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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Jul 28. 2021

<아니 그래도 너무 잔인한 게 아닌지>

(사진은 오로빌 안 나무 심는 공동체, 사다나 포레스트의 비건 밥상)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니 재밌게 보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럴 때 나는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시간을 잡아두고 싶다. 끝이 있어서 아름답다는 건 나도 이해하는데, 아니 그래도 너무 잔인한 게 아닌지 생각한다. 아무리 인간 수명이 연장되고 있대도 그 끝에 죽음이 있긴 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다들 조금씩은 슬픈 채로 산다. 그러다가 미련 많은 나는 이따금 밀려오는 슬픔 파도에 피해를 입는다. 육십 년 후 혹시라도 없을 곰을 그리워하고 이미 끝나버린 지난 여행에 미련을 갖는다. 삼차원 존재에게 시간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 다시 돌아갈 수도 건너뛸 수도 없고 심지어 일시정지도 할 수 없다. 잊고 싶지 않은 것을 잊어버려야만 하고 겪고 싶지 않은 일을 견뎌야만 한다.


 오늘은 인도에서 한 달가량 머물렀던 공동체 오로빌에 관해 쓸 계획이었다. 당시 모아 두었던 글감 파일을 열었다. 별로 성에 차지 않았다. 곰에게 오로빌 얘기를 기록해 둔 것이 없냐고 물었다. 그는 짧은 메모를 보여 주었다. 오로빌이 어떤 곳이었는지 기록된 간략한 묘사였다. 마음에 드는 단어나 구절도, 나를 사로잡는 글감도 없었다. 후회스러움이 조금 올라왔다. 당시의 기록이라고는 곰과 다투고 난 심경 변화 같은 것뿐이었다. 과거의 내가 여행을 귀중하게 생각하기는 한 건지 짜증이 났다.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한참 생각하니 드러난 사실은 그때 내가 열심히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곰과의 결혼 생활이 시작된 지 겨우 두 달 남짓이었을 때라 누가 옳은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려내는 데에 혈안이 되어 그와 하루 열 번씩 싸웠고 여행지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싶은 나와 방에 누워 집을 그리워하는 나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영어로 말도 잘 못하던 시절이라 수다를 떨자니 수줍었고 강연을 듣자니 알아듣기 어려웠다. 스콜피온 앤트라고 불리는 독개미에 물려 걷지도 못했고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입술에 알레르기가 돋아나 밥도 잘 못 먹었다. 해독 작용을 하는 ‘님 나무’의 잎을 빻은 가루를 물과 섞어 입술과 발가락에 묻히고 가만히 고통스러워하며 낫기만을 기다렸다. 아, 나는 거기서 대체 어떻게 더 열심히 살 수 있었을까. 망각을 기어올라 잊었던 시간을 회상하니 과거의 나는 참으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게다가 바로 그다음 여행지인 꼴까타에서는 지저분한 벤치에 앉았다는 이유로 엉덩이에 접촉성 피부염이 생겨 엎드린 채로 일주일 넘게 보내기도 했었다. 그때는 그런 식으로 지나가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시간을 돌이키는 게 아니라 지금의 내가 오로빌에 간다면 더 많이 기록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다년간의 타지 생활은 빠르게 적응하고 무디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갈 수 없고 나는 계속 망각을 기어올라야 한다. 더 부지런히 기어올라서 지난 여행을 넉넉히 기록해 두고 싶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여행했다. 부지런히 보고 만나고 말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돈보다 시간이 많은 여행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느긋했다. 끝난다는 것을 알지만 끝을 생각하면 너무 슬프기 때문에 초조한 마음으로 게으름을 피웠다. 그래도 그러지는 말 걸 그랬다. 내 인생 끝의 죽음을 알지만 번번이 슬플 수는 없으니까 늘 조금씩 슬픈 채 사는 것처럼, 여행도 그렇게 할 걸 그랬다. 끝이 다가오니 드는 후회다. 삼차원 존재의 시간은 미련을 뚝뚝 흘리면서 공간을 둘러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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