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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주 May 13. 2022

입마개는 선생님이 하셔야겠는데요

해리와 나 24



퇴근이 늦은 어느 날, 옥상에서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던 해리를 데리고 내려와 집 근처 공원에 들렀다.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주차장 한편에 차를 댄 다음 해리를 내려 공원으로 들어선 순간 뒤에서 누군가 소리를 쳤다.

“그 개 데리고 산책할 거예요?”

높은 톤의 목소리와 ‘그 개’라는 표현에 느낌이 싸하다. 또 시비가 걸린 걸까.

“그런데요.”

그러자 한 톤 더 높아진 목소리가 돌아온다.

“입마개도 안 하고요?”

그놈의 입마개, 또 입마개 타령이다.

“제 강아지는 입마개 의무 견종 아니거든요.”

말을 받아치자 목소리는 더 높아지고 말은 짧아졌다.

“그래도 개가 크잖아.”

해리가 가까이 다가가거나 누군가를 위협하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얼굴도 보이지 않는 먼 거리에서 사나운 목소리만 자꾸 돌아온다. 기분이 상해 산책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지만 오래 기다린 산책을 나선 강아지의 벌렁거리는 코를 보니 돌아갈 수가 없다.

“개가 커도 사람에게 위협적인 행동은 안 해요.”

그렇게 말을 맺고 공원으로 들어섰다. 처음 겪은 실랑이도 아니고 상대방이 쫓아오거나 억지를 부려 더 큰 시비가 붇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산책하는 내내 마음이 불쾌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더 큰소리를 듣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싶어서 화도 났다.


사실 해리와 산책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시비가 걸리는 날이 많다.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는 사람부터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람, 기분 나쁜 말을 한마디 툭 밷고 지나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의 스타일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그 내용을 잘 들어 보면 그들의 레퍼토리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입마개 타령이 있다. 입마개는 강아지가 입을 이용하여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강아지의 주둥이에 씌우는 안전 용품이다. 예민하거나 공격성이 높은 강아지에게 입마개를 씌우면 입질이나 물림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모든 강아지가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이 아니며 강아지에게 예민한 부분인 주둥이에 마개를 씌우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를 주는 행동이기 때문에 필요한 상황이나 경우에만 입마개를 씌워야 한다.

현행 법도 법에서 정한 맹견의 경우에만 입마개 착용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법을 근거로 우리 개는 의무 대상이 아니라고 피해 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도 이 규정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개체의 공격성은 품종이나 크기라는 기준으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맹견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나운 것은 아니며 반대로 맹견이 아니라고 해서 사납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만약 해리가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하거나 입질을 한다면 해리가 맹견이든 아니든 나는 해리를 교육시키고 입마개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법적인 기준을 정확하게 인지하거나 반려견과 함께 사회 속에 살아가기 위한 반려인들의 노력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런 공격 행위를 하지 않은 반려견과 반려인을 위험 분자 취급하면서 으름장을 놓고 과도한 규제를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몇 년 전 정부가 체고가 40cm 이상인 대형견에게 입마개를 씌우는 것을 의무화하겠다는 반려견 안전관리 대책을 발표하였다가 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비판으로 철회한 바 있다. 가만히 있는 상대방을 입질로 위협하며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은 강아지가 아니라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이 아닐까.


두 번째 레퍼토리로는 개가 좋으면 집에서나 키우지 왜 공원이나 길거리 같은 공공장소에 데리고 나오냐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마치 우리가 들어가면 안 되는 곳에 몰래 들어갔다가 발각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공공장소는 우리가 못 갈 곳이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공공장소는 여러 사람 또는 여러 단체에 공동으로 속하거나 이용되는 곳을 말한다.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장소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공공장소는 누구든 차별받지 않고 출입할 수 있고 누구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나이가 많거나 적다고 해서, 외국인이라고 해서, 강아지와 함께 한다고 해서 등등 그 어떤 이유로도 어떤 사람을 공공장소에 출입하지 못하게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물론 공공장소를 이용하는 데도 규칙이 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반려동물의 출입이 금지된 장소(야생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국립공원 등)에는 들어가서는 안 되고, 강아지와 함께 공공장소를 이용할 때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목줄을 하고, 그곳을 함부로 더럽히지 않도록 배변을 치워야 한다. 이런 규칙을 존중하고 지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공공장소이다. 목줄과 똥 봉투를 들고 주변을 살피며 산책하는 고단함 중에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마치 해리와 내가 공공에 속하지 못하는 이상한 존재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슬프게도 이런 일은 제법 자주 벌어지는데 가끔은 나도 규칙이고 이성이고 공공성이고 다 내다 버리고 한 마리 야수가 되어 끓어오르는 나의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밖에도 개가 커서 무섭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큰 강아지가 무서울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이면 내쪽에서 먼저 거리를 둔다. 그런데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이렇게 조심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와 들으라는 듯이 말을 뱉고 지나간다. 이쯤 되면 그의 감정이 공포인지 혐오인지 헷갈린다. 누군가 딱히 피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그들의 존재 자체가 아주 큰 불편이나 피해를 가져온 것처럼 문제를 삼는 것, 명확한 이유도 없이 특정 대상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 이런 감정의 이름은 혐오이다. 만약 그의 감정이 공포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면 피해망상이 아닐까. (강아지를 피하고 싶으면 멀찍이 떨어져 스쳐 지나가거나 보호자에게 목줄을 짧게 잡아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개는 아무 데나 똥을 싸고 지저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종종 만나는데 똥 봉투 가지고 다니면서 치운다고 대답해도 듣지도 보지도 않는 악질의 사람을 만날 때면 들고 있던 똥 봉투를 얼굴 앞에 드밀고 싶어질 때도 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다시금 피로감이 밀려오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렇게 피곤한 시비에 자꾸 휘말리게 되는 것은 내가 강아지와 함께 다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대형견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을 읽거나 그동안의 나의 경험을 (혼자 산책을 나갔을 때와 남성 혹은 다수의 동행과 함께 산책을 나갔을 때를 비교하여) 돌아보면 여성 보호자가 강아지, 그것도 대형견과 함께 다닐 때 남성 보호자보다 시비에 걸릴 확률이 훨씬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들이 시비를 삼는 대상은 비인간 동물인 강아지, 여성인 보호자 다른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이다. 공공장소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람들, 입마개가 필요한 것은 강아지가 아니라 그쪽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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