톤헨지나 스코틀랜드의 에딘 버러를 가보고 싶기는 했다. 그러려면 영국에 오기 전부터 교통수단을 예약하고 계획을 세우는 등 사전 준비를 했어야 했다. 대책 없는 방문으로 모처럼의 소중한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쉬웠지만 이번 기회는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사실 도착한 첫날 살짝 둘러보기는 했던 내셔널 갤러리였다. 하지만, 그런 수박 겉핥기 식의 관람으로 훌륭하고도 유명한 미술 작품들의 보물 창고인 내셔널 갤러리 관람을 마무리할 수는 없었다. 특히, 저 유명한 고흐의 '해바라기'와 '의자', '삼나무가 있는 밀밭'과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와 '비, 증기, 속도' 같은 작품들은 직접 두 눈으로 확인을 하고 싶었다.
원래는 아이들의 이해를 위해서 내셔널 갤러리 가이드 투어를 런던에 오기 전부터 신청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검색을 통해 알아본 투어는 이미 전부 마감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가이드 없이 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이드도 없이 하루 종일 미술관 관람을 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모처럼의 좋은 기회를 무의미한 시간으로 날려 보내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불안감은 곧이어 발견한 반가운 정보에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고맙게도 내셔널 갤러리에는 한국어로 녹음된 어린이를 위한 오디오 가이드가 따로 비치되어 있었다.
"이건 어린이용 가이드라서 아마 어른들 꺼보다는 재미있을 거야."
"와, 어린이용도 있어요?"
어린이 용이라 혹시 대충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직접 들어봤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오디오 가이드는 어린이 구연동화와 같은 방식으로 매우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제품도 아닐 텐데 내 귀에도 익숙한 우리나라 성우의 목소리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들 역시 재미있어하는 모습이었다. 가이드를 예약하지 못한 며칠 동안의 고민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그제야 안도가 되었다.
대사들- 한스 홀바인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스페인 북부지역에 있던 아라곤 왕국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블린과 결혼을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혼을 금지하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스스로 영국 성공회를 세우고 말았다. 이 그림은 그런 헨리 8세를 막기 위해 파견되었던 프랑스 대사와 주교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배경을 알고 보면 불안해하는 그들의 묘한 표정을 읽을 수 있다. 헨리 8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꽤나 위험한 임무를 지닌 상태였던 것이다. 물론 당시 대사들을 그대로 찍은 사진은 아니었지만, 화가인 홀바인 2세는 대사들이 느꼈을 법한 불안감을 등장인물의 표정과 구도로 적절히 그려내었다. 그림의 우측에 서서 비스듬히 보면 해골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는 원근법의 변형된 형태인 왜상 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해골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떠올리는 상징이다. 이 '메멘토 모리'란 말은 로마의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그들 뒤로 노예들이 따라오며 외쳤던 말이기도 하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교만하지 말고 언제든 죽을 수 있으니 겸손하라는 의미였다. 앞서 들렀던 프라하의 '천문시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던 메시지이기도 했다. 중세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지며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켰던 이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메시지는 죽음을 접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낯설어진 현대에도 충분히 깊은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오른쪽에서 비스듬히 보면 해골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성 게오르그와 용 - 파울로 우첼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현대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 친숙하게 다가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용의 얼굴을 표현한 부분이 같이 과감하고도 역동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린이용 오디오 가이드에는 이 그림에 대한 안내가 특별히 더 동화처럼 흥미 있게 설명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에 집중한 채 한동안 그림 앞에 멈춰 서서 떠날 줄을 몰랐다.
파울로 우첼로의 성 게오르그와 용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도 언급이 되어 있는 산 로마노의 전투 ( 성 게오르그와 용의 작가 파울로 우첼로가 원근법에 탐닉하여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
고흐의 그림들
고흐를 좋아하는 일우에게는 특별히 더 좋았던 시간이었다. 노란 물감이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것만 같은 고흐의 해바라기부터 의자, 삼나무가 있는 밀밭까지 그 독특하고 활기 넘치는 느낌은 나와 혁우에게도 역시 감동으로 다가왔다. 사진만으로는 알기 힘들었던 고흐의 선 굵은 붓터치를 생생한 질감으로 느끼는 일은 상상했던 것보다 즐겁고 독특한 경험이었다.
화병에 담긴 몇 개의 시든 해바라기는 활기 넘치는 노란 빛깔의 붓터치를 무색하게 묘한 슬픔을 건네고 있었다. 이 해바라기를 그리는 동안, 고흐는 아를에서 친구인 고갱을 맞이해 함께 창작 활동을 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고갱과의 동거 생활은 둘 사이의 불화로 두 달 만에 끝이 나고 만다. 그림 속 시든 해바라기와 텅 빈 의자는 불행한 결말을 예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툼 중에 고갱에게 면도칼을 휘두른 고흐는 그 면도칼로 자신의 한쪽 귀를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정신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했던 고흐는 마침내 권총 자살로 그의 불같은 삶을 끝마치고 만다.
고흐의 그림에 슬픔이 묻어 보이는 것은 그 불행한 결말의 예감이 녹아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의자'
윌리엄 터너의 그림들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유명한 미술가가 적은 영국이 가장 자랑하는 화가가 있다. 바로 '윌리엄 터너'이다. 그는 특히 풍경화에 재능을 보였는데 빛과 색채를 이용한 기법으로 몽환적인 풍경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과감한 인상주의적 기법은 모네를 비롯한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의 화풍에도 영향을 줬다.
터너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거대한 전함 테메레르를 끌고 가는 작은 증기선을 묘사한 '전함 테메레르'이다. 그림의 원래 제목은 '해체를 위해서 최후의 정박지로 끌려가는 전함 테메레르'이다. 전함 테메레르는 저 유명한 넬슨 제독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스페인 연합 함대에게 맞서 승리한 트라팔가 해전에서 활약한 주력 전함이다. 만약 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했다면 영국은 당장 블로뉴항에 모여있던 프랑스 연합군 35만 대군에게 침공당했을 상황이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영국을 구한 전함 테메레르는 넬슨 제독과 더불어 영국의 자랑이자 영웅이었다.
터너의 그림 '전함 테메레르'에는 일몰 직후,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태양의 모습과 함께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인 증기기관이 장착된 예인선에 힘없이 끌려가는 거대한 범선, 테메레르의 모습이 담겨 있다.
윌리엄 터너는 아무리 화려했던 과거일지라도 과거의 사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그 자리에는 다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수밖에 없다는 슬픔 어린 숙명을 몽환적인 색채와 빛으로 고스란히 담아냈다.
1844년 작품인 '비, 증기, 속도'는 터너가 증기기관차를 타고난 후, 그 엄청난 속도와 모습에 받았던 인상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가 '전함 테메레르'에서 예고했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소회를 그만이 구사할 수 있는 빛과 색채의 기법으로 역동적으로 구현해 냈다.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
윌리엄 터너의 ‘비, 증기, 속도(Rain, Steam and Speed)’
열심히 그림을 모사하고 있는 한 소녀를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번잡한 공간에서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공간만이 시간조차 멈춘 듯 고요하게 느껴졌다. 한 가지 일에 몰입을 하는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그녀의 뒷모습이 조용하게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