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걱정이 사라지고 유쾌해지는 사사로운 일들에 대하여
벚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에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얕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가득히 담겨진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가제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금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릿속에 떠올린다. 음영과 윤택과 색채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버린 꿈을 잃은 헌출한 뜰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배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시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를 깊게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죽어버린 꿈의 시체를- 땅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물과 불과 - 이 두 가지 속에 생활은 요약된다. 시절의 의욕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 두 가지에 있어서다. 어느 시절이나 다 같은 것이기는 하나, 가을부터의 절기가 가장 생활적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의 원소의 즐거운 인상 위에 서기 때문이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을 찧어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그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 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색 전기로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볼까 하고 계획도 해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책상 앞에 붙은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 새 없이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을 아끼고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니 하고 멸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에 창조적 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가는 가을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
이효석, <낙엽을 태우면서>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를 읽을 때마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을 찧어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부분에서 시대감을 잃어버리고는 한다. 이 글이 씌여진 시기는 1938년인데, 이미 백여년 전에도 백화점이나 원두커피 등 지금과 비슷한 수준의 문화 생활이 존재했다는 것에 한번씩 놀란다. 한편 모던 보이 시인 백석은 '연둣빛깔이 나는 더블버튼 양복을 입고 바다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검은 머리의 웨이브를 휘날리면서 광화문통 네거리를 건너가는 풍채'를 보여주고 '양말이라고 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보이지 않는 것일수록 나는 완벽하게 챙겨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지 않으면 대체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라고 말하기도 했다. ‘양말'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돈을 쓰는, 스타일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들이 그 시대에도 있었다. 또한 최근에 이상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가 양자 역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의 국문과 박사 논문이 발표되기도 했는데, 당시 경성제국대학에는 '이공학부'가 없었음에도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이라는 최신 학문을 수용하며 동시대 감각을 느끼려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도 반갑다. 어려운 시기에도 패배감에 젖지 않고, 생활인으로서, 세계인으로서 의연하게 살아갔던 사람들이 존재한 증거들을 보면서 박완서의 표현처럼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깨어나는 태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 최근 온라인으로 본 김상욱 교수님 강연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향유한 근대 문화나 학문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게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고 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는 억압되고 불우했던 시기로 규정지어져야 하는 정서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의 지배 논리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기에 너무 낭만적으로만 생각하면 안되는 부분이지만, 아무튼 당시 지식인들이 누렸던 근대 문화, 그들이 가졌던 삶에 대한 소소하면서도 다양한 호기심들을 엿보며 공감하게 되고, 내가 살아 있는 순간의 감각을 하나하나 느끼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만듦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도 다시 나의 순간들을 돌아보게 된다.
나도 가을이 빠른 속도로 깊어져 가는 걸 보면서 울블랭킷을 두개 꺼냈고, 이제 자고 일어 나면 푹신한 양털 실내화를 신고 부엌으로 가 '커피의 낱을 찧어' 향기를 맡는다. 가을과 겨울에 필요한 양말과 스웨터의 색상을 매치해 보고, 군고구마나 귤을 먹으면서 볼 영화와 책의 목록을 작성해 본다. 커피 말고도 따뜻한 차를 많이 마시는 날들이니 차 종류도 몇가지 갖춰 놓아야 할 것 같다. 양초도 크기별로 준비해 놓아야 밤의 기운이 스산해지지 않을테다. 크리스마스 장식은 오나먼트 서너개만 작은 공간에 둘 것이고, 그보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누구와 만나서 무슨 술을 마실지가 더 궁금해진다. 크리스마스 테이블에 올릴 음식과 잔과 접시들에 대해서도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한편 무얼 살지 보다, 무얼 비워낼지도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이렇게 사사로운 일로 생각에 잠기니 정말 이효석 작가의 말대로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유쾌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