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일기
아빠한테 혁우를 시켜 게임기를 사려는 계획이 들키고 말았다. 아빠는 귀신이다.
9살 일기
마트에서 장난친다고 아빠한테 혼났다. 아빠는 게임기도 안사주고 아빠가 밉다.
매년 여름 오페라 축제가 열린다는 아레나를 찾았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3분의 1 정도로 줄인 모습이다. 아레나 광장에서 베로나 포르타 누오바 역까지 뻗어 있는 도로 왼쪽으로 친숙한 엉덩이 표시가 보였다. 우리 삼부자의 성지인 맥도널드였다. 이곳은 다행스럽게도 키오스크가 있었다. 손님도 없던 까닭에 오래간만에 원하는 메뉴를 천천히 골라 주문할 수 있었다. 창구에서 주문할 때는 언어의 제약과 아르바이트 생의 눈치가 보여 적당히 주문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줄이라도 길게 늘어서 있으면, 뒷사람의 눈치까지 봐야 해서 시간에 쫓긴 채화면에 표시된 행사상품을 골랐던 적도 많았다.
하긴 기억해보면 우리나라에 있을 때부터 나는 승차권을 구입하거나 상품을 살 때도 사람이 있는 창구보다는 자동판매기를 선호했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상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직접 만나서도 말로 하지 않고 메시지로 대화를 하는 경우도 본 적이 있었다. 나를 포함해 사람과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공공시설이나 상점 등에 지속적으로 키오스크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높아진 인건비의 문제도 있겠지만 사람보다 기계를 대하는 것을 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욕구가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오래간만에 원하는 메뉴를 원 없이 주문해 보았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맥도널드 근처의 마트에서 장을 보았다. 그토록 주의를 줬건만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은 아이들은 마트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장난을 쳤다. 나는 몇 차례나 굳은 표정으로 주의를 줬다. 하지만, 아이들은 뭐에 그리 신이 났는지 내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화가 폭발하고야 말았다. 잔뜩 인상을 쓴 표정으로 계산을 마치자마자 마트 앞 한편에 아이들을 세워놓고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금세 시무룩해지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지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화난 표정을 바로 풀까도 했지만 금세 다시 장난을 칠 것 같은 불안감에 짐짓 화난 모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은 이미 내 표정만큼이나 캄캄해 있었다. 아이들과 아레나 앞 브라 광장 분수로 이동했다. 마트에서 아이들에게 사줬던 과자들과 맥도널드에서 구입했던 맥주를 먹기 위함이었다. 이곳 이탈리아의 맥도널드는 특이하게도 세트메뉴의 음료로 맥주를 주문할 수 있었다. 피렌체 이후로 술을 먹지 않기로 했음에도 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종종 콜라 대신 맥주를 주문해서 챙겨 두었다가 숙소에 돌아가 먹고 잠이 들곤 했다.
광장을 둘러싼 조명의 빛과 어우러진 투명한 분수의 물줄기가 매우 아름다웠다. 분수 너머로 보이는 2000살 가까이 먹은 아레나의 고색창연한 자태 역시 신비롭고도 황홀했다. 가족 단위로 외출을 나온 베로나 시민들이 분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이 정겹기 짝이 없었다. 우리나라 도시에도 이런 휴식 공간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떠올랐다. 유럽의 도시 곳곳을 오래도록 지켜온 광장들은 자칫 삭막하고 숨 막힐 수도 있는 도시의 삶에 숨통을 트여 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아레나와 분수, 형제들을 찾아라!!숙소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전자제품을 파는 마트에 끌려 들어갔다. 비디오 게임기를 구경하고 싶어 했던 아이들 때문이었다. 한참 게임기를 구경하던 혁우가 갑자기 사고 싶은 물건이 생겼다며 다가왔다.
" 게임기만 있으면 형과도 안 싸우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
모처럼 차분한 혁우의 말투가 기특해 일부러 가격을 물어줬다.
“280유로요. 지금 세일하는 거래요.”
마치, 280원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는 혁우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돈 단위가 천이나 만 단위가 아니니 만만한 가격으로 본 것일 거라 짐작하려는데, 갑자기 혁우의 등 너머로 익숙한 그림자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번 게임기 제안의 배후에는 일우가 있는 것 같았다.
"일우, 네가 동생한테 시킨 거지?"
"아.. 아니에요. 혁우가 사고 싶다고 해서 가격만 말해 준거예요."
가난한 아빠는 형제들의 계략을 피해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