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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May 16. 2018

세 여자



오늘도 포르투 이층집에서 에디터H다. 사무실을 한 달간 유럽으로 옮기자는 야심찬 계획으로 이곳에 와있다. 디에디트의 세계는 참으로 단순하다. 딱 세 명의 세계. 이제 곧 새로운 직원을 뽑겠지만 아직까지는 어떻게 모여도 딱 삼각형을 이루는 작고 작은 사회다.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함께 일하는 것과 함께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평생을 다르게 살아온 세 여자가 한 집에서 살 부비며 사는 게 쉬울리가. 오기 전에도 많이 걱정했고, 그 걱정은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으로선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오늘은 이층집의 세 여자를 소개해볼까 한다.



나이로는 둘째. 하지만 우리 회사의 대표이자 정신적 지주인 이 여자는 출발 전, 들뜬 마음에 머리를 투톤 핑크로 염색했더랬다. 18만원을 들여 염색한 작품은 과연 화려했다. “나 너무 주책맞아 보이지 않아?”라고 말하면서도 기어코 핑크 머리에 도전하는 아이러니한 성격이 매력이다. 멋진 핑크 헤어는 포르투에 도착하기 무섭게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하루하루 물이 빠져 다시 노랑머리가 되었고 이젠 머리 끝이 조금 발그레한 정도다. 사진으로 제대로 남겨두지 못한 게 아쉽다.


에디터M은 이층집에서 온갖 잡일을 맡고 있다. 못하는 거 빼곤 다 잘한다. 가장 먼저 일어나서 흐트러진 집안을 척척 정리한다. 하루종일 필요한 물건의 목록을 만들고, 쇼핑하고, 영수증을 정리한다. 우리 중 영어도 가장 잘 하고, 추진력도 뛰어나다. 일눈치가 빠른 편이라(감정적인 눈치와는 별개다) 한 사람이 뭔가를 하고 있으면 옆에서 재빠르게 보조에 들어간다. 내가 스테이크를 구울 땐 곁들일 샐러드를 만들고, 촬영이 끝나면 렌즈캡을 찾아 쓱 내민다. 함께 일하기 쉬운 타입이다. 과연 대표는 그릇부터 다르다.



최근에 카메라 스킬이 부쩍 부쩍 늘어가고 있는데 망원 렌즈의 매력에 푹 빠져서 뻑하면 대포같은 렌즈를 들이민다. 재밌는 사실은 뭘 해도 10년차 베테랑처럼 보이는 비주얼이라는 것. 아직 조작법도 잘 모르는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면서도 여유가 넘친다. 한 쪽 눈을 찡끗 감고 뷰파인더를 응시하며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뭐랄까. 지나가는 포르투 사람들이 보면 조선희 작가쯤 되는 줄 착각할 정도다.


그녀가 지독하게 못하는 건 내 말에 귀 기울이는 것과 문 여는 일. 유럽의 오래된 집들은 대부분 19세기의 문을 그대로 사용한다. 문고리와 열쇠구멍 역시 오래된 것들이다. 이 묵직한 대문은 그 역사 만큼이나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열쇠를 넣어도 쉽게 열려주는 법이 없다. 에디터M은 손재주가 좋은 편인데 이상할 만큼 악력이 약해서 도무지 포르투의 모든 문을 잘 열지 못한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갇히고, 외출 후에 문을 열지 못해 낑낑대고, 혼자 끽연하러 나갔다 테라스 문이 닫혀 갇힌다. 이것도 재주다. 혼자 보기 아까운 구경거리라 몽땅 영상으로 남겨두었다. 아, 그리고 엄청난 길치다. 길을 모르면 최소한 앞장은 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리더십이 너무나 뛰어나서 자꾸 모르는 길로 우릴 안내한다. 하지마라.


또 하나 더. M은 혼자있는 시간을 사랑한다. 가끔 우릴 버리고 개미 눈물만큼 따른 와인을 마시며 전자책을 읽을 때 가장 행복해보인다. 어제는 에디터M의 행복을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줬다. 그랬더니 어디서 아이폰을 소매치기 당하고 돌아왔다.



이번엔 우리 막내 에디터 기은을 소개해보자. 실제의 기은은 디에디트 영상에서 보여지는 모습과는 조금 다를지 모른다. 발랄하고 사랑스럽지만 체구나 얼굴에서 풍기는 이미지처럼 말랑말랑하지않다. 호불호가 강하고, 정의감이 넘치며, 악바리다. 쉽게 화내지만 쉽게 징징대지는 않는다. 상당히 의연한 성격이라 모두가 상상하는 ‘응석받이 막내’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 사무실에서 가장 징징대는 사람은 나다. 기은의 진짜 매력은 처음 상상한 이미지와 상반되는 언어 선택과 리액션. 우린 그녀를 ‘아재’라고 놀리곤 하는데, 나이보다 30년쯤 더 산 것 같은 태도로 살아간다.


막내는 이층집에서 ‘집요정 도비’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집은 구조가 복잡하고 넓어서 곳곳에 아이템들이 숨어있는데, 에디터 기은만이 모든 물건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숨겨져 있던 창고를 발견하고 우리가 애타게 찾던 쓰레기 봉투와 청소기를 가져다준 것도 막내다. 어떤 물건이 보이지 않을 때 “기은아!”라고 외치면 해결해준다. 집 안의 모든 물건과 구조를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원래 여기 살던 사람처럼 말이다. 처음 집에 도착해서 아무도 문을 열지 못해 울먹이고 있을 때, 문을 따는데 성공한 것도 막내다. “아니, 이게 왜 어려워요?”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우악스럽게 돌리며 문을 뻥, 차면 열린다고 설명해준다. 말은 쉬운데 우리가 하면 어렵다. 그 후로 한동안 문은 기은이만 열 수 있었다. M과 내가 요령을 익힌 건 나중의 일이다.


또 하나의 타이틀은 바로 디에디트의 체력왕. 양치질만 해도 팔이 뻐근한 우리와는 다르게 엄청난 체력과 운동신경을 자랑한다. 포르투에 도착한 이후로 막내의 거센 종용에 매일 아침 러닝을 하고 있다. 새벽부터 질질 끌려나간 내가 하는 건 빨리 걷기에 가깝긴 하지만, 덕분에 강제로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에디터 기은은 도루 강변을 달릴 때 가장 행복해보인다. 바람이 너무 좋다며 강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다리 위를 전력 질주하는데 내 달리기 속도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하염없이 뒷모습만 바라봤다.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내 체력은 “하찮은 뽀시래기”라고. 뽀시래기라는 표현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요즘 어린 친구들이 쓰는 표현인가 싶어 되물으니, 본인도 스물 일곱이라 어린이들 트렌드는 모른다고….


내가 우리 막내를 너무 우악스럽게 묘사한 것 같은데 사실 아기자기한 면도 많다. 처음 오는 유럽 나들이에 들떠 작고 화사하고 귀엽고 짧은 옷만 잔뜩 들고 왔더라. 손바닥만한 여름옷만 들고 왔는데 포르투는 무정하게도 햇볕 좋은 가을 날씨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다 결국 롱재킷을 새로 사야 했다. 모처럼 챙겨온 옷이 아까워 집 안에서 일할 때도 예쁘게 입고 일한다.



기은이는 내가 못보는 것들을 많이 발견한다. 길 가다 만난 어느 건물의 타일과 배관이 똑같이 초록색이라 멋지다고 감탄한다. 옆 집 문고리가 재밌다고 사진을 찍어 모으거나, 낙서같은 벽화를 하나하나 유심히 들여다보며 기록을 남겨두기도 한다. 똑같은 포르투 골목을 걸으며 같은 풍경을 보았는데 나는 느끼지 못하는 감성을 토해내는 게 신선하다. 그 애가 호기심 찬 눈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땐,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궁금해진다.


지금은 쇼파에 기이한 자세로 앉아서 영상을 편집 중이다. 살짝 인상을 쓰고 있다.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화났냐고 물어보면 아니라는데 왜 자꾸 묻냐고 화를 낸다. 흑흑. 미안해.



마지막은 나, 에디터H. 나이로는 이층집의 첫째지만 디에디트 최약체로 불린다. 순두부같은 멘탈에 저질 체력. 열심히 하는 건 아침밥 차리기, 점심밥 차리기, 저녁밥 차리기. 본인의 나약함과 귀여움에 깊게 취해있는 타입이다. 스스로를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는 애정이 많고 화가 많은 사람이다. 이 먼 곳까지 함께 와준 두 사람에게 고마울 따름.


나약한 첫째, 소매치기 당한 둘째, 강인한 셋째가 함께하는 이층집 이야기를 계속 기대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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