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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여덟 명의 여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by 함지연

지난 연말 즈음이었다. 일을 마치고 헤어지기 전, 대표님이 내게 물었다. 다음 주 일을 끝난 후에 시간이 괜찮냐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송년회를 한다고 했다. 그녀들은 3,40대의 젊은 플로리스트였고,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나와 보조로 일하며, 이모나 고모뻘쯤 되는데 같이 밥을 먹자니 놀랐다.

그런 놀라움이 큰 목소리로 나와버렸다.


나를 끼워준다고요? 젊은 사람끼리 노는 자리에?


나의 반문에 퇴근 준비를 하던 다른 쌤들이, 무슨 소리예요, 지연쌤, 빠지면 안 돼요.

라고 말했다.

이제 겨우 그녀들의 이름을 알아가던 시기였다. 이제 겨우 담당하는 곳과 웨딩홀의 꽃 장식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는지도 익숙해지던 시기였다. 단상과 버진로드, 신부대기실. 장소마다 꽃은 조금씩 다르게 장식되었다. 계절에 따라 신부의 선호도에 따라 매주 다른 꽃을 만나며 결혼식에 주로 쓰이는 꽃들의 이름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을 때였다. 맡은 구역에 자리 잡고 부지런히 꽃을 꽂으며 연신 수다를 떨고 왁자하게 웃고 일상을 나누던 여자들.


얼마만의 회식인가. 일하는 사람들과의 송년회를 백만 년 전쯤 했던 것 같은데. 고마운 그녀들을 위해 작은 선물을 미리 준비했다. 모처럼의 송년회인데 꼬질꼬질한 모습은 하고 싶지 않았다. 평소보다 화장도 공들여서 하고 액세서리도 했다. 에코백 대신 가방을 골랐다.

엄마, 오늘 회식 때문에 늦을 거야.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출근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백만 년 만의 회식이니 당연히 이상할 수밖에.

신나게 먹고 마실 생각에 다들 와다다다 빠르게 일을 진행했다. 손발이 척척 맞게 일을 해서,

평소보다 일찍 일을 마쳤다. 일하기 편한 헐렁한 복장에 작업용 앞치마, 화장기 없는 얼굴의 모습만 보다가 앞치마를 벗은 그녀들은 조금 낯설었지만 예쁘고 명랑했다.


아직은 좀 어색한 채로 우리는 식당이 많은 번화가로 향했다. 우리가 일을 마치는 시간은 주로 오후 3시 전후였고, 그 시간에 영업을 하는 식당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브레이크 타임에 걸리거나 아예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문을 여는 식당이 많았다. 아직은 한산한 길에 멈춰 식당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혹시 영업 중인 가게가 있나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술과 요리를 함께 파는 식당을 발견했다. 아홉 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넓은 좌석도 있어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그날의 첫 손님이었는데, 음식이 나오고 술을 마시는 동안, 다른 자리에도 사람들이 차기 시작했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둘러앉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꽃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공통점으로 만난 사람들.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식물을 좋아하는 나. 비슷하면서도 개별적인 각자의 서사는 특별했다.

나만 힘든 것도 아니고 내게만 행운이나 불운이 오는 것도 아니고 내 삶만 평온하지도 않다. 누구나 굴곡이 있는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젊은 그녀들 역시 그랬다.


나와 다른 연령대를 살아가며 분투하는 여자들의 삶이 여전히 궁금하다. 나와 다른 세대 여자들은 어떤 고민이 있고 어떤 꿈이 있고 어떤 가치관으로 사는지 알면 알수록 흥미롭다. 그날 자연스럽게 그녀들의 고유한 이야기를 천천히 오래 들었다.

지연쌤 얘기도 해주세요.

내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가 되었다. 난임 끝에 귀한 아이를 얻은 여자의, 프랑스인 남자친구와 연애 중인 여자의, 몇 년 간 암투병을 했다가 완치한 여자의, 늙은 개 남희 씨를 사랑하는 여자의 어쩐지 예쁘고 매력적이다 했더니 배우라는 여자의 여러 직업을 거쳐 이제 플로리스트가 된 여자의 다정한 눈들이 내게 향했다.

나는 그녀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지나왔고, 때문에 더 많은 이야기가 쌓였고, 더군다나 내 이야기는 보통의 이야기들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

나는 30년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이혼 소송 중이며,

바로 지난주에 전 시아버지의 장례식에 조문을 다녀왔고,

다 큰 자녀들과 함께 새로운 주거지를 얻어 살고 있으며

한꺼번에 닥친 불행 앞에 주저앉지 않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소설을 쓰고 작가가 되었답니다.


사랑과 전쟁급의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눈앞에서 직관하는 기분이지 않았을까. 내가 낄낄 웃으며 ‘끝’이라고 외치자마자 그녀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여덟 명의 여자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니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무슨 일이지 하는 표정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던지. 그녀들이 어찌나 신나 하던지. 마치 자신들이 직접 겪은 일이라는 듯이.

다른 음식점으로 옮겨 2차를 하자며 일어났다. 이쯤에서 눈치껏 빠져주려고 했으나 안된다며 잡아끌어서 얼떨결에 따라갔다. 2차로 옮긴 술집에서도 우리의 이야기들은 계속되었다.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되자 갑자기 더 할 말이 많아졌다. 공감하는 부분이나 공통점이 있는 부분, 반려견과 함께 사는 이들이 많았기에 반려견에 대한 대화.

회식을 마치기 전, 네 컷 사진도 찍었다. 화면 안에 여덟 명의 여자들이 얼굴을 들이밀고 사진을 찍었다. 여러 차례의 실패 끝에 마침내 여덟 명의 얼굴을 다 담을 수 있었다. 예쁜 여자들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찍은 사진을 사람 수대로 뽑고 나눠 가졌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회식을 하는 것도, 그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것도 술을 마시며 속을 터놓는 것도 정말 오랜만의 경험이다. 나이가 드니, 점점 더 친구들과는 술자리를 하지 않게 된다. 음주가무보다 건강이 더 염려되는 나이이기도 하니까.

우리는 연말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녀들은 내게 꼭 책을 내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전했다.

맛있는 음식을 골고루 맛보고, 기분 좋게 취할 만큼의 술을 마시고, 웃음을 터트리거나 안타까워하거나 위로를 건네며 나의 이야기를 꺼내고 나누는 시간. 나보다 어린 세대의 삶을 알게 되던 시간. 꼭꼭 숨겨두었던 꿈을 보여주고, 응원받는 시간.

어쩌면 지금 내게는 이런 시간들이 필요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나 혼자 결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내 결정이 옳았는가 아니면 틀렸나, 신중하지 못했나. 어쩌면 언젠가 후회를 하려나 마음이 약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다정한 목소리가 간절하다.

한꺼번에 여덟 명의 목소리로 한꺼번에 응원을 받는 순간, 당신은 정말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순간,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해가 바뀌고 나는 그녀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올해 7월, 드디어 나의 책이 세상에 나왔고, 그녀들에게 내 책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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