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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주 Apr 29. 2022

엄마 아니고 언니거든요

해리와 나 23


“엄마랑 같이 산책 나왔나 보네~.”

“엄마 따라 얼른 가~.”

해리와 산책을 가면 나를 해리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만난다. 반려동물을 가족구성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가족을 부르는 말로 반려동물 혹은 반려인을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이러한 호칭의 변화는 반려동물이 인간에 비견될 만큼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에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의 형태가 종을 넘어서 확장되고 있다는 에 해방감도 느낀다. 런데  상냥한 표현들 속에서 정정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엄마라는 표현이다.


해리는 내가 유일하게 생활공간을 공유하며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존재이자 때로는 나의 돌봄이 필요한 존재이지만 나는 해리의 엄마가 아니다. 엄마와 아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나와 해리를 그려 넣으면 이질감이 느껴지고 해리와  사이를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라고 칭하는  또한 매우 억지스럽다는 생각이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누군가의 엄마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피가 섞이지 않다고 해서 가족이, 부모-자식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종이 다르니까, 내가 직접 낳은 것도 아니니까 엄마가   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엄마라는 존재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엄마가 가져야  책임감과 사랑이 나에게 있을까.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모든 부모가  순간 초월적인 사랑을 자식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식이 어느 정도 성장하기 전까지는 애정을 가지고 자식을 돌보아야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자식이 안정감을 가지고 성장할  있고  나은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자녀는 부모를 닮은 새로운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재생산이 부모 자식 관계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해리를 사랑하고 해리를 보살피며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관계는 해리의 성장이나 어떠한 형태의 재생산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 해리를 대하는 이런 나의 마음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마음보다  발짝은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더구나 해리는 아이가 아니다.   성견이 되어 나에게 왔고, 지금은 여섯 살이 훌쩍 넘은 중년의 강아지이다. 해리는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독립적인 존재이다. 반려동물, 특히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 중의 많은 수가 반려견을 귀엽고 사랑스럽고 돌봄이 필요한 대상으로 보고 그렇게 대한다. 상황에 따라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런 관계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면  밑바탕에는 강아지와 내가 대등하지 않은 관계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돌봄을 베푸는 사람은 돌봄을 받는 강아지보다 우위에 있고 돌봄을 받는 강아지는 돌봄을 베푸는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을 하고 그를 만족시키는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 실제로 많은 종의 반려견들이 돌봄을 베푸는 사람들의 욕망과 기호에 맞도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개량되었다고 한다.

반려인들 사이에서는 강아지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는 자라서 독립을 하지만 반려견은 평생 반려인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말이 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강아지와 인간의 방식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돌봄과 교육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반려동물은 언제나 주인의 애정만을 바라고 의지하는 아이 같은 존재는 아니다. 강아지는 나름의 발달 과정을 거쳐 하나의 온전한 강아지로 성장한다. 사회화 시기를 지나 성견이  강아지에게는 고유한 성격이 있고, 자기 의지와 선호가 있다. 그동안 해리를 지켜본 바에 의하면 해리는 많은 일에 대해 스스로의 경험에 의해 판단을 내리고 행동한다. 해리가 의존적으로 행동하는 때는  시간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났을 , 산책을 가고 싶을 , 낯선 곳에서 불안감을 느낄 때와 같이 특정한 상황에 처했을 때이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다. 저녁에 쉬고 싶을  내가 해리 몸을 쓰다듬으면 한숨을 쉬고 돌아누웠다가 자리를 옮긴다.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혼자 있고 싶은,   해리의 마음을 이해하기로 한다.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 반려인과  이상 아이가 아닌 반려견인 우리는 언니와 동생 사이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해리나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는지는   없으므로 나는 해리의 언니가 되기로 했다 하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 자매애라는 말은 적당한 친밀감과 거리감으로 우리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준다. 요즘은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도 다양해져서 언니 같은 엄마, 친구 같은 엄마가 유행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람도 있지만 다양한 선택지가 생겨났다고 해서 반드시 그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관계는 부모 자식 관계라는 우주의 수렴되기보다 다른 우주에 속한다.


주제와는 조금 벗어나는 이야기이지만 반려동물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새로운문화에 대해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사실 인간은, 아니 인간  일부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반려동물을 가족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런 현상은 최근에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에 들어서야 ‘펫펨족이라는 화려한 말로 조명을 받기 시작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소비능력 혹은 투표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펫펨족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 보면 대부분 반려동물 시장의 규모와 이들을 위한 물품을 소개하는 글인 것을 확인할  있다. 반려인들의 필요에 맞는 상품이 제공되고 반려인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도움이 되는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접하면 사랑한다면, 가족이라면  정도는  주어야 한다 혹은  주어야 한다는 압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무리를 이루어 사는 , 보살피는 것은  곧장 소비주의와 연결되는가. 고민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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