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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Aug 23. 2020

배삼식 <화전가>

[커피와 촥릿을 먹고 밤새워 노는 이야기]

 1950년 4월이다. 기우뚱기우뚱하고 아슬아슬하고 격동하는 때에 여성들이 한데 모인다. 만주로 이민 가서 고생하다 돌아온 기억을 안고 있다. 삼팔선 너머 이북으로 간 큰사위를 걱정하고 미워하는 마음도 안고 있다. 숱한 추억을 안겨준 채 먼저 죽은 첫째 아들도, 감옥 가서 여태 안 돌아오는 다른 아들도, 쥐 잡듯이 이 잡듯이 국민을 잡아대는 국가도, 언니랑 동생만 위하는 것 같아 서러운 둘째 정아도, 영어로 된 시구를 외우며 꿈을 품고 허세를 부리는 막내 봉아도, 그리고 마음 아릿한 기억과 여성들이 더 있다.


 이들은 엄마의 환갑을 맞아 모여서 밤을 새운다. 몸속에 사는 어떤 벌레가 두 달에 한 번씩 있는 경신일 밤에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죄를 일러바쳐 그 죄만큼 명을 제하는데, 잠을 안 자면 벌레가 하늘로 몰래 올라가지 못해서 밤새 잠들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이 핑계로 모두 밤을 새우자며 웃는다. 그리고 다음날 화전놀이를 가기로 한다. 딸들은 호기롭게 환갑잔치를 열겠다고 말했으나 엄마 김 씨는 화전놀이에 가고 싶다고 그런다. 곱게 차려입고 들로 나가 화전을 해 먹자고, 예전에는 많이 그랬다고.


 모두 들뜬다. 모여서 둘째 딸 정아가 가져온 초콜릿과 커피를 마신다. 초콜릿은 달고 쌉쌀해 모두 좋아하지만 커피는 별로다. 쓴 맛이라 커피에 설탕을 타 입안에서 굴리면서 꿀꺽꿀꺽 마신 뒤 입가심으로 설탕물을 한 사발씩 들이킨다. 커피를 사발로 마셔서 잠도 안 오는 데다 날이 날이라고 이웃이 술 한 독을 선물로 가져온다. 여성들이 모이면 잔치가 커지는데 다들 뭘 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척척 음식을 하고 척척 나르고 척척 상을 차린다. 모두 모여 야식과 술을 먹는다.


 곱게 차려입은 서로를 보고 칭찬하고 만지고 놀리고 옛날 얘기를 하고 선물을 나눈다. 나는 별 장면 아닌 모든 장면들이 별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하룻밤 놀다 헤어지는 여성들이 진한 격변의 삶을 나누는데 나는 자꾸만 마음이 파스텔톤으로 물든다. 고운 옷의 색깔들과 꽃잎이 날리는 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옛날 안동 말로 사는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이어진다. 안쓰럽고 진지하고 우습게 사는 여성들이 좋다. 나이 든 여성들이 당신들의 인생 속 숱한 별일들을 별일 아닌 듯 얘기하는 노련함이 좋다. 수토병으로 고생하던 만주에서 이민 생활할 적에 형편이 어려워 결혼 패물을 죄다 팔았는데, 만주로 떠나기 전에 시누가 훔쳐간 옥비녀는 덕분에 안 팔았다며 말을 흐리는 넓은 인생이 좋다. 나는 이 여성들의 대화를 읽으면서 환갑의 밤을 같이 새운다.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낱낱이 알려지는 솔직한 모습의 여성들과 시대상과 시린 기억을 더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알았다. 나는 늙은 여성의 서사를 좋아한다.


 봄기운이 어지러운 4월인데 하필이면 1950년이다. 그 봄은 유독 아슬아슬했겠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었으리라. 봄은 원래 아슬아슬하니까 다들 그냥 지냈을까. 첫째 딸 희아는 배우자를 보러 삼팔선을 넘었을까. 그리고 다시 김 씨를 보러 안동으로 돌아왔을까. 나는 그 밤 이후를 걱정한다. 대구로 간 홍다리댁은 잘 정착했을까, 장림댁은 며칠 있다 다시 안동으로 왔을까. 만삭인 영주댁은 아기를 순산했을까. 그들 말고 다른 여성들은 그 봄을 어떻게 났을까. 한국에 돌아가면 우리 할머니한테 꼭 물어야겠다. 1950년 4월에 어땠느냐고.


 예수정 배우가 연기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지 못해서 몹시 아쉽다. 누워서 휴대전화로 포스터를 보고 주먹으로 침대를 팡팡 쳤다. 달리 방법이 없어 전자책으로 희곡을 구입해 읽었다. 얼마나 먹먹하고 웃기고 아름다운 장면들이었을까, 관람하고 싶어 애가 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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