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상평상 Aug 19. 2024

엄마가 8년 만에 내 구독자가 되어주셨다.



엄마에게 아이들과의 여행 소식을 전하면서 알려주었던 브런치였다. 엄마는 인천에 나는 제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손자들의 소식을 궁금해하시던 엄마였다. 평소 직장을 다닐 때는 도통 글을 쓸 심리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는데 여행을 다니게 되면서 브런치에 다시 글을 올리게 되었고 그때 아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던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에게 내 브런치북 주소를 알려드리자 엄마는 매일같이 찾아와 '좋아요'를 누르셨다. 처음에는 내가 보내드린 링크도 보이스피싱으로 오해해 누르지도 못했던 엄마였다. 가끔 명절에 올라가 엄마와 지내면서 있었던 글을 올리기도 했었는데 엄마가 유난히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 후 외할아버지의 사업이 잘 안 되면서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중학교 과정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하시는 지경에까지 이르시게 되었다. 엄마에게는 그게 평생의 한이셨다.



평소, 손재주가 좋았던 엄마는 내게 비싼 장난감을 사줄 형편이 못 되자 다 쓴 모나미 볼펜을 실로 이어 만든 기차라든가, 직접 두꺼운 종이에 그림을 그린 후 오려만든 종이 인형을 만들어 주셨다. 70년 대의 대부분의 아버지가 그러하였듯 아이들을 건사하는 대부분의 몫은 여자인 엄마에게 부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아빠들 개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노동력을 철저히 착취할 수밖에 없었던 국가와 사회의 구조적 책임이 더 컸다. 회사는 야근을 당연시했고 휴일 출근은 승진을 위한 의무사항이었다. 회사의 분위기는 폭력적인 군대의 연장이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일개 개인의 선택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글도 잘 쓰셨는데, 한 번은 지금은 사라진 TBC라디오의  '아차부인, 재치부인'이라는 프로그램에 아빠의 외박을 주제로 사연을 넣어 방송된 적도 있었다. 방송이 되던 그날, 온 가족이 지금은 단종되어 사라진 카세트테이프 레코더 앞에 모여 앉아 녹음을 하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빛나던 엄마의 재능은 그녀의 모든 시간을 모두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써야 했기에 그렇게 한번 꽃도 피지 못한 채 사그라들어 버리고 말았다.



엄마는 부족한 아버지의 수입을 메꾸기 위해 문방구, 미용실, 식당 따위의 가게를 열어 운영해야 했었다. 하지만, 태생이 예술가 기질이었던 엄마에게는 작은 규모의 사업이라도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엄마는 가게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생계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방황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 모습은 사실 지금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이곳 발리에 와 있는 동안, 엄마에게 매일 카톡으로 브런치 글을 보내드렸다. 아들이 20년 동안 잘 다니던 직장을 덜컥 중단하고 이름도 생소한 발리에 와 있으니 걱정을 많이 하고 계셨던 까닭이었다. 엄마는 매일 내 브런치에 들러 '좋아요'를 누르고 가셨다. 그리고는 가끔씩 카톡으로 글 잘 읽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이곳 발리의 여행이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는 오늘이었다. 인스타그램에 영상을 올리고 있는데 브런치에서 온 메시지 하나가 올라왔다.



"ㅇㅇㅇ님이 내 브런치를 구독합니다."



엄마는 오늘 내게 선물을 주셨다. 엄마는 그동안 구독하는 법을 몰랐던 모양이다.


이참에 나도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로 선물을 하나 만들어 드려야겠다.



이전 16화 Chat-gpt가 그려준 울루와투 사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