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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혼 Oct 24. 2021

담담하게 걷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우울증은 현대인의 감기’


 라는 말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현시대를 사는 1인으로써 부정할 수 없는 문구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감기 증상을 느끼는 날보다 우울한 날들이 많기도 하고, 많은 매체에서 우울이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을 보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짐작이 들게 한다. 


 여전히 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고 우울한 감정이 감기와 같은 질환에 비해 가볍게 생각되는 경향이 있는 듯 하지만, 우울한 감정과 그로 인한 신체 변화는 감기보다 독감에 비유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최근에 기분이 많이 울적하다. 감기도 걸리는 사람이 자주 걸리듯, 우울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 우울해지기 쉬운 것이다. 산후우울증이 출산의 주체인 아내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했는데, 검색을 하고서 알게 된 것은 부, 모 모두에게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쑥쑥 크는 아들과 달리 좀처럼 열심히 무언가를 해보려는 마음이 들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자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다시 그 녀석이 찾아오고 있었다.


 

출처: 아산병원 홈페이지


  산후우울증은 주요우울증에 속한다. 위의 증상을 살펴보면 육아를 하는 부모들이 대부분 겪을 만한 것들이다. 출산 후, 여러 후유증이 동반되는 산모들이 아버지들보다 더욱 우울증을 겪을 확률이 높겠지만 일부 아버지들 또한 우울증을 겪는다고 했다. 우울증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내가 느낀 증상대로 순서를 바꿔보자면 이렇다.


 1. 불면 또는 과다 수면

 2. 피곤 또는 에너지의 감소

 3. 일상 대부분의 일에서 관심 및 흥미 감소

 4. 식욕 감소 또는 증가

 5. 정신운동 지연 또는 정신운동 초조

 6. 무가치감, 부적절한 죄책감

 7. 집중력 저하, 우유부단


 공교롭게도 자살에 대한 증상만 제외하면 나머지 증상들이 자연스레 연결된다. 밤낮없이 아이를 돌보다 보면 수면부족(강제 불면)으로 피로가 쌓여가고 삶의 의욕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 보면 식욕이 감소하거나 폭식을 하게 되고 정신은 멍한 상태가 자주 나타나며 집중력도 낮아진다. 이것저것 찾아보아도 수학 공식처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육아 때문에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또한, 나의 외모와 무기력한 육아 스킬에 자존감도 낮아질 법하며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우유부단해지게 마련이다. 우울증이라고 진단할 수 있는 증상에 딱딱 맞아떨어지는 삶의 형태가 바로 육아다.


 2020년, 대한민국 어딘가에 사는 한 부부는 육아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되었고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살하고 싶다거나 아들을 어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가끔씩 정신이 무너지는 듯한 때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안 좋은 상황 속에서 아들을 보며 기쁨을 느낄 때도 있다. 왔다 갔다 하는 감정처럼 삶 자체도 혼돈 그 자체다. 모든 것들이 뒤엉켜 있으며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


  힘들지만 예전처럼 누군가가 도와주기만을 기다릴 수 없다. 하루빨리 이겨내고 우리 가족을 도와주어야 했다. 잠자코 이번 사태를 분석해 보았다. 가장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신체의 피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들에게 맞춰야 하는데서 오는 스트레스와 정신적 피로였다. 하지만 아들은 통제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내가 바뀌어야 했다.


 답은 태초의 삶에서 찾을 수 있었다. 원시인들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았던 것처럼, 육아도 그러해야 했다. 기우제를 올리고, 조각상을 보고 기도하며, 자연이 내 말을 따라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담담하게 아들의 뜻을 따를 필요가 있었다. 어부들은 작은 배를 타고 하루하루 그물을 올린다. 더 잡아도 덜 잡아도, 그들이 항상 자연에 감사하는 것처럼 아들을 돌보아야 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획하고 조절하려는 인간의 심리는 육아에 통하지 않았다. 마음을 비우고 나니 피곤함 속에서도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착각일 수도 있다.) 오늘 밤에도 잠 못 이루고 마음을 졸이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침착하게 키를 잡고 견뎌내면 언젠가 폭풍우가 잦아들고, 세 가족의 삶이 지금보다 순조로워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전날 밤의 거친 항해를 끝내고 영광의 상처를 얼굴에 그대로 드러낸 채 직장으로 출근한다. 그리고 창 밖의 어딘가를 응시하며 고요한 아침에 어울리는 따뜻한 커피를 한 잔 하고 있으면 멀리서 인생 선배들이 다가온다. 그들은 온화한 미소와 무언의 끄덕임으로 나의 육아를 응원한다.


"아이고~ 눈이 쑤욱 들어갔네?"


"당분간 잠은 못 잔다고 봐야지~."


 또다시 시작될 것 같은 그들의 육아 일대기를 피해 자리를 뜬다. 육아를 알기 전에는 선배들의 배가 초라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배는 노련하게 항해를 버텨낸 야무진 방주처럼 보인다. 이제 막 바다에 띄워진 나의 작은 배도 그들의 배처럼 갖은 풍파를 겪겠지만 내가 죽는 날까지 항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들처럼 하루하루 무사히 항해를 마치고 잠깐의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이 땅의 모든 부모님들께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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