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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Aug 18. 2019

다시 올게, 인스브루크!

티롤 박물관- 궁전 교회- 페르디난디엄 박물관

11살 일기

안산에서 온 아저씨를 만났다. 인스브루크에서 만나다니 반갑고 신기했다.


   

9살 일기

아빠는 왜 이렇게 기분 나쁜 박물관에 데리고 온 거야?




주말이어서인지 인스브루크의 거리는 한산했다.

인스브루크 중앙역에서 독일에서 벨기에로 넘어가는 열차와 나머지 구간의 좌석들을 예약했다. 잘츠부르크에서 비엔나로 가는 것 같은 짧은 구간은 예약이 필요 없었지만,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에서 프라하, 프라하에서 베를린 같은 구간들은 좌석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 예약을 해야 했다. 모두 대 여섯 시간을 넘게 타고 가야 하는 장거리 구간들이라 좌석이 없으면 내내 서서 가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미리 방문하기로 약속한 후배 A의 집이 있는 독일 에센에서 영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야 했는데 그 구간은 예약 필수 구간으로 반드시 예약을 해야 했다. 직접 역까지 찾아가 창구 예약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일정이 한가한 오늘이 딱 좋았다. 벨기에를 지나면 남은 일정은 영국뿐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긴 여정의 끝이 서서히 드러나려고 하고 있었다. 시원섭섭함과 함께 안도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매표창구는 매우 한산했다. 좌석 예약을 하느라 인파에 밀리고 불친절한 역무원에게 호되게 당했던 로마 테르미니 역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었다.


예약을 마친 후 인스브루크 중앙 역을 나선 우리는 계획했던 일정의 첫 번째인 티롤 민속박물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섯 군데의 박물관을 표 하나로 둘러볼 수 있는 콤비네이션 티켓을 끊었다. 아이들은 인스브루크 시내 박물관의 입장료가 무료였기에 어른인 내 몫으로 11유로만 지불하면 됐다. 우리가 들렀던 유럽 대부분의 나라는 어린이와 학생들의 교육과 문화활동에 대한 지원이 잘되어 있었다. 보통, 무료이거나 요금을 내더라도 할인을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금전적 부담 없이 마음껏 관람을 하고 있었다. 새삼 그들에게 감사했고,  다음 세대를 배려하는 그들의 환경과 노력이 부러웠다.


티롤 민속박물관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기괴한 모습의 인형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험하고 척박한 티롤 지역의 자연환경이 주민들의 상상력을 어둡고 무서운 곳으로 이끌었으리라. 아이들은 인형과 그림의 그 낯설고 기괴한 모습에 기겁을 하며 두려워했다.

 

"아빠 여기 너무 기분 나쁘고 무서워요."

"빨리 여기서 나가요."


평소 워낙에 공포영화 같은 장르를 싫어했던 아이들이 나를 잡아끌었다. 하는 수 없이 아이들에 이끌려 도망치듯 박물관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옆에 위치한 궁전 교회를 들렀지만, 아이들은 조금 전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건지 오래된 종교 작품들에 심드렁했다. 어쩌면, 이번 여행기간 동안 성당 내부를 너무 많이 본 탓도 있을 것이었다.  박물관 관람 대신 활동적인 일정을 잡는 편이 좋았을까? 안 그래도 박물관 대신 케이블 카를 타고 노르드케테 산을 오르는 일정도 생각했었던 차였다. 아이들은 오늘따라 유난히 박물관 관람에 소극적이었다. '우리말로 된 음성 가이드라도 있었으면 그나마 도움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낯설고 기괴한 느낌을 줬던 티롤 민속 박물관의 전시품
거칠고 척박했던 티롤 지역의 중세 생활상을 보여주는 디오라마

회화나 조각 등의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페르디난디엄 박물관'으로 향했다. 우리가 알만한 유명한 작품이 있는 곳은 아니어서 그다지 큰 기대는 없었는데 의외로 일우가 형이상학적인 조각이나 그림 같은 현대 미술작품에 큰 흥미를 보였다.  예상외로 만족하는 일우의 모습을 보니 그제야 박물관 일정을 잡은 것에 보람을 느꼈다.

일우가 페르디난디엄 박물관에서 제일 좋아했던 회화와 조각이 입체적으로 표현된 작품

박물관을 나서는데 한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

" 한국에서요. "

" 난 시리아에서 왔어요. 나 한국 잘 알아요. 난 안산에서 살았어요. "


그의 안산에서 살았다는 말에 살짝 놀랐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이 올라왔다. 젖은 라이터를 몇 번이나 켜대며 담뱃불을 붙이는 그의 허름한 행색이 나의 경계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가 웃는 얼굴로 내게 라이터를 내밀었다. 아마도 고칠 수 있으면 좀 고쳐달라는 뜻 같았다. 나는 그의 라이터를 받아서 살짝 보는 척만 하고는 이내 돌려주었다.


" 고장 난 것 같아요."

" 라이터 있어요? "

" 아뇨. 난 담배를 피우지 않아요. "


나는 얼른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그에게서 떠났다. 그의 이민자스러운 초라한 행색에 더해 모국이 시리아라는 말에 나는 그를 이미 이슬람교도로 단정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곧바로 방송에서 보았던 잔혹한 테러 장면으로 이어지며 그를 위험인물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분명 모든 이슬람 사람들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성으로는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같은 종교를 믿고 있다는 이유와 그의 초라한 행색만으로 그를 위험인물로 판단하고 있었다. 물론, 아이들의 안전에 대한 걱정이 내 의심의 가장 큰 이유였지만, 설령 아이들이 없었다 해도 의심을 안 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게 선한 웃음을 보여줬던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듬과 동시에, 어느샌가 의심과 편견에 갇히고 만 스스로에게 서글픔을 느꼈다.


처음 인스브루크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 작고 낯선 도시에서 3박 4일 일정은 너무 긴 거 아냐?' 하며 다소 후회까지 했던 나였다. 하지만, 이 유서 깊고 아름다운 도시는 미안할 정도로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많은 소중한 추억을 건네주었다. 내일 당장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고 서운하기까지 했다. 사람이든 장소든 첫인상과 편견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섣부른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훗날, 그와 비슷한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을 때
부디, 오늘보다는 편견 없게 대할 수 있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숙소에서 본 인스브루크 시내의 낮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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