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탄젤로 성- 테베레 섬- 아이밀리우스 다리- 진실의 입
로마의 휴일
산탄젤로 성- 테베레 섬- 아이밀리우스 다리- 진실의 입
일요일이었다. 숙소에서 테르미니 역으로 가는 도중에 맥도널드에 들렀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함께 주는 해피밀 세트를 주문해 달라고 졸랐다. 사은품 치고는 제법 정교하게 만들어진 로봇 장난감이 아이들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장난감을 받아 든 혁우가 흥분을 한 탓에 그만 콜라를 엎지르고 말았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의 점원이 다가와 거칠게 걸레질을 했다. 나와 아이들은 그에게 연신 사과했으나 그는 우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무성의한 점원의 동작이 답답했는지 매장 관리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와서는 엄격한 얼굴로 이것저것 지시를 했다. 모든 게 우리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던 까닭에 테이블에 앉아 태연하게 햄버거를 먹고 있기가 불편했다. 우리는 햄버거와 콜라를 주섬주섬 챙겨 바깥으로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끝까지 혁우에게 화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했다는 점이었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아빠로서 조금씩 성장하는 중이었다.
테르미니 역에서 산탄젤로 성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하지만 버스 타는 곳을 찾아 헤매다 보니 어느새 상당히 먼 거리까지 걸어와 버리고 말았다. 내친김에 그냥 마저 걸어가 보기로 했다. 테르미니 역에서 산탄젤로 성까지 가는 길에는 유적의 숫자만큼 노숙자들도 쓰레기도 많았다. 아무리 자연스러운 게 로마의 멋이라고는 해도 자연스러움을 넘어 방치된 듯한 거리의 모습은 다소 안타깝고 실망스러웠다.
나보나 광장의 분수를 만들었던 베르니니가 만든 천사상들이 늘어선 산탄젤로 다리를 지나 산탄젤로 성에 도착했다. 후대에는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 5 현제 중 한 명으로 칭송 받았지만 생전에는 폭군으로 여겨졌던 하드리아누스의 묘로 만들어진 산탄젤로 성은 후대에 이르러 교황의 요새로 사용되었다. 이 산탄젤로 성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바로 이 성과 성 베드로 대성당 사이이 비밀통로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평상시 성 베드로 성당에 머물던 교황은 시민의 반란이나 적군의 습격과 같은 유사시에 이 비밀통로를 이용해 산탄젤로 성으로 대피하곤 했다고 한다.
이 산탄젤로 성 꼭대기에 서 있는 가브리엘 대천사상은 원래 나무로 만든 것을 후대에 청동 날개와 청동검을 가진 대리석상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산탄젤로 성 내부를 관람할까도 했지만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들 역시 그다지 흥미 없어하기에 바로 '진실의 입'이 있는 ‘산타마리아 델라’ 교회로 향하기로 했다.
우리는 '테베레 강'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옛 로마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테베레 강의 모습은 파리에서 본 센 강의 풍경과는 많이 달랐다. 파리의 센 강이 잘 정비되고 깔끔한 느낌을 주었던 반면 테베레 강은 정비를 하다가 멈춘 듯 군데군데 지저분하고 쇠락해 보였다. 하지만, 계속 걷다 보니 그건 그것대로 로마의 유구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아 나름의 정취가 있었다. 형제들은 걷는 일이 힘들 법도 한데, 숙소에 돌아가서 할 스마트폰 게임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둘이 게임을 좋아하는 남자아이들이라는 사실이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삼사십 분 정도를 걸으니 강 한가운데 떠있는 섬이 보였다. 지도를 보니 '테베레 섬'이라고 나와 있었다. 기다란 모양의 섬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 섬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선박 같은 느낌이었다. 파리에서 봤던 시테 섬의 축소판 같았다. 파리의 시테 섬이 이 정도 크기에 불과했다면 아마도 파리라는 대도시의 출발점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었다.
“아빠 부서진 다리가 그대로 있어요!!”
아이들의 말대로 끊어진 다리의 두 개의 기둥이 거친 테베레 강물을 온몸으로 버텨가며 꿋꿋하게 서 있었다. 바로 '아이밀리우스' 다리였다. 지금은 '부서진 다리'라는 뜻의 '폰테 로토(ponte rotto)'라고도 불리 운다. 초기에 목재로 만든 것을 수 십 년에 걸쳐 돌다리로 만들었고, 그 후에도 홍수 등에 의해 피해를 입을 때마다 다시 만들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16세기에 발생한 두 차례의 홍수로 다리의 반쪽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고, 그 후 교량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낚시터로 사용되어 왔다. 그나마 남아있던 다리의 반쪽 부분 역시 인근에 '팔라티노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 아치 부분만을 남겨두고 철거했다. 아예 '팔라티노 다리'를 옆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설치하고 '아이밀리우스 다리'의 반쪽을 온전하게 남겨두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잠시 해보았다. '유물의 보존'과 '도시의 재건'이라는 이 두 가지 명제는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 로마라는 도시가 짊어지고 갈 어려운 숙제였다.
한참을 걸어 드디어 진실의 입에 도착했다. 강의 신 ‘홀르비오’의 얼굴이 그려진 맨 홀 뚜껑 같은 진실의 입은 ‘산타마리아 델라’ 교회 내부에 전시되어 있었다. 교회 앞 광장으로 이미 엄청나게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진실의 입을 보기까지 도무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이 먼 거리를 걸어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아무 생각 말고 줄을 서기로 했다. 다행히 유쾌한 교회 직원이 질서를 잡아주어 줄은 생각보다 빨리 줄어들었다. 한 시간 여의 기다림 끝에 결국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진실의 입에 손을 넣어보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저녁거리를 사서 들어가려고 했지만 일요일인지라 숙소 근처의 상점 문이 모두 닫혀 있었다. 식당 역시 영업을 하지 않았던 까닭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빈 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게스트 하우스의 호스트가 아침에 준 빵이 남아 있어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었다. 나 역시 대충 맥주로 주린 배를 채웠다. 그야말로 어제의 만찬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저녁식사였다. 우리에게 '로마의 휴일'은 영화만큼 낭만적이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