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일기
깨끗한 피렌체가 마음에 든다. 아빠가 내일은 맛있는 티본스테이크를 사준다고 했다. 아빠가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먹어야겠다.
9살 일기
피렌체가 좋다. 장난감 놀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로보트에 맥주가 묻어 큰일 날 뻔했다. 술냄새는 싫다.
피렌체로 가는 기차를 탔다. 1시간 반 정도를 달려 꽃의 도시 피렌체에 도착했다. 베네치아가 '물의 도시'로 불리는 것처럼 피렌체는 '꽃의 도시'로 불린다. 영어 이름인 '플로렌스(florence)'도 '플라워(flower)'에서 유래한 것이다.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에 내리자마자 바로 이틀 뒤 베니스로 가는 좌석을 예약했다. 워낙에 인기 구간인 탓에 혹시라도 좌석이 매진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다음 일정인 베로나에서 밀라노로 가는 구간은 보통열차가 운행하고 있어 굳이 유레일 패스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고 유로(GO EURO)'라는 어플에서 운 좋게 최저가로 예약할 수 있었다.
"우리 세 명에 18유로에 예약했어."
"싸게 한 거예요?"
"그럼, 완전 싸게 한 거지."
"그럼 우리 기념으로 맥도날드 가요."
"고작, 맥도날드? 아빠가 피렌체에서 유명한 스테이크 사줄게."
"아뇨. 그냥 맥도날드 가요."
"그럼 오늘은 맥도날드 가고, 내일 스테이크 사줄게."
녀석들은 맥도날드가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아이들의 속셈이 따로 있었다. 아이들은 가자마자 장난감이 포함된 해피밀 세트를 골랐다. 아마도 아까 역 근처에서 장난감이 그려진 포스터를 봤던 모양이었다. 이러다가는 트렁크가 온통 장난감 사은품으로 가득 차게 될지도 모르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래도 오늘은 교통비도 아꼈으니 기분 좋게 사주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던 유럽의 햄버거가 슬슬 물리기 시작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다소 지출이 있더라도 내일은 피렌체의 명물, 티본스테이크를 아이들과 먹어보기로 다시 한번 마음먹는다.
아르노 강 위에 놓인 수상가옥 같은 모습의 베키오 다리 - 그 문화적 가치 때문에 2차 대전 중의 나치 독일군이 철수 중에도 폭파하지 않았다고 한다.피렌체의 골목은 로마에 비해서 깔끔했다. 좁고 오래된 점은 비슷했지만 동물의 배변이나 쓰레기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아 도시 전체가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ㄱ', 'ㄴ'형태로 된 몇 개의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자 예약해둔 숙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작은 규모의 호스텔이었다. 조심스레 숙소의 벨을 눌렀다. 하지만 응답은 없었다. 로마에 이어 또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하는가 싶어 살짝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해서 스마트 폰의 메일을 열어보았더니 다행히 숙소로부터 안내 메일이 와 있었다. 호스텔 프런트에 직원이 항상 근무하고 있지 않으므로, 직원이 없는 시간에는 직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라는 내용이었다.
메일에 적힌 번호를 눌렀더니 곧바로 문이 열렸다. 호스텔 프런트 테이블 위에는 내 이름이 적힌 종이와 함께 열쇠가 놓여 있었다. 종이에 적힌 방 번호를 찾아 마침내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이 마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허둥대지 않고 침착하게 클리어 한 스스로가 대견했다. 짐을 어느 정도 정리한 후 화장실을 찾아 나왔더니 호스텔 직원이 있었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띤 키가 큰 여자 직원이 친절하게 이것저것 안내를 해주었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왠지 이곳에서의 여정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두오모 성당 건축의 정수라고 불리는 돔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 역시 처음부터 성공한 건축가는 아니었다. 피렌체에 있을 무렵 참가한 산 조반니 세례당 정문 제작 공모전에서 그는 기베르티에 패배했다. 하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은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로 건너가 건축을 공부했고, 로마 판테옹의 돔에서 힌트를 얻은 브루넬레스키는 그 후 돌아와 두오모 성당의 돔을 만들어냈다. 캄비오가 짓기 시작하고 브루넬레스키가 완성한 그 유명한 피렌체 대성당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의지로 수백 년의 세월을 지나 피렌체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있었다.
잠시 쉬고 싶다는 아이들의 요구로 한낮에도 불구하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시내 관광은 아무래도 내일 우피치 미술관 투어 후, 다시 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쉬고 싶다던 아이들은 숙소에 돌아와서는 맥도날드에서 받은 장난감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역시 아이들의 꿍꿍이는 따로 있었다.
해질 무렵, 계속 숙소에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던 나는 아이들을 설득해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피렌체의 노을과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신곡’의 작가, 단테가 그의 짝사랑 ‘베아트리체’를 처음으로 만났다고 전해지는 '산타 트리니타 다리'를 지나 아르노 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남쪽 하늘에서 불타 오르고 있던 노란 해는 서서히 황금빛 피를 사방에 흘리며 서쪽 하늘로 떨어지고 있었다.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 '두오모'라는 말 자체가 대성당을 의미하는 이탈리아 말이니 사실은 그냥 '피렌체 두오모'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아이들이 맥도널드에서 받은 로봇 장난감으로 디오라마를 찍겠다며 내 미러리스 카메라를 빌려 달라고 했다. 자신들의 스마트폰 카메라로는 잘 찍히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카메라를 박살 낼 것 같은 불안감에 썩 내키진 않았지만 조심해서 사용하라고 당부하며 빌려줄 수 밖에는 없었다. 사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도시의 야경' 같은 건 따분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십 분 정도를 올라 '미켈란젤로'언덕에 도착했다. 피렌체 시내를 향해 펼쳐진 계단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대략 현지 사람들과 관광객이 반 반 정도 섞여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계단 중간 정도에 가까스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이들은 계단에 엎드려서 로봇 장난감을 이리저리 배치하며 사진을 찍는데 여념이 없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안쓰럽고 기특해 과자를 사다 주었다. 물론 내 몫으로도 작은 페로니 병맥주를 샀다. 미켈란젤로 언덕 위 푸드 트럭의 물가는 살인적이었므로 최소한으로 구입했다.
미켈란젤로 언덕의 계단에서 바라본 피렌체 시내의 전경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서 계단은 어느새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 찼다. 노을에 잠긴 피렌체의 모습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자유분방하고 활기 넘치는 계단의 풍경 역시 이미 작품 속의 일부분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쨍"
갑자기 내 뒤에서 유리병이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병에서 흐른 맥주가 내 자리로 급하게 흘러내려왔다. 다행히 재빠르게 일어난 우리는 흘러오는 맥주를 피할 수 있었다. 내 위쪽에 앉아 있던 중년 부부가 맥주를 실수로 쓰러뜨린 상황이었다. 그네들은 몹시 미안해하며 연신 사과를 했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주며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바닥을 적신 맥주를 닦아냈다. 아이들 역시 휴지를 손에 쥐고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계단 아래로 흘러가는 맥주를 닦았다. 뒷자리 부부가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웃음을 지어줬다. 아이들도 나도 꽤나 침착하고 의연한 태도를 보인 것 같아 괜히 뿌듯해졌다.
피렌체를 수호하기 위해 맥도날드에서 비밀리에 개발한 로봇의 뒷모습 ( 형제들 촬영 )
피렌체의 야경을 배경으로 아이들과 셀카를 찍고 있는데 그들 부부 중 부인이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다가왔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사진을 찍은 후, 우리 역시 그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만약 맥주가 흘렀을 때 조금이라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따듯한 미소를 나누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배려와 친절은 어느 곳에서나 온기가 있었다. 아이들에게도 좋은 교육이 된 것 같아 모처럼 기분이 흐뭇해졌다. 하늘에 번진 노을의 황금빛이 따스하게 번져가는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