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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K Mar 07. 2020

타다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단상

공간으로서의 자동차

‘타다’가 결국 서비스를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법적인 문제가 없었음에도 진행되었던 검찰 고발, 무죄가 선고되었음에도 이뤄진 행정부와 입법부의 발 빠른 법안 개정으로, 해당 서비스는 두 손 두 발이 모두 잘리게 되었다. 이는 특정 서비스를 향한 권력의 지속적인 견제가 과연 합당하였는가라는 이슈를 남겼다. 한편 일각에서는 그러한 타다는 도대체 무엇을 혁신하였는지를 반문한다. 여기에는 우버의 짝퉁이다, 결국은 택시의 대체재이다 등의 여러 가지 의견이 따라붙는다. 이에 대해 타다의 옹호자들은, 타다의 데이터 기반 실시간 차량 호출 서비스가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 혹은 택시에 비해 이용자 입장에서 서비스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주장한다. 이 와중에 이 글은 조금 다른 지점에서 타다가 남긴 의의를 짚어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공간으로서의 자동차’이다.


타다와 우버의 차이는 어쩌면 우연에 의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둘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타다가 ‘카니발’(11인승 RV모델)을 전면 지원했다는 것에 있다. 이는 타다가 한국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 서비스를 마련하다 보니 생긴 결과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타다는 11인승 이상의 차량의 경우 기사가 포함된 대여가 가능하다는 조항에 서비스의 법적인 근거를 둔다.  타다는 결과적으로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연예인들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타고 다니는,’ 혹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빠 차’인 널찍한 공간의 차량을 서비스하게 된다. 이는 이동 중에도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수요를 발생시켰다. 다시 말해, 이는 이동이 주된 목적이라기 보단, 이동 중에도 무언가(웹서핑이든 휴식이든 뭐든 다)를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주는 것이 주된 서비스가 되었다. 즉, ‘수송’은 이 서비스의 요소이긴 하지만 핵심은 아니다.


이동을 하고 있음에도 이동을 개의치 않는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이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핵심이 숨어있다. 바로 기초적 행위를 외부에 떠넘기려 하는 일련의 현상이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빨래를 세탁기에 위임한 뒤로, 세탁 과정에서 기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경 쓰지 않는다. 때는 알아서 세탁기가 빼는 것이다. 이동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자율 주행이 이를 대체할 것이다. 그러면 이동은 알아서 당연히 되는 것으로 변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버튼만 누르면 수직으로 알아서 이동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다른 것에 몰두하고 싶어 한다. 세탁의 예시로 돌아오면, 누구도 세탁기 돌려놓고 세탁기만 쳐다보고 있지 않는다. 산책을 가든 거실에서 티비를 보든 딴짓을 한다. 즉, 뻔한 소리지만, 기계적 대체는 ‘딴짓’에 대한 수요를 발생시킨다.


그런데 ‘이동’은 다른 기계적 대체와 좀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 이동에서는 사람의 신체가 구속된다. 세탁기가 세탁하고 청소기가 청소하는 동안 인간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지만, 이동은 인간의 신체가 이동 과정에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신체를 둘러싸는 ‘공간’이라는 요소가 따라붙는다. 이 때문에, 자율 주행 동안에 이뤄지는 ‘딴짓’은 차량이 제공하는 공간 안에서 구속된다. 따라서 한쪽에서 자율 주행 기술을 개발하고 나면, 반대쪽에서는 이동 중의 공간을 관리하고 공급하는 서비스가 당연히 따라붙게 된다. 나는 그것이 우연에 의해 촉발되었든 아니든 간에, 바로 이 지점에 타다 서비스의 핵심이 있다고 본다. 실제로 타다는 차량을 타고 내리는 과정과 내부 공간에서 브랜드 경험을 녹여내고자 애썼다. 문도 자동으로 열리지 않는가!


자율 주행을 내가 직접 개발할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율 주행이 주어진 이후에 변화할 판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동은 하지만 이동 과정에 일절 신경 쓰지 않고 대신에 차량을 사적인 공간으로서만 생각하는 수요의 탄생이다. (이러한 고객층에게 타다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에 의해 규제를 받는 것은 얼마나 황당할까.) 이 영역에는 많은 새로운 전문 분야와 서비스들이 탄생할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로 인해 변화될 자동차 디자인이 매우 궁금하다.


그동안 자동차는 ‘나의 조종에 따라 잘 달릴 것 같은’ 이미지를 내외부에 심어주려고 애써왔다. 이 숨은 메시지는 내부에서는 콕핏 스타일 인테리어로 발현되고, 외부에서는 내 드라이빙의 역동성을 잘 드러내 주는 조형으로 발현되어 왔다. 모든 자동차 모델이 역동성 혹은 스포티함을 다양한 요소에 조형으로서 녹여내려고 애써왔던 것은 모두 이 메시지에서 출발해왔다: 왜 그릴과 휠은 커지고 벨트라인은 위로 올라갔을까.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자동차 디자인의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런데 고객이 더 이상 이를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우리는 이미 하드웨어의 퍼포먼스를 외부로 전혀 표출하지 않는 디자인에 익숙하다. 애플의 제품군이 그러하다. 애플 제품에서 게이밍 랩탑 혹은 데스크탑이 뽐내는 메카닉한 형태는 찾아볼 수 없다. 초고성능의 제품군 또한 마찬가지다. 애플은 하드웨어의 퍼포먼스를 숨기는 대신 미니멀하고 아주 섬세한 재료-마감을 전면에 프리미엄 이미지와 함께 내세웠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하드웨어에 대한 무심함을 드러내는 디자인이 있다. 바로 테슬라의 사이버 트럭이다. 개인적으로 사이버 트럭의 무심하다 못해 못생긴 외형은 아주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동 수단임에도 이동에 대한 용역에 무심해진 태도는, 결과물의 물성 혹은 물리적 외형에 무심한 태도로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두 무심함의 공통점은 실제 물리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운동적 행위와 영향력에 대해 신경을 끈다는 점이다. 그럼 도대체 디자이너는 어디에 열정을 태우게 될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기업이라면 결국 제공하는 공간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경험에 목숨을 걸게 되지 않을까.


이쯤에서 나의 관심사인 건축을 돌아보자. 아주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겠으나,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상상이 가능하다; 어떻게 지어질 지에 대해 1도 신경 쓰지 않는 건축가 세대가 등장하는 것, 즉 자동차 디자이너가 자율주행 기술 개발의 주역이 아니듯, 건축가(이를 디자이너로 정의한다면)가 (파라메트릭 알고리즘이든 무엇이 되었든) 모든 BIM에 대해 무심하며 대신 디자인 자체에 몰두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미래의 건축-디자이너에게 기대해 볼 수 있는 태도는, 구축 프로세스에 개의치 않고 마음껏 비물질적 상상을 펼치는 것이 아닐까? ‘자동차의 외형이 아니라 자동차 내부 공간이 주는 경험-인터페이스에 집중하는 디자이너’ 같은 건축-디자이너의 등장이 너무 당연해지지는 않을까?


(물론 구축 프로세스의 인공 지능화 혹은 자동화는 다른 누군가의 용역 범위로 남을 것이다, 마치 IT에서 개발자들이 몰려들어 자율 주행을 개발하듯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대부분의 시민들이 택시를 싫어하는 이유는, 이동의 목적에는 충실한데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택시가 심각할 만큼 무심하다는 것에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동 중에 제공받는 공간에 대한 개념이다. 택시 기사에게 택시는 자신의 공간이며, 자신의 목적은 손님을 이동시켜주는 것에 있을 뿐이다. 가속과 날치기 그리고 급정거 등의 난폭운전도 모두 목적지 도달에만 신경 쓰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다. 여기서 손님의 승차는 기사의 등에 업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대우를 받는다. 즉, 택시는 이동 중에 공간을 담보해주지 않는다. 이 때문에, 타다와 같은 서비스의 등장은 애초부터 택시 기사가 안전 운전을 하고 친절해진다고 해서 극복 가능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는 타다가 던진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운전 안 하는 동안 그 안에서 뭐할래?'






커버 이미지: 구글 이미지 검색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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