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 광장- 마요르 광장- 산미구엘 시장
소매치기는 우리가 잡는다!
솔 광장- 마요르 광장- 산미구엘 시장
11살의 일기
하루만 더 쉬고 싶었는데 아빠가 화를 내서 할 수 없이 밖에 나왔다. 아빠가 자꾸만 화를 내니 무섭다.
9살의 일기
드디어 수정궁에 가는 날이다. 너무 신난다.
드디어 마드리드 탐험 첫날이다. 오늘의 목표는 수정궁과 프라도 미술관으로 정했다. 어제는 하루 종일 숙소에 있으면서 여행 계획을 새로 짰다. 덕분에 라면을 원 없이 먹을 수 있었지만 모처럼 여행을 와서 숙소에만 있으려니 왠지 마음이 불안했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머나먼 스페인까지 와서 한국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시간과 비용이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결국 대강의 동선을 짜고 몇 개의 숙소를 예약하고는 계획보다 하루 일찍 마드리드 시내 관광을 나서기로 했다. 어제의 휴식으로 모처럼 축적된 에너지에 몸도 마음도 개운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형제들은 내 마음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하루 더 쉬고 싶었는지 오늘도 숙소에서 쉬자며 칭얼댔다.
“너희들 이럴 거면 한국으로 돌아가자!”
여행이 길어지면서 당근과 채찍 중에 채찍의 사용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전철을 타고 가려다가 숙소 앞 정류소에서 버스를 탔다. 어제 걸어보니 지하철 역까지 제법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스에 올라타 요금을 정산하기 위해 중간에 위치한 개표기로 다가갔다. 버스에 타자마자 요금을 정산하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방식의 결제시스템이었다. 어제 구입했던 10회권을 개표기에 넣었더니 “삐”하는 소리와 함께 반환되었다. 당황스러워 한 번 더 넣었지만 기계는 다시 표를 토해냈다. 아마도 10회권은 지하철만 이용 가능한 승차권인 모양이었다. 현금이라도 내려고 버스기사에게 다가갔는데 젊고 잘생긴 버스 기사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그냥 타고 가라고 한다. 감사의 인사를 연신하며,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분명 그의 미소에 반했을 거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처음 탔을 때 드문드문했던 승객은 점점 늘어나더니 10분 정도 지나자 금세 우리나라 출근길 버스 못지않게 복잡해졌다. 외곽에서 시내 중심으로 향하는 황금노선버스인 모양이었다. 혼잡한 와중에 머리에 히잡을 둘러 쓴 아기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이 복잡한 만원 버스에 유모차라니?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힘든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휠체어나 유모차가 올라탈 수 있게 만든 저상버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 좁은 장소에서도 그녀와 아기가 지나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주는 승객들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유모차를 승객들이 만들어준 모세의 홍해 길을 따라 유모차 전용공간에 세우기까지 누구 한 명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말로 출근길 만원 버스의 기적이었다. 우리나라였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내 앞으로 보이는 유모차에 누운 아기천사가 천국에 있는 양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었다.
솔 광장에 도착했다. 솔 광장의 원래 이름은 '푸에르타 델 솔' 즉 '태양의 문'이란 뜻이다. 16세기까지는 태양의 문양이 새겨진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광장에는 나폴리의 왕으로 있다가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펼쳤던 카를로스 3세의 기마상과 산딸기를 먹고 있는 마드리드의 상징인 곰 동상이 있었다. 평일임에도 광장은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저녁시간이나 주말이 되면 현지인들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인산인해가 된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마드리드에서 가장 소매치기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소매치기를 당한 후 관할 경찰서에 신고할 때조차 줄을 서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소매치기 사건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장소였다. 현지인들은 두 개의 동상 중 곰 동상을 좋아해 약속 장소를 주로 곰 동상 아래로 잡는다고 한다. 아마 특별히 곰을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기마상 밑으로는 항상 관광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곰 동상을 약속 장소로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여기는 소매치기가 정말 많은 곳이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가자.”
“아빠 우리가 지켜줄게요.”
“이제부터 우리는 보디가드야.”
아이들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배낭 옆으로 다가와 경호원 흉내를 냈다. 아이들에게 있어 소매치기는 두려움보다는 재미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순간 모든 게 놀이고 장난감인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부럽게 느껴졌다.
마드리드 왕궁으로 가는 도중에 오래된 건물에 둘러싸인 넓은 광장을 만났다. 그 유명한 마요르 광장이었다. 한때 시장이었던 마요르 광장은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된 후 지금은 시민들의 축제 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예전에는 왕실의 대관식이나 결혼식 같은 왕실 공식행사도 열렸다고 한다. 투우 경기장으로도, 종교 재판의 처형 장소로도 쓰였다고 한다. 극단의 비극과 행복이 공존했던 사연 많은 장소였다.
주말마다 벼룩시장이 열린다는 회랑 속에 위치한 기념품 가게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는 은색 갑옷과 검을 발견했다.
" 아빠, 저 갑옷 멋있지 않아요? "
“ 우리 저 갑옷 하고 칼 사요.”
“ 칼 같은 걸 사서 한국에 들어가려면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한대."
검도를 취미로 하는 나 역시 잠깐 흥미가 생겼지만 도검류를 반입하려면 다소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들었고 남은 여행기간 동안 저 크고 무거운 걸 계속 가지고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서둘러 포기하고 말았다. 어릴 적 보았던 만화영화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아더 왕과 랜슬롯 경이 입었던 은갈치 빛의 매끈한 갑옷과 명검 엑스칼리버는 그렇게 내 인생에 잠깐 등장했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마요르 광장 옆에는 산 미구엘 시장이 있었다. 스페인의 유명한 맥주 산 미구엘과 이름이 같다. 누군가는 산 미겔로 부르는 것이 스페인 발음 법칙에 맞다고 하는데 스페인어를 모르는 나는 그냥 입에 익은 대로 산 미구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시장이라고는 하지만 내부는 우리네 마트나 백화점의 푸드 코트 같이 구역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의 어깨를 닿아야만 지나갈 수 있는 그 비좁고 왁자한 통로의 분위기는 우리네 전통시장과도 닮은 구석이 있었다.
다소 비싼 가격과 소매치기 걱정에 불안해진 나는 시장에서 서둘러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혼잡한 장소에서는 한 순간의 방심으로 아이들을 국제 미아로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어린 동행들은 이런 나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은 표정으로 스페인 거리의 흥겨움을 마음껏 즐기고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