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현실로 만나다.

베네치아- 베로나

by 옥상평상

11살 일기

로미오와 줄리엣이 살았던 도시 베로나에 왔다. 하지만 아빠는 진짜로 살았던 사람들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 형과 누나가 진짜로 살았을 것만 같다.

9살 일기

히히 줄리엣 누나는 예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겨 나왔다. 산타루치아 역으로 가는 수상버스를 탔다.

‘다시 또 베네치아에 올 일이 있을까?’

1950년대에 18만 명에 이르던 베네치아의 인구는 2017년 현재 고작 5만 명 남짓으로 줄었다고 한다. 베네치아의 상습적인 침수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관광객으로 인한 집값 상승으로 베네치아의 원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베네치아 외곽으로 옮겨야만 했다. 특히, 19세기 무렵부터 무분별하게 진행된 지하수 개발과 21세기 들어 심각해진 지구 온난화로 인한 높아진 해수면은 아름다운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점점 가라앉게 하고 있었다.


도시의 침수를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이탈리아 정부는 바닷물의 수위가 일정 수치 이상 높아졌을 경우 해수를 막아주는 방벽이 작동하는 이른바, '모세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SF 영화에나 나올 법 한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성공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눈앞에 아련하게 펼쳐진 이 아름다운 베네치아의 풍경이 어쩌면 내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떠나는 발걸음이 아쉽고 무거웠다.

아침식사를 챙기지 못한 까닭에 산타루치아 역에서 샌드위치와 도넛을 먹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차오’하며 이탈리아 인사말을 반갑게 외치는 형제들은 이미 아빠를 넘어선 능숙한 여행자였다. 녀석들의 밝은 인사 때문이었을까? 아이들의 아이스크림은 언제나 나보다 한 덩이가 더 올려져 있었고, 빵을 사면 한 조각이 더 주어졌다. 이곳 매장에서도 여직원은 아이들에게 작은 도넛 한 조각을 더 얹어 주었다. 아이들은 인사의 중요성과 가치를 몸으로 배워가고 있었다.

유레일패스의 이용 횟수를 아끼기 위해 베로나행 완행열차를 타기로 했다. 그동안 유레일패스로 특급열차만 타고 다녔던 까닭에 플랫폼 전광판에서 완행열차의 표시를 찾느라 한참 동안 애를 먹었다. 출발시각 거의 5분여를 남기고 나서야 간신히 승강장 번호 표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서 허둥지둥 달려야 했다. 완행열차는 특급 열차의 승강장이 모두 배정되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정해지는 모양이었다. 자본주의의 논리는 전통과 문화를 자부하는 이곳 유럽에서도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다음에는 비용에 큰 차이가 없다면 유레일패스를 아끼지 않고 특급열차를 타야겠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베로나에 도착했다. 베로나의 교통수단과 관광지를 마음껏 둘러볼 수 있는 베로나 카드를 역에서 구입하려 했지만, 카드 판매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 도착하는 도시에서 항상 발병하곤 하는 길치병이 이곳 베로나에서도 어김없이 생기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베로나 카드는 시내 관광지에서 구입하기로 하고 먼저 숙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버스를 탈까 하다가 시간적 여유가 있어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베로나 카드가 있으면 버스 요금이 무료였기에 바로 타고 갔겠지만, 구입을 못한 까닭에 버스비라도 아낄까 싶어 30분 정도 걸리는 길을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아이들은 걷기가 힘들 법도 할 텐데 군소리도 않고 앞장섰다. 나중에 아이들이 이런 사정을 알게 된다면 내게 서운한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일우야~ 걷게 해서 미안해ㅠㅠ

커다란 차도를 따라 걷는데 베로나 시를 가로지르는 아디제 강이 보였다. 크기만 놓고 보면 로마의 테베레 강못지 않은 넓은 강이었다. 숙소가 있는 곳까지는 아디제 강을 따라올라 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아빠, 이게 무슨 강이에요?”

“아디제 강 이래.”

“피렌체 아르노 강이랑 이름이 비슷하네.”

“로마에 흐르던 강은 무슨 강이게?”

“테베레 강!”

혁우가 정확히 맞혔다. 유난히 암기력이 좋은 혁우는 가끔 내가 잊어먹은 것도 기억해내서 여행 중간중간 요긴한 상황에서 꽤나 도움이 되곤 했다.

아름다운 아디제 강의 야경

예상보다 십 분을 초과한 사십 여분을 걸어서야 숙소인 '아이 가비아니' 호스텔에 도착했다. 도착한 후 지도를 다시 확인하니 직선으로 가로질러 올 수 있는 길을 애꿎게 강을 따라 멀리 돌아온 것을 알게 되었다. 똑똑하지 못하면 손발이 고생이라고 했던가? 똑똑하지 못한 아빠 덕분에 공연히 아이들이 고생하고 있었다.


호스텔 이름이 적혀 있는 벨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하지만 응답이 없었다. 약하게 눌러서 그런가 싶어 다시 힘껏 눌러보았지만 역시 반응은 없었다. 로마에서 숙소 주인을 만나지 못해 기다렸던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몰라 서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구세주처럼 나왔다. 하지만, 그는 이곳 주인이 아니었다. 뭔가 물어보려는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곧장 우리를 지나서는 바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빠! 들어가요!”

일우가 그가 나온 틈을 타 닫히려는 문을 붙잡고서 황급히 소리쳤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낡은 농구대가 있는 마당 뒤로 한눈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공동주택이 보였다. 아마 이곳도 로마의 숙소와 같이 공동주택의 일부를 개조한 숙소인 모양이었다. 계단을 올라 문 앞에 붙어 있는 명패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명패들이 이탈리아어로 표시되어 있어 확실하진 않았지만, ‘아이 가비아니’와 비슷한 표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 중에 어디가 우리 숙소일까?

내가 구입한 유심은 음성통화가 제공되지 않아 전화를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숙박을 예약했던 사이트에 메일을 보내고 기다리기로 했다.


“잘못하면 오늘 밖에서 자야 할지 모르겠는걸?”

“진짜 밖에서 자야 해요?”

“연락이 안 오면 어쩔 수 없지.”

“밖에서 자기 싫은데.”

아이들은 나의 장난을 진심으로 믿는 듯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연락이 안 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근처 숙박시설을 검색했다. 확실히 당일 예약 숙소의 가격은 많이 비쌌다. 다행스럽게도 1시간 정도 지나니, 메일이 도착했다. 메일에는 당황스럽게도 숙소의 열쇠가 있는 장소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장소로 가서 커다란 나무상자를 열었다. 차곡차곡 개어 있는 수건들 위에 커다란 열쇠가 놓여 있었다. 열쇠를 구멍에 맞춰 돌렸더니 '찰칵'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마치 보물 찾기를 하는 기분에 어느새 긴장과 짜증이 가셨다. 아무튼 비싼 숙박비를 새로 지불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마침내 보물을 찾다!!!

"딩동!"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벨소리와 함께 키가 큰 여자분이 찾아왔다. 이곳 호스트의 부인이었다. 바쁜 일이 생긴 남편을 대신해서 왔다고 했다. 남편과 통화를 하라며 전화를 바꿔주었다. 나는 속으로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라고 생각했지만 전화를 거절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해도 들릴까 말까 한 이탈리아식 영어인 까닭에 수화기 너머의 소리를 알아듣는 일은 무척 힘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사과의 의미로 2유로 정도 되는 도시세를 안 받겠다고 말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의 진심이 느껴져 한결 마음이 가볍고 밝아졌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받지 못했던 도시세 잔돈을 이곳에서 보상받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겨운 통화를 마친 후, 부인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웃으며 재차 사과를 했다. 부부는 모두 닮아간다고 했던가? 선한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남편의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이 별 일 없이 결혼했다면 이 둘의 모습을 닮지 않았을까?

베로나에 대한 친절한 브리핑을 부인에게서 들은 후 베로나 시내로 출발했다. 시내가 매우 작다는 부인의 이야기대로 '폰테나비' 다리를 건너고 나니 금세 시내 중심 번화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중,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그 유명한 '줄리엣의 집'이었다. 우리는 인파에 떠밀리듯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람들이 줄리엣 동상의 가슴을 만진 채, 사진을 찍고 있었다. 손이나 다리가 아닌 가슴을 만지는 모습이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요즘의 우리나라 정서로는 선뜻 받아들여지기 힘든 모습이었다.

“찍을래?”


일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빠! 아빠!"


어느샌가 혁우는 줄리엣 동상 옆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혁우의 오른손은 벌써 줄리엣의 가슴에 손을 올린 상태였다. 그 뒤를 덩달아 일우가 따라붙었다.


‘도대체 저 녀석은 누굴 닮은 거지?'


그 '누구'가 적어도 '나'는 아닐 거라 믿으며 카메라의 버튼을 힘껏 눌렀다.

줄리엣, 미안해요~



2017.3.24. 베니스-베로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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