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역작인 다비드 상은 원래 두오모 성당 지붕 위에 올려지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다비드 상의 머리와 손이 실제의 비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이유는 먼 곳에서 올려다보는 각도를 계산하여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훌륭한 작품을 멀리서 밖에 볼 수 없을 것이 안타까웠던 피렌체 사람들은 결국 조금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시뇨리아 광장에 설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다시 한번 논쟁이 일어났다. 광장 옆 회랑 '로지아 데이 란치'에 다른 조각상들과 나란히 설치하는 게 좋겠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주장과 시뇨리아 정청 입구에 단독으로 놓겠다는 미켈란젤로의 주장이 서로 대립된 것이었다. 특별히 회화가 전문이었던 다빈치는 다비드 상을 회랑에 놓아 그림처럼 보이게 하는 것을 원했던 반면 명실상부한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는 조각 본래의 입체감을 위하여 광장 한가운데에 놓아 사방에서 보이기를 바랬던 것이었다.
결과는 미켈란젤로의 승, 그의 주장대로 다비드 상은 시뇨리아 정청 입구에 설치되었다.그도 그럴 것이 작가의 입장에서 원래 의도한 위치에 설치하지 못하는 것도 억울한데 다른 조각상들에 섞여 드러나지 못하는 상황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까닭이었다.
시뇨리아 광장에 설치된 다비드 상, 모조품으로 원본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가가 된 사연에는 숨겨진 일화가 있다. 피렌체의 외곽에 있는 '산티냐노'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미켈란젤로는 채석장 인부의 아들로 자랐다. 6살 때 어머니를 여읜 미켈란젤로는 다른 채석장 인부의 집에 맡겨졌다. 소년이 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돌아와 공원에서 할아버지 모습을 조각하고 있었는데 당시 피렌체의 최고 권력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
“ 할아버지의 이 치고는 너무 가지런한 건 아닐까? ”
로렌초 데 메디치의 이야기를 듣고 자존심이 상한 미켈란젤로는 조각의 이를 모두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이가 허물어진 조각을 본 로렌초 데 메디치는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가 숙식과 교육을 책임져 훌륭한 예술가로 만들었다.
오늘은 우피치 미술관 투어를 하는 날이었다. 어제의 과하게 먹은 맥주 때문에 머리가 아팠지만 10만 원이 넘는 투어 예약비를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씻는 둥 마는 둥 대충 외모를 정리하고는 서둘러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했다. 다행히 투어 시간 전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가이드 분은 가녀린 외모임에도 당당한 자신감이 돋보이는 여성분이었다. 그녀의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에 투어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우피치 미술관에는 르네상스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치마부에'와 '조토'가 각각 그린 성모자 상이 함께 있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사이로 그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양을 치던 '조토'가 막대기로 땅에 양을 그리고 있는 것을 마침 지나가던 '치마부에'가 발견하고는 즉시 제자로 들였다. 어느 날 '치마부에'가 외출을 한 사이 '조토'는 스승이 그리다 만 그림에 무언가를 그려 넣었다. 돌아온 '치마부에'는 그림에 파리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파리를 쫓기 위해 손을 휘저었지만, 파리는 꼼짝하지 않았다. '조토'가 스승의 그림에 파리를 그려 넣은 것이었다. 신라사람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렸던 소나무의 모습이 진짜 같아서 새들이 앉으려 하다가 부딪혔다는 우리네 이야기가 떠오르는 일화였다.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작품 앞에 섰다.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가 그 유명한 피렌체의 국부인 코지모 데 메디치이다. 그 아래로 코지모의 아들들이 있고 맨 왼쪽에 붉은 웃옷을 입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청년이 미켈란젤로를 데려와 훌륭한 예술가로 키운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이다. 이밖에도 이 그림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대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학자, 문인들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이 그림은 사진이 없던 당시 피렌체의 스타 화보집 정도가 아니었을까?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 맨 왼쪽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인물이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한 로렌초 데 메디치이다.
우피치 미술관에서 '우르비노'라는 이름을 여러 번 만날 수 있었다.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과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작품에서였다. '우르비노'는 피렌체의 서쪽에 있는 도시로 '발데사르 카스틸리오네'가 쓴 '궁정론'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다. '발데사르 카스틸리오네'는 라파엘로가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그의 비스듬한 자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앞서 나온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는 반대로 신하의 도리를 다룬 '궁정론'은 우르비노 궁정에서 이상적인 신하의 모습을 주제로 토론하는 실존인물들의 모습을 가상으로 기술한 책이다.
스페인의 작가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와 프랑스 작가 마네의 '올랭피아'에 영향을 준 베니스 출신 작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바로 이 우르비노 공국의 전성기 시절에 나온 작품이다. 우르비노 공작이 자신의 결혼 기념으로 의뢰한 작품으로 그림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에 나오는 우르비노 공작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라는 이름으로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의뢰한 우르비노 공작의 할아버지가 된다. 페데리코는 백작의 서자로 태어나 십 대 때부터 용병 생활을 하며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야 했다. 그러다 영주였던 자신의 이복동생이 암살을 당하자 우르비노 영지를 물려받게 되었다. 하지만 영지는 가난하기 짝이 없었기에 페데리코는 자신의 기사들과 함께 전쟁을 누비며 돈을 벌어야 했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그림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에 나오는 부인은 두 번째 부인으로 아들을 낳다가 죽기 전까지 페데리코가 전장에서 보내온 수입으로 살림을 현명하게 잘 챙겨 우르비노 공국 전성기의 토대를 닦았다고 한다. 이 초상은 부인이 죽은 후 그녀의 데스마스크를 보고 그린 탓인지 핏기 없는 얼굴로 그려져 있다. 반면, 페데리코 즉, 우르비노 대공은 실명한 오른쪽 눈과 오른뺨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왼쪽 얼굴만 드러나 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니 부인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간 게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고 대공의 눈은 그 미소를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가 공작 부부의 옆얼굴을 나란히 그렸던 이유는 우르비노 공작의 상처를 가리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죽음이 갈라놓은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한 나름의 고심은 아니었을까?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기상이 늦었던 까닭에 아침 식사를 못한 우리는 투어가 끝날 무렵 박물관 구내매점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숙취로 인해 뱃속은 여전히 전쟁터였다. 가이드 분이 아이들에게 다가와 기념품 엽서를 챙겨줬다. 마침 혁우가 사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이어서 더욱 고마웠다. 우피치 미술관에서 혁우에게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원형 방패에 그려져 있던 카라바조의 '메두사'라는 작품과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었다. 하나는 그림이 너무 무서워서였고 하나는 그림이 너무 예쁜 이유라는 점이 혁우다웠다.
혁우가 예쁘다며 좋아했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박물관을 나와 베키오 다리를 넘어 시내 투어를 했다. 박물관 관람 내내 어린 딸이 아파 고생했던 가족 분들은 시내 투어를 마치지 못한 채 결국 먼저 자리를 일어서야만 했다. 철부지에 장난꾸러기였지만 두 달이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병치레 하나 없이 강철 같은 체력으로 아빠를 따라와 주고 있는 두 아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내친김에 바로 근처 가게에서 젤라토를 사다 줬다. 형제들은 영문도 모른 체 하얀 크림을 입 주위에 가득 묻혀가며 즐겁게 먹어 치웠다. 두오모 성당에 다다르자 투어는 모두 종료되었다.
가이드 분의 추천으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 근방의 티본스테이크 식당에 갔다.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과 넉넉한 양에 오랜만에 삼부자는 고기 만으로 배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오후에는 두오모 성당 내부를 보기로 계획했었지만 어제 너무 과음을 한 탓에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여행에서의 과음은 많은 소중한 기회들을 놓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런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숙소로 들어가 장난감 놀이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무튼 앞으로 술은 절대 입에도 대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