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더리 Oct 11. 2021

배고픔에 관하여.

나에게 저녁을 허용한다.

배가 고프면 온 몸의 감각이 살아난다. 배가 고프면, 한 번에 5초 정도 지속되는 고통이 10분, 30분 또는 한 시간에 한 번씩 나를 자극한다. 그 자극은 내가 몸의 감각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한다. 속이 비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해 주려는 것처럼, 무엇인가 내 속을 파는듯한 느낌이 든다. 누군가 내 위장을 꼭 비틀어서 짜는 것 같다. 그렇게 내 위는 나에게 음식을 달라고, 그의 불만족을 끊임없이 표현한다.


나는 이러한 배고픔의 감각을, 어두운 방 안에서 만 원짜리 무드등을 켜놓고 침대에 누워서, 넷플릭스나 책, 유튜브를 보며 반복적으로 무시하는 것에 익숙하다. 20대 초반에는 배고프지 않은 상태로 잠에 들면 두 시간 이상 잘 수가 없었다. 포만감 있는 상태로 침대에 누웠을 때, 내 위의 무게가 어색했다. 배에 힘을 풀고 척추를 마음 놓고 펼 수가 없었다. 허리를 펴면 음식이 들어가서 커진 내 위의 존재감이 더욱 잘 느껴졌다. 그 위가 차지하는 공간이 당황스러웠다. 배부른 상태로 침대에 누우면, 나는 누운 내 몸 위에 놓인 음식 덩어리와 그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워 있는 그 상태는, 내가 아무런 움직임 없이 음식물의 무게를 고스란히 내 몸 안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공포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배부른 상태로 눕는 것을 싫어한다. 죄책감에, 무서움에, 걱정에, 그 배부른 위가 내 몸 안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배가 고프면 몸은 괴로워도 마음은 편안하다. 잠은 아무래도 신체적 고통보다는 정신적, 심리적 고통이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배가 고파서 속이 아파도, 나는 배고픈 상태를 만들었다는 위안감에 매일 밤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배고픔의 감각으로 잠에서 깬다. 가끔은 음식을 생각하면서 깨기도 하고, 음식 꿈을 꾸다가 일어나기도 한다. 배가 고프면 고플수록, 배고픔을 무시하는 것에 익숙해질수록 음식에 더 집착하게 된다. 음식을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발적인 굶음을 겪는 사람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부할 뿐, 무시할 뿐이지 욕망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먹지 않을수록 그 욕망은 더 커져간다.


그러다가 도저히 이 밤의 배고픔을 무시할 수 없는 날이 40일에 한 번씩 온다. 생리하기 바로 전 날이다. 인스타그램에 "식단일기"나 "다이어트 그램", "다이어트 소통"을 하는 여자들 중에는 이런 시기에 "이를 악물고 이겨낸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임신과 출산 과정을 네 번이나 반복하며 운동과 식단을 꾸준히 해서 "워너비" 몸을 만든 주부로 유명한 "스미어터"도 자신의 식단 규칙 ("스미 식단")에 이런 시기에도 꼭 정해진 식사 시간대와 양을 지켜야 한다며 본인도 생리 전후에 오는 식욕을 따뜻한 차와 물을 마시며 "이를 악물고 이겨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도 항상 음식을 생각하고, 음식을 주시하며, 본인의 욕구가 부담스럽고, 참다가 한 번쯤 "무너진다".


나를 잘 먹여주겠다고, 배고픔을 억지로 참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외모와 체중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요즘 문제로 떠오르는 SNS 도 분명히 한몫을 한다. 하지만 여성들의 체중에 대한 고민은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가 탄생하기 수 십 년 전부터 있었다. 다이어트 산업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돈을 벌어들인다. SNS와 연예인들로 인해 몸에 대한 집착과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이 비정상적으로 왜곡되고 도저히 건강한 방법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정도까지 다다랐다. 나 혼자 열심히 날씬하지 않은 내 몸, 두 허벅지 사이가 떨어지지 않은 내 몸, 옆구리 살이 매끈하지 않는 내 몸을 애써 사랑해 보겠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딜 가나 보이는 날씬한 여자와 그 여자를 대하는 사회의 태도는 같은 여자로서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보이는 좋아요 수와 댓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들의 가냘픔과 여리한 자태. 날씬하면 얻을 수 있는 그 특유의 분위기와 태도를 나는 여전히 갈망한다. 가지고 싶다.


하지만 나도 날씬해봤다. 지금은 흔히 말하는 "표준" 몸무게이지만, 스물두 살 때 시작한 다이어트로 1년간 10kg가량을 감량해서 누가 봐도 날씬한 (저체중의) 몸이 되었다. 헬스장에서 비싼 돈을 주고받은 피티와 닭가슴살, 고구마, 계란으로 만들어진 몸이었다. 이 시기에 나는 2주에 한 번씩은 무엇인가에 홀린 듯 꼭 폭식을 하게 되었고 하루 종일 먹을 것 생각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뺀 살인데, 다시 찌지 않겠다고 아등바등했지만 결국 천천히 나의 "세트 포인트" 체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내 몸이 가장 편안한 체중 구간, 나는 이곳으로 자꾸만 돌아온다.


어젯밤은 나에게 40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생리 전날이었다. 오후 다섯 시쯤, 도저히 배고파서 안 되겠다며 냉장고에서 고구마와 계란 두 개를 먹었다. 무척 맛있었다. 밤고구마의 은은한 달달함과 퍽퍽함. 고구마 껍질에서 나는 흙냄새와 종종 씹히는 섬유질의 까끌거림. 훈제 계란의 미끌거림과 고소한 노른자. 내 목을 지나서 내 위에 포근히 안착하는 느낌. 고구마와 계란을 먹기 전에는 냉동실에 얼려둔 크림 단팥빵이 먹고 싶어서 자꾸만 생각이 났는데, 결국 해동시키려고 꺼내 두었다가 그 새를 못 참고 고구마와 계란을 먹은 것이다. 빵이 다 해동되었을 쯤에는 식욕이 사라져서 냉장고에 넣어뒀다. 그리고 오늘 아침으로 먹었다. 결국, 먹고 싶은 음식은 어떻게 서든지 먹게 된다. 이길 수 없는 게임이다.


어제저녁 때 먹은 음식으로 포만한 배를 가지고 밤 열 시쯤 잠에 들었다.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무엇인가를 먹어야 했던 그 충동적이고 괴팍한 배고픔의 감각이 없었다. 온몸이 고요하고 차분하고 평온했다. 이런 안정감과 충만함으로 매일 아침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분간은 여전히 계속 날씬하고 싶겠지만, 그럼에도 이제부터는 저녁을 먹어 볼까 한다.



작가의 이전글 직장인이 되고 나서의 계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